<던전리셋 197화>
등천로 전용 배가 완성됐다.
하지만 배라고 하기엔 구조가 영 이상했다.
심연어 비늘로 코팅된 거대 항아리(?) 위에 하늘 신전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아, 뚜껑처럼 덮은 것이다.
하지만 아귀가 딱 맞는다며 정다운은 마냥 좋아했다.
“크으, 딱 맞는데? 반찬 뚜껑인 줄!”
[이게 대체 뭔 모양임? 배를 만든다더니 대충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땡이시네.]
“아무렴 어때? 너무 커서 모양까지 신경 쓰긴 힘들다고.”
아무리 정다운이라도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인 이상 하늘 위에서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건 기능성이야. 효과는 있을 거라고.”
심연의 바다 속에서 부력을 받아 날아다니는 심연어. 그 비늘로 코팅한 신전이라면 충분히 검은 기둥에도 부력을 받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 3개의 기둥 중 어느 곳을 택할지를 고르는 일이었다.
“알파, 승우 형네는 지금 어느 쪽에 있어?”
<미니 제단의 위치를 화살표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파아앗.
알파 내비게이션이 켜지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입니다.>
“좋아. 이 방향이라면 3번째 기둥으로 가면 되겠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하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블리자드!]
휘오오!
바하무트가 신전을 운전해 검은 기둥 가까이로 이동시켰다.
참고로 심연의 안개는 스킬이나 마법의 힘을 상쇄시키는 특징이 있다.
검은 기둥에 가까이 갈수록 바하무트의 마법은 점점 효력을 잃고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검은 기둥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이유였다.
바하무트는 아련하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심연의 안개는 마법으로 유지하고 있던 그의 몸까지도 녹여 버린 것이다.
[주인니임, 저는…… 이만…… 안녕히…….]
[궁상떨지 말고 내려가서 그림자 고양이나 길들이고 있으셈.]
[흠, 그럴까.]
토끼의 말에 주저 없이 일어나 그림자 감옥으로 흐물흐물 흘러 내려가는 바하무트.
신전의 지하는 심연의 안개가 닿지 않아서 안전했다.
마법도 쓸 수 있어서 녹아내리던 몸도 다시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다만, 텃세가 심했다.
니야앙-.
빛이라곤 한 점도 없는 그림자 감옥에서 뾰족한 눈동자들이 눈을 세모나게 뜨고 불청객을 노려봤다.
그리고 바하무트의 기억을 더듬어 ‘악몽’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오냐, 나도 반갑구나.]
바하무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다운도 들어오지 못하는 이 그림자 감옥 안으로 그가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 수 있는 이유.
눈사람이 되었어도 어디까지나 그의 본색은 어둠의 리치.
악몽 따위가 그를 해칠 수는 없었다.
악몽? 그런 게 뭐가 두렵단 말인가.
오히려…… 반가울 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마녀 님. 잘 계셨나이까.]
놀랍게도 바하무트의 앞에 나타난 환상들의 정체는 바로 마녀였다.
어떤 환상은 귀여운 소녀로, 어떤 환상은 고혹적인 자태의 여인이 되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바하무트는 자신의 악몽을 향해 극진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불을 들었다.
화르륵!
[횃불이라도 드시겠나이까?]
그 뜨거운 불길에 자신의 몸까지 녹아내릴지라도.
그는 주저 없이 마녀의 몸에 불을 붙였다.
* * *
둥실!
[오오, 뜬다!]
“크으, 내가 뭐랬어? 된다고 했지?”
검은 기둥 위에 동동 떠오른 하늘 신전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하자, 정다운과 토끼가 마주 보고 만세를 불렀다.
<덕분에 생명 에너지를 아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력으로만 이동하다니 훌륭한 생각이셨습니다.>
“으하하.”
아주 성공적이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범독수리들은 기둥 가까이로 다가오지 못했고, 검은 기둥은 천천히 신전을 앞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속도가 조금 느렸다.
“아니, 저번에 보니까 승우 형네는 엄청 빨리 날아가던데 우리는 왜 이러지?”
