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186)화 (186/393)

<던전리셋 186화>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고, 정다운과 토끼는 결국 빵빵해진 배를 드러내고 항복을 선언했다.

털썩.

“포, 포기다.”

[나도 더는 못 먹겠음!]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쉬면서 먹자. 하루 종일을 씹었더니 턱이 얼얼하다고!”

정다운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무한리필 고기 뷔페에 1박 2일째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남은 고기가 훨씬 더 많았고, 어차피 자기가 사장이라서 직원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계속 먹는 뷔페였다.

아니, 끊임없이 눈치를 주는 직원이 하나 있긴 했다.

<턱이 아프면 물처럼 삼키십시오. 굳이 씹을 필요가 있습니까?>

“고기를 물처럼!?”

뭔가 이상한 방향성으로 갑질을 하고 있는 알파였다.

끝도 없이 서비스 시간을 주는 노래방 사장보다 더 가혹한 직원이었다.

그 틈에 살살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닭갈비를 향해 움직이는 두툼한 앞발.

<루갈, 안 됩니다.>

움찔?

루갈은 시무룩하게 다시 손을 내리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크릉, 먹는 거 남기는 거 아니랬다…….]

<아무리 남아도 당신 줄 고기는 없습니다. 반대로, 루갈 당신은 이 고기들을 전부 하늘 신전까지 옮겨 줄 수 있겠습니까?>

[…….]

알파의 제안은 언뜻 듣기에 그럴싸했다.

토끼도 아니고 루갈이라면 얼마든지 범독수리의 고깃덩이를 들고 하늘 신전을 왕복하는 게 가능했다.

현역 도우미라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어떤 괴물들도 그를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루갈은 난감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끄응. 그건 아무래도 힘들지. 도우미인 내가 생명의 용에게 제물을 바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겁니다. 우리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에게 줄 제물은 없습니다.>

[정론이라서 반박할 말이 없군. 하지만 이 닭갈비 볶음밥이라는 것도 충분히 맛있다. 고기는 냄새만 묻어 있지만…….]

루갈은 슬픈 표정으로 세숫대야만 한 자기 (개)밥그릇을 내려다봤다.

고기라곤 한 톨도 안 들어 있는 볶음밥.

정말 쓸데없는 완벽주의.

개한테 줄 고기 같은 건 없다는 정다운 할아버지의 완고한 마음이 느껴졌다.

“바하무트, 이 정도면 블리자드 쓸 수 있겠어?”

정다운은 나무를 깎아 만든 이쑤시개로 이를 후비며 바하무트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계속 쓰고 있었나이다.]

“오, 그러네?”

어느새 호박마차는 하늘 신전과 아주 살짝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거리를 가늠해 보니 하늘 신전과 도킹하기 위해선 이 과정을 몇 번을 더 반복해야 할 것 같았다.

“후우, 그럼 2차전은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자고.”

왜 빵빵한 배보다 눈꺼풀이 더 무거운 걸까?

더욱 열심히 먹기 위해선 잠을 푹 자는 것도 중요했다.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좀비처럼 비척비척 일어나 대충대충 침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잠을 잔다는 행위는 식사만큼 굉장히 중요한 부분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침대는 인생의 동반자이며, 결코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다.

갑자기 그의 손이 꼼꼼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잘 거지만 침대는 무조건 퀸 사이즈지.”

처처처척!

[어? 나는 어디서 자요?]

“아, 맞다. 그럼 킹사이즈. 루갈은 집에 가서 잘 거지?”

[……킁, 어차피 이제 출근할 시간이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요즘 들어 자꾸 소외감을 느끼는 루갈이었다.

루갈은 바쁜 척하며 자신의 던전으로 돌아갔고, 작업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커튼도 달자.”

전망대의 창문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찬 바람을 차단해야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범독수리의 가죽으로 침대 주위에 치렁치렁한 커튼을 설치했다.

피비린내나 고기 누린내 같은 건 정화 스킬로 싹 제거하고, 태양석으로 바싹 말렸더니 깃털 한 올 한 올이 보송보송해서 예뻤다.

[산적들 대장의 애첩이 쓰는 침대 같은데요?]

“기다려 봐. 이게 끝이 아니야.”

계란섬이 분열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슬러그들이 건물 위에서 흘러 들어와 있었다.

물컹물컹 옆으로 지나가는 슬러그를 보며 그가 눈을 반짝였다.

“슬러그로 물침대를 만들어 볼까?”

그는 가죽 천을 반으로 접어 커다란 매트리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슬러그를 꾸역꾸역 채워 넣고 바느질로 단단히 봉인했다.

그러자, 엄청나게 푹신한 물침대, 아니, 슬러그 침대가 탄생했다.

물컹물컹!

“세상에! 내가 만들었지만, 이건 진짜 최고야!”

신이 나서 매트리스 위를 첨벙 첨벙 뛰어다니는 정다운.

그러다 수영 선수처럼 폴짝 뛰어 침대 한가운데로 다이빙까지 하는 모습에 알파가 보다 못해 나섰다.

<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 잘 거면 이럴 시간에 고기 한 점이라도…….>

[이히히! 이거 대박 재밌음!]

물컹물컹!

<…….>

급기야 토끼까지 촐랑촐랑 같이 뛰어다니는 모습에, 더 이상 말릴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알파였다.

그리고 한참 후.

남은 슬러그를 정리하던 중 정다운은 마녀의 일기장에서 새로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란>

계란이라는 건 무슨 맛일까?

맛이 전혀 상상이 안 가.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다.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면…….

*   *   *

한편, 스테이지-3의 최종 유적지는 막 참가자들에 의해 공략이 끝나 가는 시점이었다.

쿠우웅!

