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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74)화 (174/393)

<던전리셋 174화>

*   *   *

명실상부 던전의 최약체인 다크모들의 일생은 늘 고달프다.

참가자들에게 쫓기랴, 상위 괴물들의 아귀다툼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랴.

물엿꽃에게도 한 입 거리고, 감자 줄기에게 붙들리면 죽을 때까지 쫄쫄 굶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다크모들에게도 나름 꽃피는 청춘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순이(가명, 다크모 암컷)와 다돌이(가명, 다크모 수컷)는 운명의 반려였다.

수많은 리셋 속에서 그들은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 왔다.

매번 기억이 리셋되는 데도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눈이 맞았고, 오붓하게 참가자들의 뼈와 살을 나눠 먹으며 신혼의 달콤함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사랑의 끝은 언제나 파국으로 정해져 있었다.

던전이 정한 파국!

신혼의 단꿈은 괴물 쥐떼에 의해 매번 풍비박산 나고, 그들 또한 결국엔 잡혀먹히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수많은 죽음의 기로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을 했으며, 기적적인 운도 따라 줬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은 끝에 결국 던전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인 유적지까지 도망쳐 와 새롭게 다시 신혼집을 꾸몄다.

휴, 이제 됐다!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다순이와 다돌이 앞에 괴도 정다운이 나타났다.

“키히?”

자꾸 신혼살림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간다.

“와, 이건 뭐야, 뭐야? 선글라스? 너네 진짜 부자구나? 별게 다 있네!”

“……키히이?”

물건들이 자꾸 자꾸 사라진다.

뻔히 도둑놈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없어진 물건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는 다크모들을 보며 토끼가 혀를 찼다.

[휴, 벼룩의 간을 빼 먹지. 다크모를 등쳐 먹는 인간은 진짜 처음 봄.]

“난 알아 버렸어.”

[뭘 알아요?]

정다운은 결국 깨닫고 말았다.

다크모들이 타고난 수집가라는 사실을!

워낙 극초반에 참가자들을 덮치는 놈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처음 던전에 도착했을 때 들고 있던 물건들을 이놈들이 다 수거해서 모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보물 상자?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이곳이 바로 보물 창고였다.

울컥.

“이거…… 빵이잖아?”

구석에서 빵을 발견한 정다운은 눈물이 날 뻔했다.

아무래도 편의점에서 나오다가 소환된 사람이 있었나 보다.

소보로빵, 크림빵, 식빵, 종류도 다양하게 대충 2만 원어치의 빵이 비닐 봉투에 포장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작은 물건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나오자, 정다운의 눈이 또 돌아갔다.

“세상에! 이거 치실이잖아?”

대체 얼마나 본격적으로 빵을 먹으려고 치실까지 구매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소금과 풀잎으로만 양치하며 살던 그에게 갑자기 부귀영화가 찾아왔다.

그의 환호성에 토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데 그래요?]

“이 사이에 낀 음식물 찌꺼기를 빼낼 때 쓰는 실이야. 자, 이런 식으로 쓰는 거지.”

정다운은 세상 도도한 표정으로 토끼에게 치실을 사용하는 방법을 보여 줬다.

실을 돌돌 풀어서 이 사이를 쓱쓱 싹싹.

바이올린이라도 켜듯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랬다.

이거야 말로 진정한 부귀영화!

던전에서 누릴 수 없는 현대인의 품격이었다.

[나만 꼴사나움?]

토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풀잎으로 양치하고 입을 헹궈도 충분하지 않음? 이건 뒀다가 낚싯줄로 쓰면 어때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치실을 강화해서 내구성만 좀 높이면 충분히 낚싯줄로도 쓸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정다운은 진정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던전의 귀족이었다.

“무슨 소리지? 이걸로는 실뜨기할 거야.”

[실뜨기?]

“자, 이런 거지.”

그가 도도한 표정으로 치실을 둘둘 풀어 두 손에 걸었다.

그리고 손을 휙휙 움직였더니 그 사이에 실로 된 오작교가 만들어졌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태에 토끼의 눈이 초롱거렸다.

[오, 예쁘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할 건데요?]

“뭘 하긴? 이게 끝인데?”

[……네?]