[우리가 무거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이러다 다음 섬에 도착하기도 전에 검은 기둥이 없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갑자기 범독수리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떨궈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하필 그가 고른 검은 기둥이 가장 멀리 있는 부유섬과 연결되어 있었다.
“안 되겠다. 추진력을 얻어야겠어.”
그는 부랴부랴 대장간으로 가서 철을 녹이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대장장이 실력은 어설펐지만, 그래도 간단한 구조는 만들 수 있었다.
그는 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크고 기다란 홈을 팠다.
그리고 그 안에 새빨간 쇳물을 부어서 식혔다.
그렇게 어설프지만 골렘들이 들 수 있는 거대한 ‘노’가 탄생했다.
그런데 하나 신기한 점은, 그 무거운 물건을 정다운이 거뜬히 손으로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다 이번에 해골 기사 반다이크를 잡고 레벨 업을 한 덕분이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MASTER)
- 신체 능력 4배 증폭
- 지속 시간 무제한
외뿔 멧돼지의 기운이 마스터 레벨이 되면서 지속 시간 1분이 지나면 10초를 기다려야 했던 제한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패시브 스킬이 된 것이다.
물론 스킬을 비활성시키는 것도 가능했지만 평소에도 아무 제한 없이 계속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
겨우 재사용 시간 10초가 사라진 게 얼마나 차이가 나냐고 하겠지만, 목숨이 오가는 전투 중에 갑자기 10초씩이나 힘이 풀리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아, 부력을 받으려면 여기에도 심연어 비늘을 코팅해야겠지?”
비늘 코팅 작업은 그림자 하인들에게 맡기니까 금방 끝났다.
그렇게 만든 거대한 노를 어깨에 들쳐 메고 재수 없는 모델 포즈를 취하는 정다운.
“훗, 하나 완성.”
[안 멋있음. 빨랫대에 널린 빨래 같네요. 그런데 그렇게 길면 금방 휘지 않을까요?]
“……인 줄 알겠지만 아직 마지막 단계가 남았지! 강화 시스템 오픈!”
그는 부족한 대장장이 실력을 강화로 때웠다.
[단단한 심연의 노 +1]
- 내구력 : 100/100(%)
- 옵션 : 단단함 (1레벨)
[요령 쩌네.]
“이러면 적어도 노를 젓다가 휘거나 고장 날 일은 없겠지? 좋았어. 이렇게 몇 개만 더 만들자고.”
그는 심연의 노를 만드는 족족 골렘들의 손에 쥐어 주고 노를 젓게 했다.
그럴수록 신전이 이동하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크워 크워.”
“우오옴.”
휘적 휘적.
좌우로 갈라져 바이킹 노예들처럼 열심히 노를 젓는 골렘들.
하지만 그걸 뒤에서 바라보는 정다운 선장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아직 부족해. 좀 더 빨리 안 되나?”
누가 검은 기둥이 언제 사라질지 스케줄 표라도 알려 주면 참 좋을 텐데, 제한 시간을 모르니까 답답했다.
“모터라도 달면 좋을 텐데.”
[모터가 뭐임?]
“아하!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
“모터가 별거냐!”
정다운이 갑자기 이마를 탁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나 지금 누구랑 말한 거임?]
정다운은 신전 구석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는 문어 골렘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멀뚱히 꼬물거리는 문어 다리들을 가리키며 그림자 하인들을 불러냈다.
“코팅해!”
“니야앙.”
문어 골렘까지 코팅이 되자, 하늘 신전은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정다운은 문어 골렘을 신전 뒤편으로 눕혀 놓고,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듯이 8개의 다리를 계속 흔들게 했다.
그러자 하늘 신전은 거의 2배 이상의 속도로 검은 기둥 위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으이익? 너무 빨라요! 이러다 기둥 밖으로 튕겨 나가겠음!]
“흠. 이 정도로 당황하지 말게, 토끼 갑판장! 바다는 우리 편이다!”
[나 갑자기 갑판장임? 갑판도 없는데?]
빨라진 속도에도 정다운 선장은 당황하지 않고 루갈처럼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골렘 노예들에게 명령했다.