힘겨운 전투 끝에 결국 최종 보스가 쓰러지자, 참가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간신히 잡았네요.”

“후우, 힘들어 죽겠네…….”

“후아! 배부르다.”

음!?

누군가의 입에서 뭔가 이상한 말이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돌아갔다.

농담이 아니라…… 그곳엔 정말 배불러 보이는 소년이 빵빵한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첫 번째 용의 사도.

식신 오동민.

또래에 비해 한참 작았던 그의 외모는 그동안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열심히 먹은 덕분에 ‘성장기’가 온 것이다.

140도 안 되던 키는 훌쩍 커 버려서 170이 넘어 있었고.

남자답게 어깨도 넓어졌으며, 팔다리의 기럭지도 상당히 비율이 좋아졌다.

다만…… 먹으면 먹을수록 끝도 없이 쪄 가는 살이 문제였다.

체중계가 없어서 몸무게는 잴 수 없지만, 멀리서 보면 커다란 동그라미처럼 보이는 외모의 소년이 바로 오동민이었다.

게다가 다이어트 의지도 없는지, 오동민은 배부르다고 하면서도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를 뜯어 먹고 있었다.

아까 그가 잡은 괴물의 족발이었다.

냠냠 쩝쩝…….

‘제발 털이라도 좀 뽑고 먹으라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말이 족발이지, 그냥 괴물 발이다.

“왜요? 좀 드릴까요?”

“아, 아뇨!”

오동민이 해맑게 웃으며 족발을 앞으로 내밀자 그들은 동시에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뭐라 태클 걸고 싶은 건 많은데, 어느 누구도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스킬>

악식 (7레벨)

- 맛없는 음식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을 수 있다.

스킬 ‘악식’은 수많은 노력의 결과 오동민에게 생긴 스킬이었다.

전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이 스킬을 얻고 나서부터 오동민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되었다.

배가 불러야 강해지는 오동민의 ‘식신’ 스킬과는 여러모로 찰떡궁합이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면…….

그가 편식하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솔직히 진짜 무서웠다.

오동민은 진정한 의미에서 괴물이었다.

엄청난 힘으로 괴물을 산채로 찢어 먹는 광경은 너무나 끔찍했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어느 누구도 오동민을 꺼려 할 뿐,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의 활약으로 위기를 벗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우적 우적.

“응? 이 최종 보스도 제법 먹을 만한데?”

“…….”

오동민이 자신이 직접 쓰러뜨린 최종 보스를 그 자리에서 뜯어 먹는 모습에 사람들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얼마 후, 도우미 루갈이 나타났다.

[오늘도 열심히 먹어 대는구나, 꼬맹이.]

“어? 루갈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갑자기 어디서 좋은 냄새가 나는데?”

오동민은 루갈의 털에 묻어 있는 냄새를 정확히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와, 루갈 아저씨 닭갈비 먹고 왔나 보네요? 맛있었겠다.”

[아니다.]

“에이, 아니긴요. 맞잖아요. 내 코는 못 속여요.”

[……진짜 아니다. 볶음밥만 먹었다.]

루갈은 몹시 억울했다.

[아무튼 이제 다음 스테이지로 보내 주마. 수고했다.]

루갈은 언제나처럼 할 말만 간결하게 하고 용무를 마쳤다.

파아앗!

던전 게이트가 열리고, 오동민과 다른 참가자들이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들의 뒤를 따라 이동하며 루갈이 첨언했다.

[스테이지-4는 도우미가 부재중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언젠 안 그랬나요, 뭐?”

[…….]

언제나처럼 자신의 말에 해맑게 대꾸하는 오동민을 쳐다보는 루갈의 표정이 묘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이렇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도우미인 자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격의 차이였고, 루갈 본인에게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야수의 기운이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다운도 그렇고, 이 꼬맹이도 그렇고…….

요즘 들어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인간들이 늘어나 루갈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나?]

“왜 무서워요? 늑대 고기가 얼마나 맛있……. 아, 죄송.”

[…….]

괜히 물어봤다가 분위기만 갑자기 싸해졌다.

“그, 그런데 여긴 어딘가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리는 오동민의 말에 루갈도 일단 맞장구를 쳐 줬다.

[야수의 숲이다. ……예전 나의 고향이기도 하지.]

‘야수의 숲’은 과거 늑대인간들의 주거지였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 이곳은 그냥 던전에 불과했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제1 던전 ‘야수의 숲’이다. 그리고 이 반대쪽은 던전과 던전 사이 ‘틈새 지역’이다. 다만 식량을 전혀 구할 수 없으니, 너희는 결국 야수의 숲으로 들어갈…….]

루갈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오동민은 틈새 지역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네 코는 개 코인가?]

사실 루갈도 냄새를 맡았다.

틈새 지역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냄새를 말이다.

그것은 곡식이 익는 냄새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다운에게 받아먹었던 볶음밥.

그 안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쌀이 익는 냄새였다.

“일단 이쪽이 조금 덜 위험해 보이니까 같이 가실래요?”

“그러겠습니다.”

“같이 가죠.”

오동민이 다른 참가자들을 돌아보며 묻자, 사람들은 고민 없이 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동안의 경험상, 던전의 초입에선 무조건 식량 확보부터 해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냄새 하나는 오동민이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해골 병사들이 그들을 공격해 왔지만, 오동민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자 속절없이 뼈가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해골성’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이곳엔 선객이 있었다.

“웬 놈들이냐! 이곳은 우리 땅이다!”

성 위에서 오동민 일행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선배 참가자들.

그들을 올려다보며 오동민이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우리 밥 좀 주세요!”

그 순간 정다운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 막 첫 번째 사도가 틈새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아,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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