의기양양하게 오작교를 내미는 정다운의 모습에 토끼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실뜨기에 무슨 대단한 의미를 찾겠는가?

그냥 재밌고 예쁘면 그만이었다.

토끼는 한숨을 내쉬며 던전의 관리자다운 의견을 냈다.

[차라리 이걸 전투에 응용해 보는 건 어때요?]

“전투에?”

[이렇게요.]

토끼는 치실을 받아 들고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곤 통로의 양 끝에 치실을 팽팽하게 묶어 고정시켰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참가자들을 향해 기세 좋게 달려오던 다크모 한 마리가 치실에 목이 걸려 넘어졌다.

“키힉…….”

다크모는 목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그 모습에 토끼가 의기양양하게 정다운을 돌아봤다.

[헷. 봤죠? 어때요? 전투는 바로 이렇게 하는 거임!]

“대단하긴 한데……, 너 피 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

[헉?]

토끼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치실 함정 자체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특히 겉 표면이 개구리처럼 말랑거리는 다크모들의 몸을 자르기에 딱 좋았다.

실을 걸어 둔 높이도 딱 다크모들의 몸에 맞춰 있었다.

반면에 사람들은 단단한 갑옷이나 옷을 입고 있어서 치실에 걸려도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문득 정다운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

“이런 식이라면 흙덩이를 자를 때도 좋겠는데?”

[또 흙임?]

“만화에서 비슷한 걸 본 적 있거든.”

정다운은 즉석에서 흙덩이 하나를 꺼내 치실을 팽팽하게 해서 서걱 잘랐다.

그러자 그 단면이 예리하게 잘려 나가자 그가 쾌재를 불렀다.

“나는…… 이렇게 더 강해졌다.”

[아, 뭐래.]

역시 아는 게 힘이었다.

흙 뭉치기 스킬을 마스터한 지도 오래됐건만, 그의 흙 조형 실력은 여전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다운은 진심이었다.

“이걸 이용하면 골렘을 더 세련된 모습으로 개조할 수 있겠어!”

[그건 그냥 생김새만 달라지는 거잖아요?]

“생김새가 얼마나 중요한데? 타조처럼 만드니까 꼬꼬거리면서 우는 거 못 봤어?”

<그 말엔 동감입니다. 골렘술은 본디 사람을 본뜬 인형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골렘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알파의 말에 득의양양하는 정다운.

토끼는 하나 궁금한 점이 있었다.

[그러면…… 코끼리 골렘은 자길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임?]

엉망진창?

다리는 여섯에 창문이 숭숭 뚫려 있으며, 안에는 온돌이며 화로며…….

심지어 요즘엔 등짝에 던전 콩도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문득 코끼리가 불쌍해진 토끼였다.

“아무튼 이 치실은 여러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겠어. 바느질 할 때도 쓸 수 있고.”

치실을 소중히 갈무리하는 정다운이었다.

그들은 계속 다크모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쓸 만한 함정이 있으면 뜯어내고, 보물 상자가 있으면 알맹이만 빼먹었다.

물론 양심은 있으니 뒤따라올 참가자들을 위해 적당히는 남겨 놓았다.

그러다 중간중간 다크모가 아닌 다른 괴물들도 마주쳤지만, 서로 내외하는 사이였다.

철저한 무관심.

던전 사회가 이렇게 냉정하다.

“이쪽은 허탕이네. 나중에 헤맬 수 있으니까 여긴 문으로 막아 둘까?”

[내가 있는데 길을 왜 헤매요?]

“사실 그냥 이 자동문 한번 써보고 싶었어.”

그는 헷갈릴 것 같은 갈림길 앞에 함정에서 뜯어낸 문짝을 세로로 설치했다.

그러자 영락없는 대문이 생겨났다.

[나무 문짝 +1]

- 내구도 : 87/100(%)

- 옵션 : 오픈 (1레벨)

“이 옵션 어떻게 쓰는 거야?”

[‘오픈’이라는 옵션은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열리는 효과예요.]

“어떤 조건인데?”

[함정마다 다르겠죠? 아까 보니까 이건 일정 이상의 힘이나 무게로 누르는 방식인 것 같은데, 어차피 관리자 입장에선 그냥 주문만 외우면 열려요.]

