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82화>
“개미 더듬이 효과 죽이는데?”
미리 시험도 해 보고 왔지만 정다운은 새삼 감탄했다.
개미 더듬이 (1레벨)
- 개미처럼 감각이 예민해진다.
- 지속 시간 10초, 재사용 시간 100초
개미들은 불빛 하나 없는 개미굴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정다운도 어둠을 뚫고 주변 지형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다만 지속 시간이 너무 짧은 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는 결국 10초는 빠르게 후다닥 달리고, 그 후 대기 시간 100초 동안은 미니맵을 보면서 살금살금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후다닥! 살금살금.
우다다! 슬금슬금.
그러다 뜬금 웃음이 터졌다.
“푸흡, 이거 좀 재밌는데? 무슨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도 하는 것 같아.”
[장난 좀 그만 쳐요. 아무리 눈 뜬 장님들이라도, 저 난리통에 살짝이라도 스쳤다간 님 몸뚱이도 그림자 하인들처럼 펑펑 터져 버릴 거임.]
“알았다고.”
토끼의 잔소리에 정다운의 움직임이 더욱 신중해졌다.
반면에 그림자 하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폴짝폴짝 잘도 돌아다녔다.
“시작은 저놈부터 가자. 도축 시작해.”
“미야옹?”
그가 상처 입고 쓰러진 범독수리 하나를 찍자, 그림자 하인들이 곧장 달려가 도살자의 칼을 휘둘렀다.
푹.
“크륵!”
짧고 간결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푹, 푹푹.
‘도축’ 옵션은 단순히 살을 잘 발라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참된 도축의 시작은 식재료의 정확한 급소를 찔러 단번에 목숨을 끊어 내는 일이었다.
뚝.
얼마 후 놈의 움직임이 멈췄고, 때마침 미니 맵에 있던 빨간 점이 하나 사라진 순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개미 더듬이> 스킬이 2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지속 시간 20초, 재사용 시간 90초
[<개미 더듬이> 스킬이 3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지속 시간 30초, 재사용 시간 80초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덕분에 움직이는 시간이 3배로 늘었네. 30초면 훌륭하지.”
애초에 그림자 하인들은 정다운이 그림자 팔찌를 사용해 만들어 낸 아이템 효과였다.
그래서 그들을 이용한 사냥도 결국 정다운이 직접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 이렇게 한 마리 잡았고.”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본격적으로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푹.
“두 마리.”
푹푹.
“셋, 넷.”
시간이 갈수록 놈들의 숫자가 착실하게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레벨이 낮았던 개미 더듬이의 레벨이 쭉쭉 올라갔다.
[<개미 더듬이> 스킬이 4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지속 시간 40초, 재사용 시간 70초
[<개미 더듬이> 스킬이 5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지속 시간 50초, 재사용 시간 1분
“저놈도 잡자!”
“미야오……!”
펑.
“응?”
괜히 팔팔한 놈을 잘못 건드렸다가 하인 하나가 터져 버렸다.
“크르렁!”
[히익? 쟤 화났나 봐요!]
크게 분노하며 포효하는 범독수리!
이제 보니 무서워하는 방식도 범독수리마다 천차만별이었다.
불이 꺼진 순간부터 아예 눈을 꼬옥 감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있었던 놈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말 그대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버린 셈이었다.
“크르렁!”
[에잇! 이렇게 된 거! 소문나기 전에 바로 죽입시다!]
토끼가 말하기도 전에 정다운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개미 더듬이! 외뿔멧돼지의 기운!”
자신의 스킬을 총동원해서 그림자 하인들과 같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정다운!
어느새 그들의 손엔 나선 쇠꼬챙이가 들려 있었다.
“돌리기!”
슈아악!
5개의 드릴 스피어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놈을 노리고 무섭게 회전했다.
‘이 중 하나만 맞아도……!’
그냥 다 맞았다.
푸푸푸푹!
“크라락!?”
“……아, 맞다. 얘네 앞을 못 보지 참?”
공격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순순히 다 맞아 주는 범독수리였다.
하지만 이쪽은 놈이 아파서 난동 부리는 모습이 똑똑히 잘 보였다.
눈 가리고 술래잡기 하는 기분으로 술래를 요리조리 괴롭히며 공격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결국.
[<돌리기> 스킬이 4레벨로 발전했습니다.]
레벨 업까지 해 버렸다.
“오호, 이렇게 되면 좀 더 적극적으로 싸워도 되겠는데?”
