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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96)화 (196/393)

<던전리셋 196화>

*   *   *

틈새 지역은 며칠 전에 비하면 상당히 한산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해골 병사들이 본 드래곤이 되었다가 땅에 묻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뜨문뜨문 새롭게 기어 나오는 해골 병사들은 나오는 족족 참가자들 손에 잡혀 신전의 제물이 되었다.

애초에 놈들은 숫자가 많지 않으면 대단한 괴물들도 아니었다.

“평화로구나.”

성벽에 올라 그 모습을 구경하던 정다운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정다운은 오랜만에 토끼와 마주 앉아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제물을 바치면 또 본 드래곤이 출동할까 봐 걱정했는데, 별 소식 없네요.]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제물을 바쳐도 그날 밤처럼 해골 요새가 등장하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다행이긴 한데 그는 조금 아쉬웠다.

“그냥 요새 하나쯤은 더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그러면 반다이크의 반지 같은 아이템도 하나 더 생겼을 텐데.”

<위험한 생각입니다.>

[맞아요. 아이템 얻으려다 인생 쫑나고 싶음? 난 이번에 진짜 무서웠다고요, 으으.]

그때를 생각하자 토끼는 몸을 오소소 떨었다.

괴물의 크기가 반드시 강함의 척도는 아니었지만, 골렘들 열 마리쯤은 합체한 것 같던 본 드래곤의 위용은 정말 위압적이었다.

“그러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무슨 트랜스포머도 아니고, 움직일 때마다 자잘한 뼈들이 로봇 관절들처럼…….”

[트랜스포머가 뭐임?]

“그게 뭐냐면-.”

수다는 언제 해도 재밌었다.

정다운은 그날 밤의 무용담과 소감을 주제로 토끼와 두런두런 노닥거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래, 우리도 만들자!”

[또 뭘요?]

“트랜스포머.”

그가 씨익 웃었다.

트랜스포머(Transformer)라는 말에는 ‘개선하다’라는 뜻도 있다.

위에서 지켜보니, 참가자들에겐 사냥하는 것보다 사실 더 번거로운 일이 제물을 바치러 제단이 있는 지하까지 걸어 내려가는 일이었다.

참고로 지하 신전까지 내려가는 계단이 무척 깊고 길다.

동선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우물을 뚫자. 구멍을 뚫어서 위층에서 제물을 떨어뜨리면 곧장 제단 위로 떨어지게 직통 터널을 만드는 거야. 돼지 저금통처럼.”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군요. 어차피 한 명에게 제물을 몰아 주고 소지품으로 옮기면 그만 아닙니까?>

“넌 정말 한결같이 쫌생이구나. 곧 죽어도 게이트를 열어 주자는 말은 절대 안 하는 거 봐라?”

<우리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합니다. 에르테아 님의 부활을 위해서.>

“그러니까 더욱 우리는 돼지 저금통을 만들 필요가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도 계속 참가자들은 여기 방문할 거 아냐? 그 사람들을 위한 자판기를 만드는 거지.”

<자판기라는 게 무엇입니까?>

대답보단 씨익 웃는 정다운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건 정확히는 ‘쌀 자판기’였다.

어차피 참가자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 땅을 방문할 테고, 식량은 언제나 부족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앞에 떡하니 동전을 넣으면 ‘벼’가 자라는 자판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론 여기서 ‘동전’이라는 건 바로 이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해골 병사들을 말했다.

“먹지도 못하는 뼈다귀를 바쳐서 쌀밥을 얻는다면 다들 좋아하지 않겠어? 해골 병사 1마리당 벼 한 포기가 리셋되게 해 두면, 리셋하고 남는 생명 에너지는 전부 우리가 갖는 거지. 어때?”

갑자기 장사꾼이 된 정다운이었다.

알파도 그 계획이 솔깃했다.

<뭔가 속물적인 냄새가 많이 나지만, 제물을 바치는 신도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준다는 개념이긴 하군요. 저도 찬성합니다.>

사실 알파가 찬성하고 안 하고는 별 상관도 없었다.

