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83화>
* * *
먼 옛날, 학구적인 어린이 정다운(7세)의 취미는 분유를 퍼먹으며 그림책 보기였다.
어느 날 ‘빨간 모자’라는 동화책을 보게 됐는데, 사냥꾼이 나쁜 늑대의 배를 갈라 돌을 채워 넣는 장면에 정다운 어린이는 큰 감동을 느꼈다.
‘그냥 죽여도 될 텐데 굳이 이렇게 죽인다고? 대단한데!?’
이래서 조기 교육이라는 게 중요한가 보다.
결국 정다운은 어른이 되어 말린 미역을 채운 물고기를 범독수리의 뱃속에 가득 채우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쯧. 동화책이 인간 하나 망쳤네.]
토끼가 뭐라 비아냥대든 계획은 몹시 성공적이었다.
“크워어!”
미역을 줄줄 토해 내느라 정신없는 범독수리들을 향해, 바닥에 엎드려 있던 골렘들이 일제히 일어나 총공격을 감행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정다운 어린이도 호기롭게 쇠꼬챙이를 꼬나 쥐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개미 더듬이! 돌리기!”
3.8배의 신체 능력, 초인적인 감각, 그리고 드라이버 빨리 돌리는 기술(5레벨)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의 드릴 스피어가 범독수리의 방어력을 꿰뚫고 심장을 후벼 팠다.
“크롸락!”
일격필살!
비명과 함께 괴물의 동체가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그 순간, 옆에 있던 다른 괴물의 앞발이 정다운의 등 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콱!
그는 바로 쇠꼬챙이 끝으로 땅을 찍고, 공중제비를 돌며 범독수리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범독수리의 발등 위에 척 착지해 그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헐, 묘기 대행진!]
토끼도 놀라고 루갈도 놀라고, 정다운 본인도 깜짝 놀라 버렸다.
“엄마야, 내가 왜 여기 있어?”
개미의 감각과 돼지의 힘이 하나가 되자 엉겁결에 슈퍼 플레이가 펼쳐진 것.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돌리기!”
콰르륵!
“크르악!”
범독수리의 몸에 드릴 스피어를 쑤셔 박고, 다시 회수할 겨를도 없이 곧장 다른 곳으로 점프하는 정다운.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이미 소지품에서 새로운 쇠꼬챙이가 꺼내 든 참이었다.
“돌리기! 돌리기!”
콰륵! 콰르륵!
그림자 하인들을 야근시켜 만든 여분의 드릴 스피어들이 범독수리들의 몸에 끊임없이 쑤셔 박혔다.
그 하나하나가 다 관통력 옵션이 붙어 있는 최소 3강짜리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루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저런 낭비가 있나……. 저 비루한 쇠꼬챙이들이 전부 강화 무기라고?]
[히히. 아이템이 너무 비루해서 생명 에너지가 별로 안 들어가긴 하더라고요.]
좋은 무기를 강화하는 건 생명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하지만 쇠꼬챙이는 그냥 잡템이라서 가성비가 좋았다.
“크르렁!”
머리끝까지 화가 난 범독수리들은 정다운을 향해 모든 분노를 토해 냈지만, 실제로는 그냥 미역만 줄줄 토할 뿐이었다.
그리고 놈들을 향해 지난날의 설욕을 만회하려는 철갑 골렘들이 주먹 도끼를 들고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그 틈에 잠시 숨 돌리고 있던 정다운의 스킬들의 재사용 시간도 초기화됐다.
“돌리기!”
콰르륵!
전투는 박빙이었다.
맷집 좋은 괴물들과 무한 체력의 골렘들.
그 틈바구니에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급소를 찔러 대는 정다운과 그림자 창병들의 모습은 마치…….
[모기 같네요.]
[벼룩 같군.]
[어허! 잘 싸우고 계시는 주인님께 이 무슨 망발인가!]
바하무트가 호통을 치며 뒤늦게 전투에 동참했다.
태양석들이 사라진 덕분에 온도가 내려가서 활동이 가능해진 것.
후웅!
스팟! 팟!
그는 순간 이동을 적절히 쓰며 사신의 낫을 휘둘러 검기를 뿌려 댔다.
다른 곳보다도 일단 날개들부터 넝마로 만드는 게 먼저였다.
[크큭. 이 미천한 범버러지들! 내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바하무트는 토끼와는 다르게 피를 보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격이고 나발이고 자신은 어차피 타락한 언데드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크르렁!”
미끄덩!
쿠웅!
날개까지 잘리자 자신들이 토해 낸 미역 줄기를 밟고 넘어지는 놈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훗. 엉망진창이네.]
토끼는 코를 쓱 훔치며 민망한 표정으로 루갈의 눈치를 봤다.
루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인간이었구나.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이해가 가는군.]
야생의 사냥꾼 늑대인간 루갈은 정다운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그의 치사함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건 결코 비겁한 일이 아니었다.
함정이든 기습이든,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먹이를 획득하는 자가 가장 강자 아니겠는가.
괜히 사냥감들과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우다 상처라도 입으면, 결국 또 다른 포식자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다운은 이미 참된 사냥꾼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
[본인은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사냥꾼이라니……. 훌륭하다.]
2차전은 심지어 정다운이 직접 날뛰며 사냥감들의 목덜미에 자신의 송곳니(아니, 그냥 송곳)를 박아 넣는 모습에 그는 결국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콰직!
마지막 범독수리까지 그의 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돌리기> 스킬이 6레벨로 발전했습니다.]
[<개미 더듬이> 스킬이 6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지속 시간 1분, 재사용 시간 50초
“……겼다.”
거대한 괴물들의 시체 위에 홀로 서서 정다운은 입을 뻐끔거렸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내, 내가 이겼다. 우와! 이겼어! 이겼다고! 내가 다 잡았다고!”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기분이 이런 것일까?
