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72화>
참고로 던전에서는 국적이 다른 참가자들 간에도 서로 언어가 통한다.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 등 서로 다른 나라의 언어와 방언들이 자연스럽게 참가자들의 머릿속에서 번역되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모르는 나라의 문자라도, 쓸 수는 없지만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토끼는 이것을 가리켜 ‘초월 언어’라 불렀고, 초월자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정다운이 지금 의아해하는 부분은 다른 부분이었다.
“……이거 어느 나라 말이지?”
마법서에 적힌 글의 내용은 알아보겠는데 생김새가 생판 처음 보는 문자였던 것이다.
한글도 알파벳도 아닌, 완전히 다른 무언가였다.
정다운은 의아해하며 토끼를 불러 물었다.
“이거 네가 그랬냐?”
[뭘요? 뭔지는 몰라도 이번엔 나 아님.]
토끼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인데, 이번엔 진짜 아닌 것 같았다.
[어? 이건 룬 문자네요?]
슬쩍 마법서의 내용을 본 토끼가 문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룬 문자? 그게 뭔데?”
대답은 알파에게서 흘러나왔다.
<마법진에 들어가는 문자입니다. 마녀들이 만들었다 해서 ‘마녀 문자’라고도 불립니다.>
“마녀 문자라고?”
정다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또 마녀란다.
하여튼 이놈의 던전은 어딜 가나 마녀 얘기뿐이다.
<룬 문자는 마법의 언어입니다. 마법사들은 보통 이 룬 문자를 하나씩 깨우칠 때마다 새로운 마법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 단어를 조합해서 더욱 강력한 마법을 창조하기도 하지요. 그 정점이 바로 마법진입니다.>
“이걸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정다운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알파는 단호히 말했다.
<헛된 기대 하지 마십시오. 룬 문자는 단순히 글씨를 똑같이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통해 문자에 담긴 온전한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로 깨우쳐야만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간섭할 수 있습니다.>
“……뭔 말이야?”
순간 영어 듣기 평가인 줄 알았다.
알파의 설명은 분명 들었는데도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토끼가 쉽게 정리해 줬다.
[그러니까 님은 해도 안 된다는 거임.]
“어, 한 줄 요약 고맙다?”
[그런데 이거 누가 쓴 거임? 님이 설마 룬 문자를 썼을 리는 없고요.]
“내가 물어볼 말이야. 펼쳐 보니까 갑자기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니까?”
[갑자기요?]
토끼는 어리둥절하며 다시 마법서의 내용을 살폈다.
사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필체나 말투도 유치하고, 어린아이가 대충 낙서하듯이 일기라도 끄적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법서가 원래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 백지 마법서였다는 것이다.
쓴 사람은 없는데 글씨만 남아 있는 상황.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별일도 다 있네요.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룬 문자로 이딴 일기를 쓰지? 감자는 동글동글 귀여워?]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룬 문자는 글자 하나를 쓸 때마다 마력이 소모될 텐데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어처구니없어하는 토끼와 알파였다.
그런데 그때 루갈이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옆으로 다가왔다.
[흠. 사실 마력이 없어도 룬 문자를 쓸 수 있는 존재가 있긴 하지.]
“어? 너 아직 안 갔냐?”
[……너무 그러지 마라. 자꾸 들으니 조금 상처가 되는군.]
“어? 어, 미안.”
[…….]
“…….”
머쓱.
갑자기 둘 사이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루갈의 꼬리가 시무룩 아래로 쳐져 있었다.
하지만 소신 있게 하던 말은 끝까지 하는 루갈이었다.
[룬 문자는 마녀들이 만든 언어다. 마녀라면 마력이 없어도 얼마든지 룬 문자를 쓸 수 있지.]
“또 마녀야? 그래서 이 감자 얘기를 마녀가 쓴 거라고? 갑자기 언제?”
[마법이겠지. 그 전에 하나만 묻지. 이 마법서를 너는 어디서 났지?]
“그야 마녀의 서재에서…….”