정다운은 이미 땅을 파고 있었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푹팍 푹팍!

앉은 자리에서 곧장 수직으로 땅을 파 들어가자, 잠시 후 지하 신전까지 관통하는 깊은 우물이 생겨났다.

그는 그 땅굴 중간에 최근에 공수해 온 자동문 함정들을 설치했다.

“토끼야, 이 자동문을 생명체가 아닌 것에만 반응해서 문이 열리게 할 수 있지? 제물이 떨어질 때만.”

[그야 어렵지 않죠.]

원래 이 문짝들은 전부 토끼의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제물을 바쳤을 때만 문이 열리는 칸막이가 생겨났다.

“자판기 완성! 자, 잘 되나 실험해 보자고.”

실험 삼아 해골 병사 하나를 우물 속으로 떨어뜨려 봤다.

슈우웅- 쿵.

동전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제물이 성공적으로 제단 위에 안착했다.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좋았어. 그럼 이제 이 에너지를 이용해 벼 한 포기만 리셋하는 거지. 리셋!”

[함정을 리셋합니다.]

우물 뒤에는 추수가 끝난 넓은 텃밭이 있었다.

그 위에 노랗게 익은 벼 한 포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좋았어! 바로 이거야. 어때? 이게 바로 자판기야. 이 한 포기면 밥 한 공기는 충분히 넘을걸?”

<뭘 원하시는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을 우리가 매번 지켜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면 효율적이겠군요.>

“맞아. 가능해?”

알파의 말에 정다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리셋 스킬을 2레벨로 올리실 때가 되었습니다.>

신전의 관리 스킬은 생명 에너지를 투자해 레벨을 올릴 수 있다.

게이트와 함정 설치, 리셋 스킬이 바로 그러했다.

마침 범독수리들을 잡아서 에너지도 충분하니, 즉석에서 레벨 업이 이루어졌다.

[<리셋> 스킬이 2레벨로 발전했습니다.]

 

리셋 (2레벨)

- 처음 상태로 되돌린다.

- 생명 에너지를 소모한다.

- 조건을 설정할 수 있다.

“조건이라고?”

<리셋에 특별한 발동 조건을 미리 설정해 두는 겁니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하, 최종 보스를 잡으면 저절로 던전이 리셋이 되는 식이구나.”

요점을 바로 눈치챈 정다운.

종말의 용과 생명의 용의 권능은 같은 용족이다 보니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푸히히.]

갑자기 뭐가 웃긴지 토끼가 낄낄댔다.

[세르파가 열심히 마법 연구해서 개발한 자동화 시스템을 우리는 스킬로 대충 때워 버리네요.]

<그게 바로 격의 차이입니다. 용의 권능과 검은 고양이가 흉내 낸 마법이 동등할 리는 없지요.>

“훗. 이게 바로 격의 차이지.”

[님도 몰랐으면서 뒤늦게 잘난 척하지 마셈. 그 재수 없는 포즈도 제발 그만하라고요.]

정다운은 우월한 기럭지와 우수에 찬 눈으로 우물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괴고 있었다.

우물을 파느라 흙투성이만 아니었다면 살짝 멋있을 뻔했다.

“멋있어…….”

“어쩜 저렇게 땅을 잘 파시지?”

아니, 사실 그를 멋있어하는 팬층은 제법 두터웠다.

일단 그의 추종자 오동민.

“역시 다운이 형은 진짜 못하는 게 없다니까! 땅도 잘 파고. 땅도 잘 파고. 땅도 잘 파고…….”

의욕에 비해 칭찬거리가 그리 많진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목숨이 구해진 여성 참가자 홍연지(23세)도 있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셔…….”

그녀는 틈만 나면 꿈꾸는 소녀 같은 몽롱한 표정으로 정다운을 멀리서 바라봤다.

이미 단단히 콩깍지가 쓰여서 그가 땅을 파는 모습조차 설렜다.

하지만 마냥 콩깍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정다운은 오랜 땅굴 생활로 인해 허리는 구부정하게 휘고 거북목도 심해서 곱등이가 따로 없었다.