전신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짜릿한 감격의 선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실감이 안 났다.
이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자신이 직접 싸워서 잡았다니!
그는 당당하게 토끼를 돌아보며 우쭐댔다.
“봤지? 이 정도면 나도 어디 가서 전투직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어?”
[진짜로 다 잡아 버렸네…….]
토끼도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좀 치사한 수단들을 동원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주는 법.
혼자 범독수리를 40마리나 사냥한다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 그럼 도축이나 할까?”
감동은 감동이고, 사냥이 끝났으니 곧바로 도축을 시작하는 참된 생산직 정다운 선생이었다.
그는 그림자 하인들과 오순도순 둘러 앉아, 미역 줄기에 휘감긴 범독수리들의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뱃속에 꽉 찬 미역 줄기들은 어차피 내장만 도려내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루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서둘러야 하지 않겠나? 이미 한참 전부터 유적지 충전이 끝나 있었다. 다음 섬으로 가는 길이 진즉 열렸을 텐데?]
“어? 벌써? 어쩌지? 이것들 다 챙겨 가야 하는데.”
그 말에 당황해서 자리에 일어나는 정다운에게 알파가 말했다.
<피만 빼시고 그대로 제물로 바치시지요. 참으로 훌륭한 전투셨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제물이라니!>
알파는 그가 다음 던전으로 가든 말든, 제물이 더 중요했다.
가뜩이나 정다운이 이번 전투를 위해 생명 에너지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가서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그 쓰라린 투자가 몇 십 배의 대박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피만 빼실 요량이라면 도살자의 칼을 사용하시지요.]
“그러자.”
바하무트의 조언에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있던 도살자의 칼들을 전부 꺼냈다.
[도살자의 칼 +4]
- 내구력 : 100/100(%)
- 옵션 : 도축 (3레벨)
- 특수 옵션 : 흡혈 (1레벨)
그동안 수많은 밥을 해 먹으면서 바하무트에게 도살자의 칼의 진정한 쓰임새를 배워 뒀다.
특수 옵션 ‘흡혈’은 들고 싸울 땐 상대방의 체력을 빼앗아 오지만, 그냥 꽂아 두면 대상물의 피를 식칼이 전부 빨아들이게 된다.
말 그대로 ‘흡혈’이었다.
물론 전투 중에 그랬다간 상대방에게 무기를 빼앗길 테니, 주로 요리할 때만 쓸 수 있는 기능이었다.
“흡혈.”
쭈으읍.
게걸스럽게 범독수리들의 피를 빨아먹기 시작하는 도살자의 칼.
“바하무트, 넌 여기 남아서 칼 계속 돌려가면서 피 뽑고 있어. 우린 유적지에 한번 가 볼게.”
[알겠나이다.]
* * *
고오오오!
폐허였던 유적지는 완벽하게 발동되어 있었다.
유적지의 정중앙에 그려진 기이한 마법진 위로 어둠으로 이루어진 검은 기둥들이 세 방향으로 뻗어 나가 있었다.
“이거 심연의 안개 아냐?”
[정확하다.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심연의 마법이지.]
누구와는 다르게, 아는 것도 많아서 순순히 대답해 주는 루갈이 참 고마웠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셈? 지금 속으로 내 욕했죠?]
“…….”
하는 것도 없으면서 눈치만 빠른 놈이었다.
그런데 그 마법진을 향해 다가가는 정다운의 앞에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오류! 워프 게이트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오냐, 내 그럴 줄 알았다. 젠장.”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괜히 싸웠네요.]
<괜히는 아닙니다. 엄청난 양의 제물을 획득했으니 큰 이득을 봤습니다.>
알파는 한결같이 정다운이 어디를 가든 못 가든 아무 상관없었다.
“이거 진짜 못 가나?”
정다운은 마법진 앞으로 가서 검은 기둥으로 손을 뻗어 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이 허무하게 손이 그대로 통과했다.
그런데 그때, 류승우에게 귓말이 왔다.
<류승우 : 다운아, 우리 다음 섬으로 이동한다. 너는 어떻게 돼 가니?>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한숨이 푹 나왔다.
동료들이 있는 섬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또 다른 검은 기둥들이 뻗어 나와 다른 섬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둥을 타고 참가자들이 다른 섬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류승우 님에게 있는 미니 제단의 위치가 검은 기둥을 따라 이동 중인 것이 느껴집니다.>
알파가 검은 기둥에 타고 있는 류승우의 존재를 포착하고 알려 주었다.
토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오, 저거 보셈. 범독수리들이 저 검은 기둥 근처로는 다가가지 못하네요? 저것도 어두운 거라서 무서워하나 봐요.]
토끼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다. 등천로에서 안전하게 다른 섬으로 이동할 방법은 이것 외엔 없지.]
그러자 정다운의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켜졌다.
“아하, 저런 방식이라면 우리도 수동으로 이동하면 되잖아?”
[뭐?]
“언제는 수동 아니었나? 하늘신전을 운전해서 검은 기둥을 따라 이동하면 우리도 안전하지 않겠어?”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오? 그렇겠네요. 그런데 그러기엔 검은 기둥의 크기가 좀 작지 않아요?]
“어차피 범독수리들이 근처로도 안 오는데 뭐. 조금만 빨리 이동하면 되지 않겠어?”
거기에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아! 이번 참에 아예 등천로 전용 배를 만들어 볼까?”
[배요?]
[배를 만든다니?]
마침 그에겐 심연의 바다를 헤엄치며 사는 심연어들의 비늘이 잔뜩 있었다.
“이 검은 기둥이 심연의 바다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심연어의 비늘로 하늘 신전의 표면을 덮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그때였다.
[던전이 리셋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