그는 용기를 얻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놈들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림자 하인들의 공격으로 시선을 끌고, 결정타는 정다운이 먹이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일단 한 대라도 찔러 보고 수명이 간당간당한 놈은 그림자 하인들 선에서 끝나기도 했다.
어차피 그림자 하인들은 기척조자 느껴지지 않아서 천부적인 암살자였다.
“돌리기! 돌리기! 돌리기!”
슈욱! 푹푹! 푹!
[꺄호! 완전 씬나!]
토끼는 하는 것도 없으면서 그냥 신나기만 했다.
[<돌리기> 스킬이 5레벨로 발전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또 레벨 업! 계속 레벨 업이다!
역시 레벨 올리는 건 사냥이 최고였다!
돌리기 (5레벨)
- 더 잘 돌릴 수 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욱 잘 돌리게 된다.
더 잘 돌릴 수 있다?
이 한마디가 갖는 가치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드릴 스피어의 회전력이 훨씬 빨라지면서 공격력이 그만큼 강력해지는 것이다.
콰드득!
공격이 빗맞아서 범독수리의 뼈를 때렸는데도, 뼈까지 갉아먹고 구멍을 뚫어 버렸다.
“크르락!”
생채로 뼈가 갈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범독수리에게 심심한 사과를 했다.
“헉, 미안. 치과에서 신경 치료하는 느낌이려나.”
“캬오오!”
발끈 하는 모습이 많이 아파 보였다.
그래서 얼른 죽여 줬다.
“돌리기!”
콰르륵!
“좋았어, 이제 19마리!”
자기들끼리 물어 죽인 것까지 합치면 벌써 범독수리들은 반 이상이 죽어 있었다.
감개가 무량했다.
처음엔 이 많은 놈들을 언제 다 잡나 싶었는데, 하나씩 잡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오늘 레벨 업이 풍년이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이 10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신체 능력 3.8배 증폭
- 지속 시간 1분, 재사용 시간 10초
“오, 나도 드디어 승우 형과 같은 레벨이 됐구나!”
지금까지의 레벨 업 중에 단연 최고였다!
신체 능력 3.8 증폭에 재사용 시간 10초라니!
스킬 효과가 끝나도 딱 10초만 기다리면 스킬을 다시 쓸 수 있다는 말은 거의 평생 유지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투 중의 10초라는 시간은 목숨이 10번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지만, 땅굴을 파든 하늘로 튀든 잠깐만 도망쳤다 오면 그만 아니겠는가!
게다가 신체 능력이 3.8배라는 말은 단순히 숫자 놀음이 아니었다.
근력으로 치면 한 손에 10키로짜리 아령을 들던 사람이 38키로를 들 수 있다는 말이고, 달리기로 치면 국가 대표급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계속 잡자! 또 잡자! 스킬이 또 뭐 있더라?”
정다운은 완전 신바람이 났다.
상대가 범독수리들이다 보니 한 두 마리만 잡아도 자잘한 스킬들을 전부 레벨 업 시킬 수 있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루갈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치사한 놈을 봤나.]
[히히, 엉망진창이죠? 원래 그래요.]
어느새 루갈과 토끼는 축구경기를 중계하는 해설위원들처럼 외야로 빠져 있었다.
마법으로 어둠 속의 상황을 꿰뚫 어보던 루갈은 내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건 전투도 뭣도 아니다. 그렇다고 암살도 아니고 사냥도 아니다. 그냥 치사할 뿐이다.]
[그쵸. 원래 드럽게 치사한 인간임.]
[어떤 의미에서는 효율적이고 대단하긴 한데, 전혀 대단하지 않다.]
[히히. 그건 또 뭔 말임? 근데 뭔 말인지는 알겠음.]
선문답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엔 결과가 말해 주는 법.
어찌 됐든 정다운은 벌써 20마리째 범독수리를 사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끝이다. 이제부턴 어떡할 텐가?]
루갈이 눈을 번뜩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이 트고 있었다.
[히익? 큰일 났어요! 아침이 밝았어요! 해가 뜨고 있다고요!]
깜짝 놀란 토끼의 외침에 정다운고 퍼뜩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새벽녘 푸른 하늘이 천장으로 새어 들어와 항아리 안의 어둠을 점점 물리치고 있었다.
“이런. 생각보다 아침이 너무 빠른데?”
던전에는 시계가 없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렸다.
문득 모래시계라도 만들어서 써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잡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크르륵?”
안이 점점 밝아지면서 서로를 물고 뜯던 범독수리들도 하나둘씩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피 흘리며 죽어 있는 동족들.
짓밟힌 소중한 생선들.
