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93화>
그어어어!
산처럼 쌓인 흙무덤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갇혀 버린 본 드래곤은 머리만 빼꼼 나와 무섭게 포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목을 이리저리 비틀고 용을 써 봐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뼈가 많이 합쳐져서 드래곤까지 되었더라도, 뼈는 뼈일 뿐이었다.
압도적인 무게의 흙에 깔리면 으스러지고 조각조각 깨지고 마는.
힘으로 강제로 기어 나가기 위해 몸을 재생하려 했으나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뼈 사이사이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온 흙이 해골 병사들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꽉 물고 놔주지 않으니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와, 형 진짜 짱이다…….”
오동민은 꿀이라도 떨어질 듯이 극도의 선망의 눈길로 정다운을 쳐다봤다.
사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정다운에 대한 첫 이미지는 게임 엄청 잘하는 동네 형이었다.
막 던전에 발을 들인 자신에게 던전 게임에 대해 과외해 주고 필요한 아이템들도 챙겨 줬으니 말이다.
이제 중학생이 된 그에게 게임 잘하는 형만큼 훌륭한 사람은 더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젠 자기도 제법 게임 좀 잘하게 됐나 싶었더니, 그 형은 어느덧 쫓아가지도 못할 만큼 우주 대스타급 프로게이머가 되어 있었다.
‘혼자서 맵을 통째로 새로 갈아 엎어 버리다니……. 대박 진짜 멋있어.’
다른 참가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스킬을 어떤 방식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지만, 눈앞의 결과가 상상 초월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뭐 하는 사람, 아니, 분이시지?”
“멋있어…….”
특히 조금 전 정다운에게 구해진 여성 참가자는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할 수 없었다.
본 드래곤에게 밟혀 죽기 직전에 멋지게 나타나 자신에게 손을 뻗던 그의 모습은 마치 백마 탄 왕자라도 나타난 기분이었다.
물론 실상은 백마가 아니라 흙으로 된 타조였고, 왕자도 아니고 그냥 타조 만든 흙쟁이었지만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쓰여 버린 것이다.
거기에 심지어 죽을 뻔한 위기를 겪어서 심장도 벌렁거렸고, 높이 떠 있는 부유석 위에 있어서 흔들다리 효과까지 추가됐다.
물론 이건 단지 그녀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떠나,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정다운이라는 사내에게 반해 버렸다.
흙이나 파던 흙쟁이에서 하루아침에 인싸가 된 정다운은 그 뽕에 취해 버렸다.
“훗, 이제 슬슬 결정타를 먹여 보실까?”
[님 왜 갑자기 잘생긴 척함? 되게 못생겼는데.]
“음흠흠.”
정다운은 괜히 루갈처럼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서서 택시를 불렀다.
그러자 그 앞으로 포르쉐보다 더 잘 나가 보이는 문어 택시가 유유히 다가왔다.
[호우!]
운전기사도 딸려 있었다.
눈사람이지만.
“내려가자.”
문어 골렘을 타고 흙무덤 위에 내려선 정다운.
최대한 강해 보이게 휘적휘적 팔을 흔들며 조선 양반처럼 걸어 본 드래곤의 머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어어!”
“엄마, 깜짝이야.”
위협적으로 이빨을 딱딱거리는 본 드래곤의 모습에 찔끔하고 뒤로 물러나는 정다운.
가까이 갔다간 통으로 삼켜질 기세였다.
[이럴 거면 왜 가까이 왔음?]
“레벨 업할 기회잖아? 스킬 최대한 골고루 써 가면서 잡아야지.”
그는 요즘 레벨 업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흠. 무슨 스킬로 잡아야 잘 잡았다고 소문이 날까?”
그는 자신의 스킬창을 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스킬이 생각보다 별게 없어서 고민하고 말고도 없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개미 더듬이, 돌리기, 정화.”
휘리릭!
파앗! 파아앗!
이미 마스터한 흙 뭉치기와 돌 깨기를 빼면, 그나마 싸울 수 있는 스킬은 이게 전부였다.
[풉. 되게 소소하네요. 과정은 화려했는데 결정타가 짜잘한 거 봐.]
“…….”
조금 쑥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랴.
진짜로 스킬이 이게 전부인 것을.
“함정 설치, 함정 설치.”