이건 자세와 습관의 문제라서 생존자 전체회 복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부작용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안 좋은 습관들을 거인의 뼈가 해결해 준 것.

그는 이제 땅을 파는 모든 자세들이 곧고 이상적이었다.

땅 파는 잡지라도 있었다면 메인 모델로 발탁될 기세였다.

허리를 숙여도 멋있고, 땅을 파느라 곱등이처럼 엎드려 있어도 숭고한 기사가 황제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한 장면 같았다.

“엇. 다운이 형은 내 꺼니까 넘보지 마요, 누나!”

“……으응?”

몽롱하게 그의 모습을 감상하던 그녀를 막아서는 오동민(15세).

그는 한창 같이 뛰어놀 형이 필요한 나이였다.

경쟁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신경전을 하는 오동민과 홍연지 사이에 무언의 전류가 파직거렸다.

[휴. 부질없는 투쟁이네.]

토끼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짠짠! 여러분께 좋은 소식 전하러 왔습니당!]

정다운은 토끼를 시켜서 벼 자판기 시스템에 대해 참가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 오게 될 손님들을 위해 그 모든 내용들을 푯말에 적어 부유석으로 틈새 지역 곳곳에 띄워 올렸다.

전단지를 붙일 전봇대가 없으니 전봇대까지 직접 만드는 중이었다.

참가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이었다.

“오, 잘됐다. 그럼 앞으로는 정다운 씨가 없어도 언제든 쌀을 구할 수 있겠는데?”

“정말 좋은데? 그럼 던전을 공략하고 돌아와도 여기서 식량을 구할 수 있겠어!”

던전에 가면 사실 고기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가면 갈수록 나타나는 괴물들은 강해지고 있었고, 그놈들을 사냥해 일일이 독기를 빼고 도축을 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허기를 채우기 위해선 차라리 쌀 한 줌이 더 소중할 때가 많았다.

“좋아. 자판기는 이쯤이면 됐고, 슬슬 던전으로 보내 줄까?”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파아앗!

얼마 후, 참가자들 앞에 마녀의 집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열렸다.

안 그래도 죽음의 카운트가 점점 줄어들고 있던 그들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아무리 위험한 던전이라도 거기까지 가는 길이 험난해서 그렇지, 일단 입장하기만 하면 공략이 일주일 이상 걸리지는 않았다.

설령 그 안에서 죽을지라도 말이다.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게이트를 넘어가는 사람들에게 정다운을 향한 감사 인사가 끊이질 않았다.

모델처럼 꼿꼿하게 서서 그 인사를 일일이 받아 주는 정다운에게 토끼가 헤죽거렸다.

[안 찔림? 결국 저 사람들은 우리가 제물 바쳐서 그 고생을 한 거잖아요.]

“……쉿. 조용히 해. 그래도 내 덕분에 레벨 업들도 잘 하고 가잖아.”

사실 그래서 더 잘해 주는 것도 있었다.

그 난리통에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심하게 다친 사람은 던전 고추를 이용해 만든 지혈제도 전해 줬으니 그로서도 할 만큼은 한 셈.

“자, 그럼 이제 우리도 슬슬 돌아가 볼까?”

[스테이지-5로 갈 거임?]

“그래야지.”

파아앗!

그는 바로 하늘 신전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계란섬은 아직도 리셋이 안 되어 있었다.

유적지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길도 건재했다.

“어디 보자. 일들은 잘 하고 있었나?”

그렇지 않아도 그사이 틈틈이 그림자 하인들을 이쪽으로 보내 시킨 일이 하나 있었다.

[오. 제법 그럴싸한데요?]

토끼가 짧은 감탄성을 흘렸다.

어느덧 항아리처럼 생긴 호박 포차의 표면이 온통 반투명한 심연어의 비늘로 코팅되어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암벽 등반이라도 하듯 그림자 하인들이 벽을 걸어 다니며 비늘을 붙이고 있었다.

참고로 그림자 하인들은 그림자라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땅에 발만 붙이고 있으면 그곳이 곧 땅이었다.

“그럼 이제 심연의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고. 연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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