그리고…… 그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간.
“크르륵!”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범독수리들의 심리가 저 하찮은 인간이 자신들의 동족들을 죽였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날이 밝았으니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후와앙!
놈들이 싸우던 것들을 멈추고 일제히 날개를 펼치고 위로 날아올랐다.
“응?”
정다운은 조금 당황했다.
그동안 너무 어두워서 이놈들이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끝났나 보다.
출구 쪽으로 가면 화살 발사대 함정이 발동한다.
퓨바바바박!
“크히약!?”
엄청난 양의 화살 세례가 놈들을 덮쳤고, 놈들은 혼비백산해서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마비독에 쏘인 날개를 움찔거리며 본능적으로 다른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없다.
벽을 파괴하기 전에는 말이다.
“크르릉!”
벽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초의 효과는 더 이상 놈들에게 먹히고 있지 않았다.
놈들의 주된 감각은 시각이지, 청각이 아니다.
가장 무서워하던 어둠이 사라진 이상, 아무리 무서운 소리라도 자꾸 반복해서 들으니까 백색 소음처럼 귀에 익숙해져 버린 것.
“크르렁!”
콰쾅!
벽을 향해 거칠게 몸통박치기를 하는 범독수리들!
벽이 자신들 위로 무너져 내리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머릿속에 없었다.
워낙 터프한 놈들이라 그 정도는 그냥 몸으로 버틸 생각이었다.
크르렁!
콰쾅! 콰앙!
“……뭐지, 나 좀 기분 나쁜데?”
이 와중에 철저하게 무시당한 정다운.
하찮은 인간 한 마리 따위, 지금 범독수리들 눈에는 항아리 바닥에 살고 있는 벌레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
기회가 있을 때 이 레벨 업 선물 보따리들을 몇 마리라도 더 잡는 게 좋지 않겠는가!
“잡아!”
미야옹!
푸슉!
그림자 요리사들의 식칼과 그림자 창병들의 드릴 스피어가 놈들의 뒷목을 향해 파고 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크와악!”
퍼퍼퍼펑!
“……음?”
주제도 모르고 괜히 나댔나 보다.
그림자 하인들이 한 방에 다 터져 버렸다.
[쯧쯧. 이쯤에서 손 터시지. 하여튼 무식이 용감이라니까요?]
[만용의 결과는 무서운 법이지.]
토끼와 루갈 해설위원이 한마디씩을 주고받는 찰나.
범독수리들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일제히 정다운을 향해 돌아갔다.
“하하, 안녕? 좋은 밤이었지?”
정다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동시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가려는데, 겨우 그걸 못 기다리고 놈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크르렁! 캬아오!”
“으아악!? 외뿔 멧돼지의 기운!”
정다운은 기겁하며 등을 돌리고 3.8배의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범독수리들이 몸을 멈칫하더니, 하나둘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어? 쟤네 왜 저럼?]
범독수리가 원래 이렇게 표정이 다채로운지도 처음 알았다.
놈들은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추석에 시골 내려가다 차멀미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목젖이 계속 울컥거리고 배가 자꾸 꿀렁거렸다.
그리고 결국엔…….
“쿠아아악!”
바닥에 네발로 엎드려 정신없이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쿠에엑!”
콸콸콸!
놈들은 완전히 혼비백산해 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토하고 또 토해도 입에서 끝도 없이 검은 액체가 치밀어 올랐다.
그 모습에 토끼와 루갈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히익? 저거 뭐임?]
[뭐, 뭐냐 저건!? 설마 저주인가? 저 인간에게 그런 류의 스킬이 있었나?]
[그딴 거 없어요! 내가 아는 바로는 절대! 아니, 왜 저놈들은 기껏 밥 맛있게 먹고 갑자기 검은 피를 토하는 거지?]
검은 피? 아니었다.
놈들이 토하는 건 다른 무언가였다.
좀 더 물컹하고 새까만…….
그렇다. 미역이었다.
“휴, 워낙 대식가들이라 이제야 반응이 오나 보네.”
정다운은 진땀을 닦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열심히 고생해서 생선 뱃속에 말린 미역을 꽉꽉 채워 둔 보람이 있었다.
참고로 미역은 물에 불리면 거의 10배로 늘어난다.
그게 지금 범독수리들의 뱃속에서 불어서 무한증식을 하고 있었다.
“꾸웨엑!”
“크와아아!”
콸콸콸!
범독수리들 입에서 미역이라는 이름의 검은 악마가 쉴 새 없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이제 다시 잡아 볼까?”
치사하지만 2차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