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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94)화 (194/393)

<던전리셋 194화>

*   *   *

길고 고되던 하룻밤의 전투가 끝났다.

참가자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틈새 신전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그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밤새 비를 맞으며 진흙탕을 뒹굴며 싸웠으니 체력은 바닥나 있었고, 상처도 심했다.

하지만 생존자 전체 회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대단한 승리도 했고, 만족스런 레벨 업과 보상까지 획득했으나 정상적인 던전을 공략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붕 리셋.”

정다운은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우선적으로 뻥 뚫린 천장부터 보수했다.

솨아아…….

순식간에 빗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고, 그 사이를 대신 채운 건 태양석의 따사로운 햇볕이었다.

“하아…….”

사람들의 입에서 한숨과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소나기를 피해서 난방이 돌아가는 집 안에 들어온 기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옥과 천국이 갈려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에 쫄딱 젖은 옷가지를 벗어서 내리쬐는 햇볕 아래 말리기 시작했다.

촤아악!

넝마가 된 옷가지를 걸레 짜듯 쫘악 비틀자, 핏물이 절반이요 빗물 절반이다.

간밤의 고생들이 폭포처럼 쭈욱 빠져나왔다.

“좀 도와주실래요?”

“네, 그러죠.”

두꺼운 옷은 옆의 사람과 마주 들고 이불 짜듯 비틀어야 했다.

그렇게 물기를 최대한 탈탈 털어 양지바른 땅에 활짝 펼치고 널고 있는데, 정다운이 불렀다.

“어어? 그렇게 말리면 냄새 나요. 이걸 쓰세요.”

음?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은 멍한 표정으로 저마다 하트 모양 비누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음?”

그렇다. 비누였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비누였다.

봉긋봉긋 예쁜 하트 모양에 꽃잎도 첨가했는지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수제 비누예요. 심심할 때마다 만들었더니 좀 많아요.”

“……?”

뭔가 이상한 말이었다.

‘심심할 때마다?’

물론 심심풀이로 수제 비누 만드는 게 취미인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여긴 던전이지 않은가?

사는 것도 고달픈데 심심함을 느낄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평범한 척 절대 평범하지 않은 그의 말은 계속됐다.

“아까 비샌 땅에 물웅덩이 생겼으니까 빨래는 거기서 하시고, 말릴 때는 아래 내려가시면 선인장 건조실이 따로 있거든요? 금방 보송보송해질 거예요.”

“……네?”

“아, 맞다. 씻으실 거면 그 옆에 사우나 있으니까 뜨거운 물에 몸 좀 녹이시고요.”

“……사우나?”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정다운의 안내를 받으며 얼떨결에 빨래도 하고 목욕까지 하게 된 참가자들.

꾀죄죄하던 몰골들이 순식간에 보송보송하고 말끔해져 버렸다.

그러자 그 앞에 밥이 차려져 있었다.

쌀밥에 된장찌개, 그리고 제육볶음이었다.

“고추장을 만든 김에 외뿔멧돼지로 제육볶음을 해 봤어요.”

“……제육볶?”

여기 던전인데, 여기 던전인데, 라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얼레벌레 밥까지 얻어먹게 된 참가자들.

머릿속에는 온통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어때요? 맛있음? 이 고추 내가 직접 농사한 거임!]

“……?”

오랜만에 밥 해 준 엄마처럼 밥상머리에서 오만 생색을 내는 토끼의 질문에도 그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맛있었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달짝지근한 물엿과 진한 고추장 양념에 버무려진 돼지고기 위에 고추기름이 반들반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걸 푸욱 떠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쌀밥 위에 올리고 입으로 쏘옥 넣자.

“하으아……!”

뜨겁다!

하지만 절대 뱉을 수는 없었다.

고기가 씹힐 때마다 매콤달달한 육즙이 이 사이사이로 쭈와악 스며들며 침샘이라는 것이 폭발해 버렸다.

“맛……있네요. 엄청.”

누군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추위 때문인지 매운 음식 때문인지, 눈물샘도 터져 버렸다.

“훌쩍.”

“끄흐흡……!”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을 입에 물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참가자들.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다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던전에서 있었던 지난 1여 년의 시간들이 다 꿈같았다.

[에잉, 맛있는 거 먹으면서 왜 갑자기 울고 그런데? 음식이 짜겠네. 이거나 마셔요.]

툴툴보 토끼가 혀를 차며 사이다를 따라서 나눠 줬다.

그들의 눈물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집에…… 가고 싶었다.

*   *   *

빨래가 마르는 동안, 토끼에게 문의가 쇄도했다.

“토끼 님, 던전을 다 공략하면 정말 집에 돌아갈 수 있나요?”

“토끼 님, 던전은 대체 몇 스테이지까지 있나요?”

“예전에 다른 도우미한테 들었는데, 우리는 종말의 용의 제물이라던데요? 그러면 던전을 다 공략해도 결국 다 죽는 거 아닌가요?”

“토끼 님, 알려 주세요-.”

[아, 한 명씩 좀 말하셈!]

막간을 이용해 토끼를 대상으로 무차별 청문회가 열렸다.

마이크라도 들이밀 기세였다.

기자들은 모두 토끼 밑에서 스테이지-1을 졸업한 참가자들.

그동안 여러 도우미들을 겪는 동안 그들은 그나마 토끼가 가장 친절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찌 된 영문인지 직장도 때려 쳤다고 하니 불안해하던 것들을 물어보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음, 일단 내가 맨 처음에도 말했었지만, 던전을 다 공략하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진짜예요.]

