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78화>
어쩐지 범독수리가 유독 반짝이는 물건에 집착한다 했다.
까마귀가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 특징을 잘 활용해서 싸운다면 승산이 조금이라도 올라가지 않을까 싶었다.
“흠, 어두운 걸 무서워한다라…….”
정다운은 범독수리의 특징을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날이 슬슬 저물어 가고 있었다.
등천로의 밤은 빛과 어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장관이었다.
태양석으로 도배된 부유섬들이 여기저기 떠다니며 빛을 내고 있었고, 그 빛이 밝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옆은 어둠이 더욱 진해 보였다.
어쩐지 가로등만 있는 한적한 시골길 같아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고 보니 범독수리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어요.]
토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어제 밤에도 이런 분위기긴 했다.
[여태까지는 그냥 어두워서 안 보이나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어둠이 무서워서 둥지로 숨어 버린 거였나 봐요.]
그 말에 정다운은 문득 대신전 밑에 살던 범독수리의 동굴이 떠올랐다.
“아, 그래서 둥지에 태양석을 모아 두는 거였나?”
[아하, 그렇겠네요. 동굴 속도 어두우니까요. 자기 집인데도 어두우면 잠이 안 오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귀엽네.”
[그 귀여운 놈들이 우리 철갑 골렘을 잡아 찢었다는 걸 잊지 마셈.]
그 장면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토끼였다.
그리고 아까 챙겨 온 골렘의 핵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핵을 좀 더 안전한 곳에 숨겨 둬야겠어요. 차라리 핵을 아예 발바닥 같은 데 숨기는 건 어때요?]
“그러다 다리 부러지면 바로 죽으라고?”
[아, 그런가?]
“당연하지. 사람도 심장이 발바닥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압정만 밟아도 바로 치명상일 텐데.”
게다가 재생 속도도 문제였다.
발바닥에서부터 몸 전체를 재생시키려고 하면 엄청 오래 걸릴 것이다.
반면에 핵이 몸통에 있다면 부러진 다리를 손으로 주워서 붙이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나름 좋은 의견이였어. 핵을 몸통에서 최대한 아래쪽으로 옮기면 그나마 덜 위험하겠지?”
정다운은 철갑 골렘들을 나란히 세워 놓고 핵을 전부 뽑아냈다.
그리고 다시 쑤셔 박은 곳은 몸통에서 가장 아래쪽…….
다리와 다리 사이의 깊숙한…….
아임 그루트.
“흠흠, 여기 맞으면 진짜 아프겠는데.”
[골렘이 아픔을 어떻게 느껴요? 그냥 바로 즉사죠.]
“……넌 역시 인형이구나.”
정다운의 민망한 표정에 토끼만 이해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잠깐.”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야, 혹시 이 골렘의 핵도 강화가 될까?”
[되겠죠. 왜요? 단단함 같은 거라도 걸게요?]
토끼의 대답에 정다운이 씨익 웃으며 핵들을 다시 뽑아내기 시작했다.
“단단함도 좋지. 맞아도 쉽게 안 깨지겠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게 생각났어.”
[뭔데요?]
“리턴.”
[오호? 그럴싸!]
그의 말에 토끼가 눈을 크게 떴다.
정다운이 씨익 웃었다.
“리턴 옵션을 걸면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골렘의 핵만 수거해 오기 딱 좋지 않겠어?”
그는 바로 제단 앞으로 걸어가 골렘의 핵을 강화했다.
[골렘의 핵 +1]
- 내구도 : 100/100(%)
- 옵션 : 리턴 (1레벨)
강화 끝.
“어디 한번 해 볼까?”
정다운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강화된 핵을 골렘의 은밀한 곳에 다시 쑤셔 박았다.
번쩍!
그러자 철갑 고릴라 골렘이 눈을 번뜩이며 디시 살아났다.
그리고 진짜 고릴라처럼 두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온 사방에 자신이 살아났음을 우렁차게 포효했다.
“크워어!”
“응, 리턴.”
“크웅…….”
곧바로 힘이 빠지며 시무룩해지는 골렘.
어느새 정다운의 손에 강화된 핵이 돌아와 있었다.