낄낄대는 토끼를 뒤로한 채 그는 묵묵히 본 드래곤의 머리 주변에 땅을 파고 던전 콩을 한 땀 한 땀 심었다.
“휘유, 고되다. 오늘만 몇 번째 농사인지…….”
잠시 굽혔던 허리를 펴고 땀을 닦는 그의 눈에 문득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며 두근대고 있던 그들의 얼굴에서 열기가 점점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멋있는 척 실패.]
“에잇, 몰라. 죽어! 정화! 정화!”
“크윽! 크하악!”
민망해진 그는 정화구체들로 해골 기사의 얼굴을 깨작깨작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해골 기사는 머리만 빼고 땅에 파묻힌 빚쟁이처럼 반항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아프긴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크하아악! 이노오옴!”
그어어어어!
“어우, 맷집도 좋네. 얼른 죽어! 정화! 정화!”
투둥 투둥!
다 자라난 던전 콩들까지 합세했으나 이러다 날 샐 것 같았다.
[맷집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토끼.
정화 스킬이 아무리 속성 상 우위에 있어도 해골 기사에게 결정타를 날리기엔 애매하게 약했다.
“에이씨, 더럽게 안 죽네!”
결국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뭐 해요, 다들? 왜 갑자기 구경만 하고 있어요?”
“……?”
“아, 우리도 싸워도 되는 거였구나.”
그 말에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퍼뜩 놀라 정신을 잡고 스킬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왠지 섣불리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라 가만히 보고만 있었더니, 자신들도 싸워도 되는 거였나 보다.
그러자 곧이어 하늘 위에서 엄청난 화력이 해골 기사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유우웅-!
콰콰콰쾅!
“…….”
정다운의 소소한 스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불꽃 퍼레이드.
결국 정다운은 던전 감자를 설치해 놈의 머리가 피하지 못하게 꽁꽁 묶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어어어!
결국 해골 기사의 머리는 쩌적 깨져 나가고 말았다.
원통한 포효와 함께.
“크하아악!”
그 순간, 무수한 메시지들이 정다운의 앞에 나타났다.
[<정화> 스킬이 중급 8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정화> 스킬이 중급 9레벨로 발전했습니다.]
[<개미 더듬이> 스킬이 7레벨로 발전했습니다.]
[<공중 계단> 스킬이 6레벨로 발전했습니다.]
[<공중 계단> 스킬이 7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을 마스터했습니다.]
엄청난 레벨 업 보상들이 줄을 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외뿔 멧돼지의 기운’을 마스터한 순간,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전신에서 힘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스킬들을 미처 살펴보기도 전에 그 뒤를 따르는 업적 때문에 정신을 빼앗겼다.
[최초 업적 달성!]
“용기사 살해자!”
종말의 용을 섬기는 죽음의 기사에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을 선사했습니다!
당신들의 위대한 업적에 던전이 경의를 표합니다.
- 보상 1 : 당신을 공격하는 언데드들이 벌벌 떱니다.
(언데드들의 공격력이 20% 약해집니다.)
- 보상 2 : 용기사를 사냥한 당신의 위엄에 주변 언데드들이 위축됩니다.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20% 느려집니다.)
- 보상 3 : 용기사의 힘이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언데드 대상으로 당신의 공격력이 20% 상승합니다.)
“휘유, 화려한데?”
용기사 살해자 업적의 보상을 확인한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무리 최초 업적이라도 그렇지 보상이 3개나 따라오는 업적은 지금까지 처음이었다.
토끼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대박이네요. 이 말 결국 언데드들이 혼자 쫄아서 느리게 움직이고 약하게 때린다는 거네요? 님은 더 세게 때릴 수 있고요. 무려 20퍼센트씩이나!]
“그냥 20퍼센트가 아니야. 이 효과들이 전부 한꺼번에 발휘된다고 생각해 봐. 지금까지보다 거의 2배는 더 쉽게 싸울 수 있을 거야.”
[그러게요. 와, 이거 설마 다른 참가자들도 다 이런가?]
토끼는 호기심에 오동민에게로 쭉 날아올랐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아뇨? 우리는 최초 업적이 아닌데요?”
오동민은 어리둥절하게 대꾸했다.
[으잉? 그냥 업적이라고?]
의외로 다른 참가자들이 받은 메시지는 정다운에 비해 상당히 심플했다.
[업적 달성!]
