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80화>
* * *
고대 중국의 주술 중에는 ‘고독’(蠱毒)이라는 이름의 사악하고 잔혹한 저주가 있다.
그 방식은 간단하다.
작은 항아리 안에 뱀이나 지네 같은 온갖 유독한 동물들을 잔뜩 넣어 두는 것이다.
그러면 그놈들은 그 좁고 어두운 항아리 안에서 서로 뒤엉켜 싸우고 서로를 잡아먹게 된다.
최후의 한 마리만 남을 때까지.
그러면 자연히 마지막 놈 안에 최고의 저주와 독기가 쌓이게 되서, 그 독을 이용해 누군가를 해치는 저주가 바로 ‘고독’이었다.
정다운은 누구를 저주할 일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범독수리들을 한 곳에 모아 두고 서로 싸움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러다 서로 자멸하게 되면, 남아 있는 놈들의 상태는 대부분 죽었거나 반은 죽었을 터.
그러면 그때 딱 나타나서, 놈들을 어부지리로 처리하겠다는 것이 바로 정다운의 계획이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어떻게 싸움 붙이게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토끼에게 다운이 대답했다.
“그놈들이 좋아하는 상품이라도 걸면 서로 싸우지 않겠어? 설마 그런 터프한 놈들이 좋은 주먹 놔두고 말싸움이나 하겠냐는 거지.”
[상품이요? 그 물고기들한테요?]
“이건 상품이 아니라 미끼라니까?”
쓱쓱 싹싹.
정다운은 지금 한창 은둥이들의 배를 갈라 범독수리들이 먹기 좋게 뼈와 내장을 발라 내는 중이었다.
태양석을 캐랴, 물고기를 도축하랴, 요즘 그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그래서 몸이 다섯 개였다.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는 4명의 그림자 하인들을 알차게 돌려 쓰며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금 물고기를 도축하는 과정도 디테일하게 딱 한 번만 시범 보여 줬더니, 나머지는 전부 그림자 하인들이 야근을 해서 해결할 몫이었다.
그런데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알파가 탐을 냈다.
<제물을…….>
“안 돼! 이건 다 미끼라니까? 대신 뼈와 내장만 바칠게.”
<…….>
알파는 시무룩했지만, 물고기들의 크기가 워낙 크고 많다 보니 내장만으로도 상당한 에너지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정다운은 이것저것 강화하는 데 금방 다 써 버렸다.
큰 전투를 위해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 이것 좀 강화하자. 이것도. 이것도.”
<낭비가 심하십니다! 하루 벌어 하루 쓰시는군요.>
“에이, 이게 다 투자라고. 나중에 필요 없으면 강화 아이템들을 다시 제물로 바쳐도 되잖아?”
<그 과정에서 손실이 난단 말입니다.>
“응, 나도 사랑해.”
<…….>
알파의 잔소리는 참 좋은 점이 있었다.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눈으로 안 읽으면 그만이었다.
알파는 손이 있다면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토끼가 물었다.
[그런데요. 물고기가 미끼라면, 상품은 뭔데요?]
정다운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야 당연히 ‘내 집 마련의 꿈’이지.”
[집이라면, 둥지요?]
“그래. 피 튀기게 싸움을 붙일 건데 겨우 먹을 걸로 되겠어? 역시 부귀영화의 끝은 부동산이지.”
마녀의 일기장을 보고 정다운은 범독수리가 그 무엇보다도 둥지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핀>
……그런데 까마귀라도 밤은 무서운가 봐.
어두워지면 잘 안 보이더라.
그랬다.
범독수리는 밤을 무서워한다.
어두우면 보지 못한다.
이 2가지 내용이 그에게 힌트를 주었다.
“놈들은 눈이 너무 좋아. 이번에 우리도 그래서 공격당했잖아? 하늘에서 보면 거의 개미만 하게 보였을 텐데. 그런데 눈이 좋다는 건 시력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아하, 그래서 밤이 되면 앞이 안 보이니까 무서워하는구나? 그래서 둥지도 어두운 게 싫어서 태양석으로 밝게 하는 거고요?]
척하면 척, 토끼가 말귀를 알아듣자 정다운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너도 아주 바보는 아니구나.”
[에헴. 내가 좀 똘똘한 편이죠. ……그런데 이거 지금 나 놀린 거죠? 나도 다 알아요!]
뒤늦게 발끈하는 토끼였다.
“아무튼 그래서…….”
[아무튼이라니!?]
“나는 녀석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둥지를 만들어 줄 생각이야. 몇 십 마리가 한꺼번에 들어와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짓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망대 (2레벨)
- 건축 시간 3배 단축 (15~20분)
- 탑을 쌓으면서 쉽게 지치지 않는다.
-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을 지도로 확인할 수 있다. (더 넓은 시야)
전망대를 성벽처럼 쌓아서 한 바퀴 돌리면 아무리 넓어도 금방 지을 수 있었다.
물론 건물 하나만 불쑥 튀어나오면 수상해 보이니까, 전망대들을 전체적으로 야금야금 높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방향을 아치형으로 꺾어서 ‘항아리’처럼 주둥이를 좁히는 게 조금 까다로웠다.
“천장이 무너지지 않게 이쪽은 시멘트를 좀 발라 볼까?”
“놈들이 난동 부려도 무너지지 않으려면 벽이 좀 두꺼워야겠지?”
여러 가지 시도와 상황을 고려해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정다운이었다.
그리고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언제나처럼 크기가 좀 많이 커져 버렸다.
거의 백화점 수준으로 커져 버린 항아리 둥지를 올려다보는 정다운은 세상 뿌듯한 표정이었다.
“신이시여! 진정 이 건물이 제 손으로 지은 건물이란 말입니까!”