“오, 성공!”
[와우, 이러면 확실히 오늘처럼 내가 위험하게 핵 주우러 가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런 거지!”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오늘이야 운이 좋아서 핵이 밖에 삐져나와 있었지만, 다음에도 또 그러란 법은 없었다.
만약 핵이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면, 토끼에겐 그 흙을 파헤칠 재주가 없었다.
“좋았어. 이런 식으로 핵을 전부 강화하자. 아, 단단함도 전부 걸까?”
그 말에 알파가 우려를 표했다.
<이 전부를 강화하기엔 생명 에너지가 많이 부족합니다. 지금은 우선 리턴만 강화하시길 바랍니다.>
“오케이.”
아이템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생명 에너지의 양은 대상물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강화를 반복할수록 그 양이 2배씩 늘어난다.
그런데 방금 골렘의 핵을 강화하면서 들어간 생명 에너지는 거의 한 달 치 식량분이었으니, 너무 무리할 수는 없었다.
<제물이 좀 부족할 것 같은데, 첫 번째 사도에게 한번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동민이한테 또? 말이라도 한번 해 볼까?”
염치 불구하고 식신 오동민에게 귓말을 넣어 봤다.
그러자 잠시 후, 호쾌한 답장이 돌아왔다.
<오동민 : 네, 필요하신 만큼 보내 드릴게요!>
그리고 눈치껏 조금만 부탁했는데, 그것보다 더 얹어서 제물이 바쳐져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얘는 대체 어디서 뭘 먹고 다니는 거지? 나처럼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닐 텐데.”
그 말에 루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꼬맹이는 입에 들어가는 건 다 먹는다.]
“어? 너 아직 안 갔어?”
[안 그래도 이것만 먹고 가려고 했다.]
“아니, 그걸 네가 왜 먹고 있냐…….”
우물우물.
어느새 루갈의 입에는 범독수리의 뼈다귀가 길게 물려 있었다.
[맛이 좋군. 네가 말한 개밥은 이것보다 더 맛있기를 바란다.]
정다운의 황당한 시선에도 루갈은 뻔뻔하게 바닥에 쪼그려 앉아 뼈다귀를 개껌처럼 씹어 먹었다.
“뽀뀨!”
그러자 눈앞에서 자신의 밥을 빼앗긴 뽀뀨가 길길이 화를 내며 루갈의 주둥이 위로 쪼르르 올라가 뼈다귀를 같이 열심히 핥기 시작했다.
……묘한 경쟁 구도였다.
정다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골렘의 핵들을 전부 강화했다.
“이번 기회에 골렘들을 싹 재정비해야겠다.”
그는 며칠에 걸려서 파괴된 골렘과 최근에 토끼 던전에서 새로 구해 온 골렘 2기의 몸을 새로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직접 만들 필요가 없었다.
흙덩이로 큼직한 형태만 그가 잡아 놓으면, 그 뒤부턴 그림자 하인들이 붙어서 디테일을 전부 다듬어 나갔다.
“훗, 기특한 녀석들. 횃불이라도 좀 먹으면서 일하렴.”
[진짜 하인들 한번 오지게 부려먹네요.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골렘은 원래 자기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요.]
“아까 하나 살아난 것 못 봤어? 얘네는 다 내 분신들이라고. 사실 알고 보면 옛날에 살던 예술가들도 다 나처럼 노예 부려서 조각상 만들었을걸?”
정다운은 당당했다.
사실 그 많은 조각상들을 어떻게 조각가 한 명이서 다 만들었겠는가.
심지어 그때는 드릴 같은 것도 없어서 다 일일이 깨서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어? 드릴?”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다 보니 문득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잘하면 드릴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드릴은 또 뭐임?]
“송곳을 돌려서 벽에 구멍 뚫는 연장인데 말이지…….”
정다운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도 보여 달라고 시킨 적은 없었다.
그는 튼실한 쇠꼬챙이 하나를 골라, 그 옆면을 개미 침으로 살살 녹이고 숫돌로 갈아 날카로운 나선형의 빗면을 깎아 냈다.
“짠. 이게 바로 드릴날이라는 거야. 이걸 전기로 돌려서 벽에 구멍을 뚫는 거지.”