“확실한가요? 끝에 가서 결국 종말의 용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건 아니고요?”

[아, 그건 걱정 마셈. 용이라는 종족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오히려 공략 중에 죽어 버리면 제물이 되니까 죽지나 마요.]

“몇 스테이지가 끝인가요?”

[그건 나도 몰라요. 난 도우미가 되고 나서 스테이지-1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다고요.]

“정말 모르시나요?”

[에잇, 속고만 살았나!]

발끈하는 토끼.

하지만 정다운을 따라다니는 동안 이런 상황은 벌써 몇 번이나 있어 와서 익숙했다.

어차피 참가자들이 궁금해하는 건 다 비슷했고 대답도 척척 나왔다.

정다운은 그 뻔한 대화들을 백색소음으로 들으며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배도 부르고 따뜻하니 노곤노곤 잠이 왔다.

귓가를 지나가던 백색소음이 점점 멀어져 갔다.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여긴 어디지?’

정다운은 어리둥절 주위를 둘러봤다.

융성한 도시.

활기 넘치는 시장통.

그 한가운데 자신이 서 있었다.

“좋은 물건이 들어왔어요! 좀 보고 가요!”

“싱싱한 과일이 왔어요!”

“거기 어르신, 귀여운 손녀분한테 이 머리끈이 참 잘 어울리겠는데요?”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상인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정다운에게는 말을 걸지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설마 자각몽인가?’

다시 돌이켜 보니 주변 풍경에 아지랑이라도 낀 듯 묘하게 몽롱한 느낌이었다.

길가에 서 있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영화 속으로 뛰어 들어와 그 안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묘한 감각.

이와 비슷한 기분을 그는 최근에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미니맵.’

그렇다. 이건 미니맵 기능을 통해 오동민의 상황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느낌과 비슷했다.

‘어쩐지 묘하게 사람들이 작아 보인다 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람들이 작아진 게 아니었다.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본 정다운은 움찔 놀랐다.

이 거대한 손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발도 커졌다.

‘음?’

비로소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자신은 거인이 되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을 확신하자 그는 태평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도시를 구경했다.

마치 중세 판타지 영화를 보는듯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세계사를 잘 모르니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딕하면서도 르네상스한 건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구나.’

거인이라서 좋은 점이 있었다.

높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우연일까, 필연일까.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

그 꼭대기 창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반다이크 경, 안녕!”

‘어!?’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자 그는 깜짝 놀랐다.

오밀조밀 귀엽게 생긴 자그마한 소녀가 앙증맞은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반다이크 경은 오늘도 크네요!”

“아가씨가 작은 겁니다. 언제 크실 겁니까?”

‘응? 이건 내가 말한 게 아닌데?’

정다운의 입에서 담백하지만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소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에헴. 이래 봬도 나 이번에 키 좀 컸거든요?”

“그래요? 얼마나 크셨습니까?”

“아주 쪼끔요, 헤헤.”

민망한 듯 몸을 배배 꼬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앙증맞았다.

얼굴 가득 머금은 함박웃음.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는 모습이 반짝반짝 빛났다.

‘귀족인가? 아니면 왕족? 그런데 그러기에는 좀…….’

정다운은 그녀가 살고 있는 화려한 건물에 비해 입고 있는 옷이 상당히 허름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창문을 통해 슬쩍 보이는 방도 회색빛이 가득했다.

‘이건 거의 신데렐라 느낌인데.’

마치 이 꼭대기 방에 감금이라도 당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안 힘드십니까?”

걱정이 묻어 있는 거인의 말에도 소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도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에이, 무리하지 마세요. 저는 진짜 괜찮으니까요.”

그 힘없는 미소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런데 이 여자애 좀 익숙한데? 어디서 봤더라?’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갑자기 그의 시야가 흙빛으로 물들었다.

콰르릉!

‘……!’

정다운은 당황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아름답던 도시가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무너진 성벽.

불타는 건물들.

그 아래 처참하게 죽어 버린 시체들.

융성하던 도시의 멸망은 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죽어 가는 건 거인이 된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차갑게 식어 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이 기묘한 감각이 낯설었다.

그때였다.

[이게…… 나의 최선이었다.]

‘어? 누구?’

갑자기 정다운의 머릿속으로 괴로운 듯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거인 기사 반다이크. 기사의 도리를 저버린 자.]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시선이 힘없이 멀리 떨어진 숲으로 향했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멸망을 막지는 못했으나, 내 죽음을 통해 그 아이 하나만은 지켰으니…….]

그 숲은 정다운의 눈에도 익숙한 숲이었다.

‘저긴 야수의 숲?’

화르륵!

그리고 동시에 도시에 붙어 있던 화마가 거인 기사 반다이크의 몸에도 옮겨 붙었다.

그 뜨거운 불길은 마치 지옥의 불길처럼 거인의 몸까지 불태웠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비록 내 살과 피는 이렇게 불타지만, 내 뼈와 영혼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내 모든 걸 걸고 그녀를 지키고 말리라.]

그는 그렇게 몸을 다시 일으켰다.

하지만…….

화르륵!

이윽고 그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크게 당황하며 분노에 떠는 반다이크.

그의 감정이 정다운에게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꿈은 그렇게 끝났다.

파창!

‘……!’

갑자기 밖으로 튕겨 나가는 기분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으로 한 줄기 중후한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감사합니다. 제 더럽혀진 영혼을 씻어 주셔서……. 비록 이제 남아 있는 건 제 뼈밖에 없지만, 그대에게 드리겠나이다.]

파아앗!

“……!”

그 순간 정다운의 몸에서 환하게 빛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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