[또 오버하시네. 멀리서 보면 그냥 누가 때려서 혹 난 것 같구만.]
토끼가 초를 쳤다.
실제로도 누가 계란섬의 정수리를 딱 때려서 혹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혹은 매일매일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휴, 거의 다 됐다. 이제 안쪽에 태양석들을 박아 넣기만 하면 되겠어.”
[개장은 언제 하게요?]
“주변을 다 어둡게 하고 나서.”
그는 여전히 계란섬의 태양석들을 깎아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제 다른 건 얼추 다 준비됐고, 태양석 캐는 일만 남아 있었다.
* * *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거지?]
며칠 만에 나타난 루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정다운을 쳐다봤다.
“뽀뀨!”
뽀뀨가 뿅뿅 뛰어와 루갈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너네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난 아무 짓도 안 했다.]
뽀뀨가 뀨뀨 웃었다.
아무래도 같은 뼈다귀를 두고 싸우다가 혼자 정이 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정다운은 은근 불안감이 느껴졌다.
“설마 범독수리들도 이렇게 싸우다 정드는 건 아니겠지? 둥지가 넓으니까 다 같이 합숙하겠다든가…….”
[그럼 망하는 거죠, 뭐.]
사실 범독수리가 까마귀라는 것만 확실하다면 문제없었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까마귀 무리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집단.
리더도 따로 없고, 목적이나 결속력도 약한 집단이 바로 ‘오합지졸’이었다.
다만 까마귀의 지능이 제법 좋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봐온 범독수리들의 모습과 마녀의 일기장을 믿어 보기로 했다.
“……뭐, 정 안 되면 최후의 방법도 있으니까.”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다운.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진짜 범독수리들을 잡을 생각인가? 고작 저런 걸로?]
루갈은 처음부터 내내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는 정다운이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를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운이 좋아 용의 신전을 물려받은 생산직 정도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루갈은 정다운의 이번 싸움을 몹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라는 전투는 안 하고 벌써 열흘이 넘도록 태양석만 캐고 있으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언제 싸우는 건가?]
“거의 다 캤어!”
진짜였다.
그는 결국 계란섬에 있는 모든 태양석을 수거하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계란섬을 찾아오는 범독수리들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완벽한 고요.
간혹 남아 있는 슬러그들만이 조용히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좋아. 이제 슬슬 백화점을 열어 볼까?”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선글라스를 끼고 거대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전투 시작이었다.
……라고 하기엔 항아리 안쪽 벽에 태양석을 하나씩 박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체 언제 싸우는 거지?]
“다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라고.”
루갈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이 났다.
[업혀라.]
“어? 태워 주게?”
정다운은 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허리를 굽히자 깜짝 놀랐다.
[내 등에 타고 날아다니면서 조명을 달면 훨씬 빠르지 않겠나?]
“어, 그렇긴 하지. 못해도 10배는 빨라질걸? 그런데 진짜 이래도 돼?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잖아.”
토끼도 놀랐다.
[와, 저돌적이시네. 손도 안 잡은 사이에 벌써부터 등짝을 허락하다니!]
[쯧. 까불지 마라, 토끼.]
쿵짝이 맞아서 낯가리는 흉내를 내는 둘의 모습에 루갈은 혀를 찼다.
[아무튼 이딴 건 전투도 아닌데, 뭐 어떤가 싶다. 업혀라. 나는 반드시 오늘 안에 네가 싸우는 꼴을 보고 말겠다.]
“오케이. 개밥 한 끼 더 추가.”
[……대체 그건 언제 줄 생각인가?]
정다운은 곧바로 루갈의 등에 업혔다.
그러자 후욱! 하고 바람처럼 날아오르는 루갈.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팀워크는 최고였다.
“저쪽으로!”
휘오오오!
처처처척!
나선을 그리며 항아리 안을 휘몰아쳐 날아가는 루갈의 위에서 정다운이 빠른 속도로 태양석을 벽에 박았다.
서늘하고 어둡던 항아리 속이 점점 따사로운 빛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크으, 아름답구나! 신이시여, 이것이 진정으로……!”
[그딴 뻘 소리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붙여라!]
루갈은 비행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윽, 제 건강에는 안 좋나이다.]
바하무트 하차.
온도가 올라가면서 점점 몸이 녹는 것을 느끼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그렇다. 항아리에는 뒷문이 있었다.
그곳으로 골렘들 몇 명이서 다시 예쁘게 배가 봉합된 물고기들을 들여오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둥지 안에 범독수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항아리 안에 점점 고여 가는 생선 비린내.
하지만 이 냄새야말로 범독수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페로몬 아니겠는가!
“좋았어! 바하무트! 냄새 풍겨!”
[블리자드!]
휘오오오!
뒷문 밖에서 바하무트이 찬바람이 생선 비린내를 항아리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계란섬 주변에 엄청난 양의 생선 냄새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치 백화점 1층에 진열된 향수냄새처럼.
수많은 고객들의 탐욕을 자극했다.
“……크르릉?”
곳곳에 웅크리고 있던 범독수리들의 코가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 눈을 돌렸을 때.
“크륵!?”
그곳에 실로 아름답고 거대한 둥지가 보였다.
참고로 전망대 곳곳에는 밖으로 뚫린 창문들이 존재한다.
그 사이사이로 아름다운 황금빛이 사방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갓 깨어날 것같은 황금용의 알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온 사방에 드러내고 있었다.
“크르릉!”
결국 욕망을 참지 못한 범독수리들이 날개를 펼쳤다.
저곳에 낙원이 있었다!
게다가 이 엄청난 양의 생선 냄새라니!
낙원이 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겐 지독하게 길겠지만 누군가에겐 짧고 화려한 밤이 시작되었다.
“자, 어서 오시게.”
낙원의 주인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선글라스를 추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