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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88)화 (188/393)

<던전리셋 188화>

*   *   *

틈새 지역은 틈만 나면 비가 내리는 날씨로 변해 있었다.

바분이 죽기 전에 비가 내리는 저주를 걸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한가운데 우뚝 선 틈새 신전 ‘해골성’이 갖는 의미는 참가자들에게 무척이나 특별했다.

괴물들과 비바람을 막아 주는 든든한 벽과 지붕.

천장에 줄지어 박혀 있는 따사로운 태양석 조명들.

그리고 그 아래 알차게 여물어 있는 벼 이삭들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 평화롭고 안전한 장소에 갑자기 무뢰배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호쾌하게 지붕을 뚫고.

“침입자가 들어왔다! 막아!”

“쫓아내!”

해골성의 참가자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고 오동민에게 덤벼들었다.

지붕을 파괴한 시점부터 이미 타협이란 없었다.

아직 추수하지 못한 벼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이쪽도 딱히 노력해서 얻은 건 아니었지만, 이미 한 번 수중에 들어온 식량을 빼앗기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오동민은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아니, 엄청나게 강했다.

“다이어트 펀치!”

“다이어트 킥!”

“다이어트 로얄 스트레이트……!”

그런데 이 꼬맹이는 다이어트에 무슨 원한이라도 맺힌 걸까?

딱히 스킬도 아닌 것 같은데 손짓 발짓에 온갖 이름들을 다 붙여 가며 싸우고 있었다.

그 스킬명은 순전히 오동민의 취향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난 같은 기술들의 위력이 하나 같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었다.

콰쾅!

콰아앙!

빗나간 주먹질이 공기를 찢어 발겼고, 발차기 한 방에 사람이 축구공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맙소사. 괴물구나!’

전투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식겁했다.

앳되고 곱상한 얼굴이라고 방심했다간 오늘부로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오동민의 몸은 극도로 압축된 살로 인해 전신이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연신 ‘다이어트’를 외치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그의 공격에는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식후 운동으로 줄넘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줄넘기의 결과로 지금 사람이 죽게 생겼다.

‘제길. 강자의 여유인가?’

‘이 꼬맹이가 우릴 무시하고 있구나!’

‘순수악이 있다면, 바로 이놈이겠구나!’

참가자들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 여기는 자신들의 속마음을 느끼고 더욱 기분이 분했다.

하지만 오해였다.

오동민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의 정체는 배부름에서 우러나오는 나른함.

항상 배가 부르니 자잘한 일에 연연하거나 예민하게 굴 마음이 생기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번쩍!

“……!?”

갑자기 오동민의 손등에서 황금빛 기운이 터져 나오며, 커다란 화살표로 변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방패 뒤로 숨었다.

파바밧!

“오, 올 것이 왔구나!”

“원거리 스킬인가!?”

“얼마든지 막아 주마!”

파앗! 파아앗! 번쩍!

곧 이어질 강력한 한 방을 막아 내기 위해 그들은 결사적으로 온갖 방어 스킬로 자신들을 무장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추가적인 공격은 없었다.

“……이 방향으로 가라고요?”

[응. 알파 네비게이션이야.]

성큼 성큼.

갑자기 전투를 멈춘 오동민은 황금빛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좌로 100보.

우로 70보.

아직 추수 못 한 벼를 밟으면 안 되니까 빙 돌아서 걸었더니, 그 끝에서 화살표가 꼬물랑거리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아하. 여기구나? 여길 파면 되요?”

누군가와 대화하듯 계속 혼잣말을 하는 오동민의 모습에 참가자들은 빠르게 서로를 쳐다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어, 어쩌죠?’

‘미친놈인가?’

‘방심하고 있을 때 한꺼번에 공격할까요?’

멀쩡하던 사람도 미친놈이 될 수 있는 게 던전이었다.

눈앞에서 괴물들에게 사람이 죽는 모습을 계속 보다 보면 그 트라우마로 정신이 비틀리는 건 예사였다.

특히 저런 어린아이라면 그 후유증이 더 심하리라.