그 말에 루갈은 두툼한 손가락으로 마법서의 하얀 페이지를 가리켰다.
[마법서는 원래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는 특별한 종이로만 만들어진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마법 종이 위에 룬 문자가 적혀 있다? 이게 결코 우연일 리는 없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 감자 일기가 마법으로 저절로 생겨난 거다?”
[그렇다. 마법진도 원래 평소엔 눈에 보이지 않다가 특정한 마력을 불어넣으면 생성되는 법이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파앗!
그 말대로 루갈의 손에 검은 마법진 하나가 생성되었다.
루갈은 즉흥적으로 그에게 제안했다.
[한번 실험 삼아 조금 전에 네가 마법서를 들고 한 행동을 다시 해 보는 게 어떤가?]
“흠, 내가 어떻게 했더라?”
정다운은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감자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땅을 조금 파서 그 안에 씨감자 하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흙을 잘 덮은 후, 마법서를 펼쳤다.
“바뀐 게 없는데?”
[그건 이미 마법이 발동되었지 않나. 다른 마법서로 해 봐라.]
“아.”
정다운이 소지품에서 아직 한 번도 건든 적 없는 백지 마법서를 꺼내 펼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아앗!
새하얀 종이 위에 룬 문자가 번져 올라온 것.
<감자>
감자는 참 맛있고 동글동글 귀여운 것 같아!
…….
“……!”
정다운의 눈이 커졌다.
완전히 똑같은 글귀가 나타난 것이다!
루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원인은 네 손에 들린 감자인 것 같군.]
“어?”
그 말에 문득 정다운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씨감자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심다 남은 씨감자를 계속 손에 들고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다고?”
[던전 감자 안에 깃들어 있던 어떤 의지가 마법서에 룬 문자를 새겨 넣은 것 같다.]
“이젠 하다하다 감자까지 마법 쓰네. 마법은 나만 못해…….”
그는 우울해졌다.
[나도 한번 해 볼래요!]
토끼가 신기해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잽싸게 바닥에서 씨감자 하나를 주워 들고 새로운 백지 마법서를 펼쳐 들며 멋지게 외쳤다.
[이얍! 감자는 동글동글! 나와랏! 뿅!]
……조용.
[얍! 동글 뿅! 동글 뿅!]
……조용.
아무리 외쳐 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끼는 민망했다.
[왜 나는 안 됨? 설마 치사하게 인간들만 되는 건 아니겠지?]
“확인해 보자고.”
정다운은 지나가던 참가자들을 불러 세우고 마법서와 감자를 들려 주었다.
하지만 그들도 토끼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이 났다.
“흠. 이렇게 되면 결국 나만 된다는 말인 거네.”
[와, 이 오류종자가 또? 왜 치사하게 님만 되는 거임?]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별로 쓸모는 없을 듯요. 감자가 동글동글 귀여운 걸 알아서 어디에 써먹겠음?]
“그러게.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부분인데.”
[아니, 그런 부분에서 공감하지 말라고요! 아무튼 님 혼자만 가능하다는 것부터가 부질없음의 시작인 것 같아요. 하이고, 의미 없다.]
“어딘가 쓰임새가 있지 않겠어? 아, 혹시 다른 것도 되나?”
정다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자를 내려놓고 대신 가까이 있는 쥐똥 비료를 손에 들었다.
그러자 마법서에 새로운 글귀가 떠올랐다.
파아앗!
<쥐>
쥐는 너무 싫어!
갑자기 나타나서 식량을 다 먹어 치우는 먹보야.
저러다 엄청 커져서 나도 잡아먹겠다고 덤비면 어쩌지?
[오? 새로운 내용이 떴네요? 이번엔 쥐임?]
“괴물 쥐에 대한 내용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이름도 그냥 ‘쥐’고, 크기도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음?”
그때 불현듯 정다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식량을 다 먹어 치우는 먹보.
엄청 커져서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쥐.
“……설마?”
갑자기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소지품을 열고 기다란 뼈를 주르륵 뽑아 들었다.