“용기사 살해자!”
- 보상 : 당신을 공격하는 언데드들이 벌벌 떱니다.
(언데드들의 공격력이 20% 약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정다운이 받은 보상 3개 중에서 하나씩만 받은 상태였다.
동시에 3개를 전부 받은 이는 정다운뿐이었다.
한 바퀴 돌아 정다운에게 돌아온 토끼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지막 말고는 용기사를 잡는 데 큰 보탬이 안 됐기 때문에 이런가 본데요?]
“그래? 신기하네. 마지막 결정타가 중요한 게 아닌가?”
[이건 업적이잖아요. 결정타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기여를 했냐가 더 중요해요. 물론 마지막 결정타가 없었다면 절대 못 잡을 상황이면 그게 제일 중요했겠지만…….]
토끼는 말을 멈췄다.
여기서 더 말했다가는 괜히 정다운만 더 기고만장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씨이익.
이미 그의 입꼬리는 우쭐우쭐 기어 올라가 있었다.
“결국 나 없었으면 절대 못 잡았다는 거네?”
[……네, 뭐, 그렇죠.]
더 말해 뭐 하랴.
사실이 그렇긴 했다.
파스슥!
한편, 본 드래곤의 몸은 모든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퉤. 먼지 날리네.”
사람의 뼛가루들이 입에 들어간다는 건 상당히 찝찝한 일.
정다운은 능숙하게 흙을 꺼내 본 드래곤의 머리끝, 해골 기사가 있던 정수리까지도 안 보이게 깔끔하게 묻어 버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드드드……!
갑자기 그 꼭대기 위에서 커다란 비석이 솟구쳐 올라왔다.
“와, 죽자마자 또 시작이라고?”
정다운은 짜증을 부리며 재빨리 자리를 피신했다.
이놈의 땅은 정말 쉴 생각이 없나 보다.
비석이 올라왔으니 그 아래에서 평소처럼 해골 병사들도 다시 자라날 기세였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조금 달랐다.
[최초 업적 달성!]
“용기사 반다이크의 무덤!”
숭고한 기사 ‘반다이크’를 위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당신의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씨에 던전이 크게 감동합니다.
- 보상 : 반다이크의 유품
“……뭐?”
[응? 이건 또 뭐래?]
뜬금없이 이상한 업적이 달성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정다운의 앞에 커다란 반지가 나타났다.
[반다이크의 반지]
- 내구력 : 100/100 (%)
- 특수 옵션 : 거인의 뼈
“뭐야, 이건?”
엉겁결에 거의 목걸이만 한 크기의 반지를 두 손으로 받아 든 정다운이 어리둥절하게 토끼를 쳐다봤다.
토끼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세상에. 누구 마음씨가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누가 누굴 애도해? 던전이 진짜 미쳤나?]
던전이 단단히 착각을 한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업적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이쯤 되면 던전 고장 난 거 아님? 흙으로 묻기만 하면 다 무덤이야? 아까 묻어 놓고 얼굴만 패던 건 못 봤나? 눈이 없나? 아, 던전이니까 원래 눈이 없나?]
“야. 항상 묻는 거지만 넌 대체 누구 편이냐고. 업적 얻고 보상 받으면 좋은 일이잖아?”
갑작스런 득템에 정다운은 마냥 희희낙락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알파의 승인까지 떨어졌다.
<의외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사용해도 문제없는 물건입니다.>
“오호?”
완벽한 득템이라는 말이었다!
다만 소소한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반지를 어떻게 껴? 목에라도 걸어 볼까?”
[굳이 손가락에 끼울 것 없이 소지하고만 있어도 효과가 있을 것이나이다. 소지품에 보관하시지요.]
“음?”
틈새 신전에서 비를 피하고 있어야 할 바하무트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자 그곳엔 문어 골렘을 운전하고 있던 미니 바하무트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바하무트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용기사 반다이크. 그는 마녀들의 편에서 싸워 준 몇 안 되는 용사 중 한 사람이었나이다.]
그리고 동시에 큰 감격에 차 있었다.
[주인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인님께서는 저와 마찬가지로 종말의 용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가엾은 영혼을 풀어 주셨나이다.]
“이게 뭐 힘든 일이라고. 당연히 할 일이었지. 사람의 도리지.”
[……?]
정다운의 뻔뻔함에 토끼는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