‘동시에 공격하자!’

참가자들 사이에 눈짓이 오고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사의 표정으로 일제히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다이어트 땅 파기!”

“……!?”

갑자기 오동민이 허리를 숙이더니 두 손으로 두더지처럼 땅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푸바바박!

그 엄청난 기세에 사람들은 또 깜짝 놀라 뒤로 흩어졌다.

공격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그렇지! 잘 파네! 살짝 뚜껑만 덮어 둔 거라 계단이 금방 나올 거야.]

정다운은 흡족하게 웃으며 오동민을 격려했다.

자라나는 땅 파기 새싹을 보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오동민은 맨손으로 땅을 파는데도 전혀 생채기가 없었다.

통통하던 손가락 살까지 알차게 압축된 상태라 피부도 질기고 악력도 굉장했다.

잠시 후 오동민의 앞에 지하 신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고, 그 모습에 참가자들은 또 한 번 경악하며 설레발을 쳤다.

“저, 저기 봐! 계단이 나타났어!”

“헉. 설마 던전으로 통하는 입구인가?”

“비밀 던전이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던전에 이렇게 평화로운 지역이 괜히 존재할 리는 없다 했지. 이곳 전체가 새로운 함정이었던 게 분명해.”

그들은 조금 전까지 식량을 두고 결사의 투쟁을 하려던 것도 잊고 새로운 긴장감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그 모든 모습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루갈은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고들 있군. 정말이지 참가자들이란…….]

도우미가 없는 던전은 이래서 문제였다.

아무도 설명해 주는 이가 없으니, 자신들에게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설레발만 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눈앞의 식량이나 비밀 계단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쯧.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르고…….]

바분이 남긴 또 다른 저주.

바로 ‘부패의 각인’이 지금 그들의 이마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오늘 막 이 땅에 도착한 오동민의 이마에도 어느 순간부터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29>

숫자가 0이 되는 순간 죽게 되는 죽음의 카운트.

살 수 있는 방법은 던전을 공략해 생존자 전체 회복을 받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또 저주가 걸린 틈새 지역의 땅을 밟게 되면 카운트는 다시 시작된다.

[쯧. 그래도 바분의 탐욕이 결과적으로는 던전에 도움이 되었구나. 누가 손대지 않아도 참가자들 스스로가 계속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 피치 못할 이유를 만들어 준 셈이니.]

루갈은 앞으로 자신의 할 일이 늘었음을 느꼈다.

[앞으로는 참가자들에게 부패의 각인에 대해 알려 주고 올려 보내야겠군.]

루갈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마치 정다운처럼 이 일대의 참가자들 모두에게 쩌렁쩌렁 소리쳤다.

[어흠. 듣거라! 나 도우미 루갈이 너희의 이마에 새겨진 죽음의 숫자에 대해 알려 주겠…….]

“우와! 지하에 또 논이 있다!”

“곡식이다!”

[…….]

루갈의 외침은 뒤따라 들려온 참가자들의 함성에 파묻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싸우다 말고 계단 밑으로 내려간 오동민을 따라 조심조심 지하 신전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에도 1층과 거의 흡사한 풍요로운 땅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쪽이 더 대단했다.

부유석으로 된 복층 구조.

비밀리에 숨겨진 웅장한 지하 유적지.

그리고 그 앞마당에 빼곡하게 심어져 있는 수많은 논밭들.

루갈이 다시 외쳤다.

[듣거라! 나 도우미 루갈이……!]

“우와! 여기 사우나도 있어!”

[좀 들어! 이 개놈들아!]

루갈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고, 간신히(?) 참가자들에게 죽음의 카운터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었다.

그 말에 그들이 경악하건 슬퍼하건, 그 반응들에 대해선 별로 관심 없었다.

[할 일은 했다. 이제 나는 돌아가겠다.]

루갈은 그렇게 사라졌고, 그러거나 말거나 오동민은 정다운이 시키는 대로 곡식을 차곡차곡 베어서 제단 위에 올렸다.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아, 더 필요해요? 생명 에너지가 이상하게 적다고요? 더 베어 올게요.”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제물을, 꿀꺽 꿀꺽.