“주문이라면, 오픈?”

그 말에 나무 문짝이 벌컥! 열렸다.

“키힉!?”

그 앞에 있던 괴물들이 깜짝 놀라 뒤로 후다닥 흩어졌다.

정다운의 눈이 환해졌다.

“와, 진짜 열리네? 닫는 것도 돼?”

[닫히라고 하면 닫히겠죠 뭐. 함정이니까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닫힐 테고요.]

“닫히는 거면, 클로즈?”

사실 영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어떤 언어를 쓰든 뜻만 통하면 되는 것이다.

벌컥!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짝이 다시 닫혔고, 조심조심 눈치를 보며 문집 앞으로 다시 다가오던 괴물들이 또 한 번 놀라 뒤로 도망쳤다.

유적지의 괴물들은 본능적으로 이 나무 문짝이 함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문이 열린다는 건 함정이 발동되었다는 뜻이니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대박! 이거 진짜 완전 자동문이네!”

정다운은 완전 신바람이 나서 문을 계속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그 안을 몇 번이고 빨빨거리며 들락거렸다.

“오픈! 클로즈! 오픈! 클로즈!”

벌컥! 벌컥! 벌컥!

아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밌을까!

그냥 자동문일 뿐인데!

그럴 때마다 괴물들도 흩어졌다 몰려왔다가 우왕좌왕했다.

괴물들 입장에선 공포물이 따로 없었다.

정다운은 유령이나 마찬가지니까, 문짝만 저 혼자서 열리고 닫히는 셈이었다.

[훗, 엉망진창이네…….]

토끼는 그냥 멀찍이 떨어져서 일행이 아닌 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다운이 손을 번쩍 들고 아는 척을 했다.

“야! 이 함정 문짝들 또 어디 어디 있어? 다 뜯어서 우리 집에 달아 놓자!”

정다운은 왜 여태 이 생각을 안 해 봤는지 자신의 무지함을 한탄했다.

유적지를 항상 게이트로만 통해 들어왔더니 이런 디테일을 내내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아지트를 만들면서 항상 문을 만드는 일이 제일 까다로웠다.

맨땅에서 경첩을 만드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기껏 만들어 놔도 언젠간 부속들이 마모되어 다시 재정비를 해 줘야 했던 것이다.

[님, 뭐 잊은 것 없음?]

“응? 내가 뭘 잊었지?”

잔뜩 상기된 얼굴의 정다운.

토끼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유적지는 공략되고 있어요. 최종 보스도 없으니까 보스룸에 도착만 하면 클리어라고요. 리셋되기 전에 보물들 다 찾는다는 것 아니었음?]

“아하. 내가 너무 놀았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물 상자를 찾아 이동하는 정다운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참가자들은 드디어 보스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

“여기가 드디어 마지막인가…….”

상처투성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 함정에 다쳤던 사람조차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여기까지 도착했다.

“여긴 또 어떤 위험이…….”

모두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원래라면 여기가 가장 위험한 곳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맷집과 흉폭함으로 무장한 외뿔 멧돼지들이 보스룸 앞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돼지들은 이미 다 먹어 버렸다.

끼이익.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드디어 보스룸의 문을 연 참가자들.

그러자 그 안엔 정다운이 무게 잡고 제단 위에 올라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거 설마 루갈 흉내임?]

“흠흠.”

정다운이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무사히 졸업 시험을 완료한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 그동안 잡은 제물들을 제단 위에 올리시면 그에 따른 업적이 완료될 겁니다.”

종말의 용에게서 던전을 뺏어 오면서 토끼 던전 한정으로 던전의 시스템이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전투만이 아니라, 제물에 들어간 정성에 따라서도 보상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요는 제물이 얼마나 신선한가!

도축하는 시간이 느릴수록 신선도는 떨어질 것이며, 농작물을 얼마나 잘 키워 내고 수확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진다.

그리고 그 노력과 정성이 곧 참가자들에게 축복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전투직과 생산직의 절묘한 밸런스.

그것이 토끼 던전이 추구하는 방향성이었다.

<제물을 바치시지요. 에르테아 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신전의 주인으로 정다운을 임명하고 처음으로 보람을 느끼는 알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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