“좌현! 방향을 잡아라!”
“크워?”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는 골렘들.
“응, 왼쪽은 좀 천천히 노 저으라고.”
[너님들, 지금 용어는 제대로 알고 대화하는 거 맞죠?]
“알게 뭐야? 대화만 통하면 되지.”
초반에 조금 버벅거렸지만 다행히 방향은 금방 잡혔다.
“좋았어. 이대로만 가자!”
[가즈아!]
토끼도 어느샌가 그에게 물들어서 엄청 신나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중절모를 벗고 해적 모자를 쓰고 검은 안대까지 차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정다운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물었다.
“야. 매번 그 옷들은 대체 어디서 계속 나오는 거야?”
[훗. 나 같은 멋쟁이한테는 항상 전용 드레스 룸이 존재하죠.]
언제나 멋을 중시하는 토끼였다.
항상 비슷한 스타일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턱시도의 종류도 매일 바뀌었고, 색깔도 다양했다.
최근엔 비에 옷이 젖었는데도 굳이 말릴 것 없이 금방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은근히 쓸데없이 자잘한 소품들이 많단 말이지.”
[탐내지 마셈. 다 내 꺼니까요.]
“아니, 쓸데없다고 말한 게 포인트라고.”
토끼의 물건들은 정말 ‘쓸모없이’ 멋만 중시하는 소품들이었다.
[내가 저번에도 언뜻 말한 것 같지만, 도우미들한테는 자신만의 비밀 공간이 존재해요. 이렇게요.]
찌이익!
토끼가 갑자기 지퍼 손잡이를 꺼내더니 허공에 문을 열었다.
그것은 정다운이 보던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조금 달랐다.
“고정 좌표 없이도 열리네?”
[워프 게이트의 일종이죠. 나한텐 이 지퍼 손잡이가 열쇠예요.]
“열쇠? 흐음.”
정다운이 지퍼 구멍 안으로 조심히 손을 밀어 넣어 봤으나, 진입이 불가능했다.
[히히, 님은 못 들어가요. 이 드레스 룸에는 나밖에 못 들어가거든요.]
정다운이 투덜댔다.
“누가 인형 아니랄까 봐. 인형만 들어갈 수 있는 인형의 집이라도 되냐. 이제 보니 그 지퍼도 인형에 달린 지퍼 아냐?”
[히히.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럴 듯하네요. 아무튼 도우미마다 비밀 공간의 특징이 달라요. 이 지퍼 손잡이도 내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임.]
토끼가 손을 휘젓자 뿅, 하고 지퍼 손잡이가 사라졌다.
드레스 룸의 입구도 사라졌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열쇠를 잊고 있었네.”
정다운은 문득 바분을 죽이고 얻은 유품이 떠올라 소지품을 뒤졌다.
[바분의 황금열쇠 +1]
-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마법 창고 (1레벨)
이번에 반다이크의 유품을 얻고 나서 그는 ‘유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보상으로 ‘유품’을 받았을 때는 항상 신기한 능력이나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동안 바빠서 처박아 뒀는데 이것도 나름 유품이었단 말이지?”
[라고 천하의 놈팽이가 말했다.]
토끼의 딴지는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바이킹 노예, 아니, 골렘들에게 배의 운전을 맡겼으니 당분간 그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는 게 시간이었다.
열쇠를 연구해서 이것에 맞는 자물쇠를 만들 수만 있다면, 바분의 비밀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결심했어. 다음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 열쇠에 맞는 자물쇠나 한번 만들어 보자.”
[라고 천하의 놈팽이가 말했다.]
토끼를 무시하고 그가 꺼낸 건 바로 자동문 함정이었다.
척.
“이 문짝에도 나름 열쇠 구멍이 달려 있잖아? 이거 분해해서 연구해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라고 천하의 놈팽이가…… 아얏!]
딱콩.
결국 한 대 얻어맞은 토끼였다.
정다운은 자동문을 찬찬히 뜯어 분해하기 시작했고, 그 표정이 마치 고장 난 컴퓨터를 분해해 보는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