저번에 골렘들에게 들려 줬던 심연어의 척추 뼈였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마법서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자, 그 순간 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
파아앗!
<물고기>
오늘따라 생선이 너무 먹고 싶어.
물고기가 물 밖에서도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긴 너무 어둡고 깊어서 물고기를 키우지 못해 아쉬워.
그런데 바다에 사는 물고기 중에는 무지무지 큰 생선이 있다더라.
한 입만 먹어 보고 싶다.
“……심연어?”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그의 표정이 굳어 가고 있었다.
물 밖에서 사는 물고기.
어둡고 깊은 곳에서 키워지는 물고기.
그리고 바다에 사는 무지 큰 생선.
‘이걸 다 합치면 그냥 심연어잖아?’
기분이 오싹했다.
아무래도 이 일기를 쓴 사람은 심연어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마치 심연어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도 같았다.
[뭔데요? 혼자만 놀지 말고 나도 좀 같이 보자고요.]
토끼가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마법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덩달아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정다운과 눈을 마주쳤다.
[이, 이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임?]
“……아무래도 우리가 지금 던전 괴물들의 탄생 설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와, 이거 진짜 누가 쓴 거지!?]
토끼는 소름이 돋았다.
던전 감자도, 괴물 쥐도, 심연어도.
이 일기장 내용대로라면 처음에는 모두 평범한 감자와 쥐, 그리고 물고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글귀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현재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던 괴물들의 모습들이 직관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걸 대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정다운이 정색하며 말했다.
“야. 이 마녀 어디 있어? 당장 찾아와.”
이쯤 되면 던전을 만든 게 종말의 용이 아니라 마녀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던전에 끌려온 것조차!
그럼 마녀의 존재를 찾아내면 이 던전을 탈출할 방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스테이지를 무작정 깨 나가는 것보다?
[찾아봤자 헛일이다. 마녀들은 이미 오래 전에 멸종했으니까. 아니, 이 세상 전체가 종말을 맞이했지.]
정다운은 담담하게 말하는 루갈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봤다.
“루갈, 너 아는 대로 불어.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마법서 사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부터가 수상했다.
하지만 루갈은 씁쓸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게 별로 없다. 토끼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도우미가 되면서 많은 기억이 소실되었으니까.]
“와, 핑계 봐라? 이 타이밍에 갑자기 기억상실증 타령이라고?”
[사실인 것을 어쩌란 말인가. 본래 우리 도우미들은 종말을 맞이한 세상을 떠도는 지박령과 같은 존재다. 순리를 역행했는데 기억이 멀쩡히 남아 있는 것도 이상하지.]
루갈의 시선이 문득 토끼에게로 향했다.
인자한 눈빛이었지만 그 내면에선 끓어오르는 질투가 느껴졌다.
[늘 생각한다. 차라리 토끼처럼 깔끔하게 잊어버릴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애매하게 잊힌 기억의 잔향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터인데…….]
[헤에?]
세상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토끼가 너무나 부러웠다.
정다운이 다그쳐 물었다.
“도우미의 사정 같은 건 모르겠고, 그래서 기억나는 건 어디까지인데?”
[이 글씨체가 최후의 마녀가 쓰던 필체라는 건 확실하다. 이렇게 일상적인 내용을 룬 문자로 쓴다는 건 어지간한 재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니까.]
“최후의 마녀라는 건 검은 여왕이지?”
[그렇다.]
“아니, 그 마녀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여기저기서 자꾸 나와?”
그 말에 대답한 이는 따로 있었다.
[그분은 그저…… 불쌍한 소녀였나이다.]
“……?”
고개를 돌려 보니 뒤에서 마침 마녀의 하인이었던 리치 바하무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하무트는 침통한 목소리였다.
[전 주인님은…… 수많은 희생 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이자 최후의 마녀. 제국의 추적을 피해 평생을 깊은 땅 속에 숨어서 살다 외롭게 죽어 간, 우리의 찬란하신 여왕이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