“이, 이봐! 뭐 하는 거야!? 식량이 자꾸 사라지잖아!”

혼잣말을 하며 벼를 베는 오동민과 계속 꿀꺽거리는 제단의 모습에 참가자들이 보다 못해 그를 만류했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오동민을 향한 전투 의욕은 한참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출현해서 땅을 파더니 숨겨진 유적지를 발견하고, 뭔가 계시라도 받은 듯이 온갖 기행을 벌이는 모습에서 감히 덤비기 힘든 경외감을 느낀 탓이다.

방금 루갈에게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사자인 오동민도 워낙 마이 페이스였다.

그들이 뭐라 하든 자꾸 무섭게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환청과 대화하며 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알파가 그러는데 바친 제물들이 너무 맹탕이래. 알맹이가 없다는데? 창고로 한번 가 봐.]

“창고요?”

화살표가 새로운 방향을 가리켰다.

“오, 쌀이다!”

오동민이 쌀 창고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엄청난 양의 쌀이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언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더듬!?

마침 그 위를 지나가던 작은 개미가 깜짝 놀라 더듬이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곧 페로몬으로 오동민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다시 무심하게 하던 일이나 계속했다.

[와, 그동안 쌀 엄청 모았네?]

<어쩐지 에너지가 별로 안 들어온다 했습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했지, 이미 추수가 끝난 상태였군요.>

정다운은 개미의 성실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고작해야 개미 한 마리가 무슨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으나, 그동안 지하 신전에 자라던 벼 이삭을 한 알 한 알 모아서 산처럼 쌓아 뒀던 것이다.

아니, 다시 보니 한 마리가 아니었다.

더듬 더듬 더듬 더듬.

어느샌가 개미 곁에는 작은 개미들이 줄지어 따라다니고 있었다.

[오, 그동안 친구가 생겼대? 낳은 건가? 아니면 꼬셔서 데려왔나? 아무튼 어쩐지 쌀이 엄청 많다 했다.]

이쯤 되니 개미들이 열심히 모은 쌀을 다 제물로 바쳐 버리기가 개미한테 너무 미안한 정다운이었다.

때문에 정다운은 그 쌀들 중 일부를 참가자들한테 팔기로 했다.

물물교환이든 노동력이든.

[사람들한테 쌀을 줄 테니까 1층에서 벼 좀 다 베어 오라고 시켜. 부족하면 나가서 해골 병사들도 좀 잡아 오라고 하고.]

“네, 말해 볼게요.”

오동민은 정다운의 말을 그대로 참가자들에게 전부 전달했고, 그들은 순순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물론 눈앞에 눈 돌아갈 정도로 많은 쌀이 쌓여 있어서 욕심이 동하긴 했지만, 이미 오동민의 힘을 경험해 본 터라 감히 힘으로 빼앗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최악의 경우 지붕을 무너뜨렸듯이 이 지하 신전도 붕괴시켜 버린다면 막심한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결국 참가자들은 힘을 합쳐 1층에 남은 벼를 베기 시작했다.

여태껏 해골성 밖에서 비를 맞고 서성거리고 있던 오동민의 일행들도 안으로 들어와 영문도 모르고 벼를 베어야 했다.

“그런데 이거 왜 해야 하는 거지?”

대답보단 일을 시키는 오동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모으면 거의 다 와 간대요. 누구 밖에 나가서 괴물들이라도 잡아 와 보세요.”

그 모든 수확물을 받아서 제물을 바치는 오동민은 마치 제사를 주관하는 신관처럼 노예들을, 아니, 참가들을 채근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파아앗!

마지막 제물을 끝으로 제단 위로 아름다운 빛이 터져 나왔고, 그 빛 너머에서 정다운이 현신했다.

“오…….”

마치 신이라도 현신한 듯한 그 모습에 참가자들은 눈을 비볐다.

다시 보니 토끼였다.

[짠! 내가 왔다!]

사람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토끼는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이럴 때가 아님! 지금 큰일 났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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