[호오, 전기는 나도 알죠. 참가자들이 항상 전기가 없다고 불평했으니까요. 그런데 님도 전기는 없잖아요. 어떻게 돌리게요?]
“무슨 소리야?”
토끼의 지적에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근처 바위 앞으로 다가가 드릴 날로 제국창술의 기본자세를 취했다.
“전기가 왜 필요해? 드라이버도 그냥 손으로 돌리는데. 돌리기!”
[음?]
정다운은 돌리기 스킬을 펼치며 창을 앞으로 푹 찔렀다.
그의 손가락과 손목이 그 창에 절묘한 스냅을 걸어 일정한 속도로 회전을 먹인 것.
그러자 드릴 날이 콰르륵! 하고 바위에 구멍을 천천히 뚫고 깊숙이 파묻혔다.
“와, 좋은데? 역시 스킬까지 먹였더니 어지간한 드릴 못지않네.”
[헐.]
그 모습에 토끼는 큰 충격을 먹었다.
[지, 지금 그거 뭐임? 어떻게 창으로 바위를 뚫어요?]
툭.
[뭐, 뭐지? 지금 뭘 한 건가! 그거 평범한 쇠꼬챙이 아니었던가?]
루갈에게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는지 입에 물고 있던 뼈다귀를 떨어뜨릴 정도였다.
“뀨잇!”
그 틈에 뽀뀨가 얼른 뛰어내려 뼈다귀 위에 찰싹 달라붙었는 데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루갈은 경악했다.
그 반응들에 정다운은 기분이 좋아졌다.
“제법 효과가 좋은데? 음, 이름은…… 드릴 스피어로 할까?”
이름이야 뭐가 중요할까?
그가 신이 나서 드릴 스피어를 연속해서 몇 번 더 실험해 봤다.
그때마다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푹푹 뚫렸고, 그때마다 토끼와 루갈은 몹시 놀라워했다.
구멍이 뚫리는 속도가 좀 느리긴 했지만, 그건 상대가 바위였기 때문이고 상대가 괴물이라면 그만큼 공격력이 올라간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놀라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바하무트였다.
[오러를 쓰지 않고도 이만한 공격력이라니……. 오래전 제국의 기사 중에도 이런 비슷한 기술을 쓰는 자가 한 명 있었나이다.]
“싸울 때도 좋다는 말이네? 범독수리에게라면 어떨까?”
정다운은 눈을 반짝이며 소지품에서 범독수리의 가죽을 꺼내 바위 위에 덮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드릴 스피어의 끝을 대고 외쳤다.
“돌리기!”
콰드득!
성공적!
드릴 날에 가죽이 휘감기며 구멍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친김에 그 뒤에 있는 바위까지 뚫어 버렸다!
[헐.]
[맙소사.]
전직 도우미와 현직 도우미에겐 이 광경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평범한 쇠꼬챙이로 범독수리의 가죽을 뚫었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아, 역시 드릴 날이 조금 닳았네. 여기에 단단함을 좀 강화하면 되려나?”
정다운은 아예 단단함과 관통력을 높인 쇠꼬챙이를 깎아서 드릴 날을 만들었다.
만드는 김에 몇 개 더 만들어서 그림자 하인들에게 들려 주며 말했다.
“자, 봤지? 너네도 할 수 있어.”
“니야앙?”
하나가 전체. 전체가 하나.
정다운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녀석들에게도 가능했다.
여의봉처럼 수평으로 돌리는 것도 잘만 따라했는데, 방향만 바꿔서 수직으로 돌리는 게 뭐 어렵겠는가.
콰드득!
그림자로 이루어진 3개의 드릴 스피어가 바위에 나란히 구멍을 뚫었다.
대성공이었다.
“좋았어. 일단 싸울 무기는 이정도면 된 것 같고……. 이제 싸울 무대를 만들어 봐야겠다.”
정다운은 오랜만에 문어 골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계란섬 아래를 날아다니며 그 표면에 붙은 태양석을 캐기 시작했다.
“돌 깨기! 돌 깨기!”
어두운 게 무섭고 밝은 게 좋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