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71화>
* * *
“뽀뀨?”
뽀뀨는 앞에 놓인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과 꼭 빼닮은 땅다람쥐가 하얀 페이지 위에 그려져 있었다.
몸은 동글동글.
꼬리는 복슬복슬.
정다운이 그린 낙서다.
“자, 이거 봐라? 이거 너야.”
정다운은 짓궂은 표정으로 빈 마법서의 다음 장을 넘겼다.
팔락-
“뀨?”
뽀뀨가 귀를 쫑긋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 장에도 땅다람쥐가 그려져 있었다.
자세만 조금 다를 뿐, 똑같이 생긴 그림이었다.
그가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팔락, 팔락, 팔락.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동작이 야금야금 달라졌다.
궁둥이를 씰룩거리고 이쪽저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작이다.
“뀨우? 뀨우?”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뽀뀨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그림을 따라 자신도 궁둥이를 씰룩였다.
정다운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얍.”
파라라라락-!
갑자기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기 시작했다.
“뀨잇!?”
뽀뀨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폴짝 뛰었다.
땅다람쥐 그림이 갑자기 폴짝 뛰어 오르더니 앞으로 신나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뛰다 점프!
옆으로 뛰다 점프!
그러다 발라당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점프!
“……!”
뽀뀨는 완전히 몰입해 버렸다.
귀를 연신 쫑긋거리며 꼬리로 팡팡 바닥을 때린다.
그리고 동시에 그림의 발재간 장단에 맞춰서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푸히히! 얘 지금 자기가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바보다, 바보!]
토끼가 배를 잡고 자지러졌다.
종이에 그냥 끄적끄적 낙서를 했을 뿐인데, 그 낙서가 실제 살아 움직이니까 너무 신기했다.
[히히. 이거 대박이네요. 그림이 살아난 것 같아요! 마법 같음!]
“훗, 이게 뭐 별거라고 호들갑은.”
말과는 다르게 정다운의 입꼬리는 한없이 우쭐거렸다.
틀어박혀서 열심히 낙서한 보람이 있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할 일 없는 백수처럼 낙서나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정다운 혼자만 빼고 모두가 바쁜 상황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선 그가 시킨 대로 참가자들이 13명씩 조를 이루어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임무들을 다하고 있었다.
성벽 밖으로 사냥을 나가 스킬을 발전시키고 있는 1조.
그렇게 잡아 온 괴물들의 사체를 앞에 두고 열심히 도축을 배우는 2조.
그리고 농사를 하기 위해 땀을 뚝뚝 흘리며 밭을 갈고 그곳에 도축하고 나온 뼛가루와 핏물을 추출해 비료로 뿌리는 3조.
그들은 하루 간격으로 서로 순서를 바꿔 가며 정다운에게 잡일을 배웠고, 때아닌 노가다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 정다운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어 졌다.
정확한 시범은 그림자 하인들에게 맡겼고, 정확한 교본은 빈 마법서 한 페이지를 찢어 거기에 농사법을 적어 각 조장들에게 넘겨 준 것이다.
그러자 그가 할 일이라곤 결국 동네 아저씨처럼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잔소리만 툭툭 던지는 게 전부였다.
나중엔 그것조차 토끼가 훨씬 잘 했다.
[와, 님들 진짜 똥손이네요.]
움찔.
[아니, 도축을 하라 했더니 왜 난도질을 하고 계시지? 무차별 연쇄살인마임? 시범 보면서 똑같이 따라하는 것도 못함?]
“죄, 죄송합니다…….”
[피 튀는 것 봐. 핏물이 제대로 안 빠지면 먹을 때 비리다니까요? 아니지, 제물로써의 가치도 떨어진다니까요?]
“죄송합니다…….”
[으잉? 왜 나한테 죄송해요? 차라리 이 흉측하게 난도질당한 괴물들한테 미안하다 하셈. 죽은 것도 서러운데 고인 능욕임.]
“죄, 죄송…….”
[죄송하면 잘하든가요.]
“…….”
꼰대 토끼의 지적질에 점점 주눅이 들어가는 참가자들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도축을 제대로 못하면 아무리 사냥을 해와도 식량이 부족해진다.
괜히 해체하다가 내장을 건드려서 담즙이나 독액이라도 터져 버리면 맛도 못보고 다 버려야 했다.
차라리 목숨 걸고 괴물들과 싸우라고 하면 하겠는데, 그걸 섬세하게 해체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재능의 영역이었다.
“끄응. 이게 좀처럼 안 되네……. 시범을 보여 줘도 잘 안 되니 원.”
“그러게. 차라리 목숨 걸고 사냥을 하라면 하겠는데 도축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다니…….”
그들이 울상을 짓자 꼰대 토끼가 다시 등장했다.
[떽! 약한 소리 마셈! 아무리 어려워도 먹고살려면 해야죠. 다 님들 좋으라고 가르쳐 주는 거임.]
결국 지나가던 정다운이 꼰대 토끼의 뒤통수를 꽁 때렸다.
[아얏! 왜 때려요?]
“야, 말 좀 이쁘게 안 할래? 자기도 직접 해 보라면 못할 거면서 뚫린 입이라고 막 말하고 있네?”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생산직들이 다 죽었으니, 이 사람들은 도축도 요리도 직접 다 해내지 못하면 괴물한테 죽기 전에 먼저 굶어 죽을걸요?]
그들의 대화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참가자들은 더욱 죄인이 된 기분으로 열심히 도축을 배웠다.
‘도, 도와줄 때 잘하자…….’
의도하진 않았지만, 토끼의 채찍과 정다운의 당근이 조화롭게 그들을 조련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알게 모르게 그들 사이에서 정다운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참 감사한 분이야.’
‘그러게. 막말로 이런 걸 어디서 누가 가르쳐 주겠어?’
‘그런데 뭐 하는 분일까……?’
정다운은 자신을 간단하게 선배 참가자라고 소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설명 안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던전 초짜인 그들은 워낙 아는 게 없다 보니 그가 어떤 식으로 이상한지 분간할 수 있는 눈이 아직 없었다.
그저 어미 새를 처음 본 아기 새들처럼 시키는 대로 따를 뿐.
그렇다고 또 친근하게 그에게 다가가기는 무서웠다.
바로 그의 곁을 따라다니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 때문이었다.
성질 더러운 토끼라든가 가끔 나타나는 무섭게 생긴 늑대인간이라든가.
아니, 다 거론할 필요도 없고 딱 잘라 말해 골렘들이 제일 무서웠다.
두꺼운 철갑으로 몸을 둘러싸고, 몸에는 시뻘건 불길(온돌)을 품고 있는 정체불명의 거인들.
그들을 마음껏 부려 먹는 정다운은 겉으로만 선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위험한 마왕을 보는 것 같았다.
당사자 입장에선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가, 감자다! 감자가 났어요!”
마침 농사 팀 쪽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우와아! 진짜다! 벌써 감자가 나오다니!”
“식량이다!”
다리를 휘감아 오는 감자 줄기를 뚫고 들어가 첫 수확한 굵은 알감자를 치켜 올리는 농사 팀들에게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알파가 흐뭇한 마음으로 말했다.
<원래 첫 농작물은 기념으로 전부 제물로 바치는 게 미덕입니다.>
“……?”
<신선한 농작물이로군요.>
“…….”
바로 시무룩해진 참가자들이었다.
정다운은 게이트를 신전 제단 위의 워프 게이트로 바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이 감자를 수확하는 족족 게이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참가자들은 꿀꺽 꿀꺽 사라져가는 감자들을 헤어진 연인 보듯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 뒤에서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서를 펼쳐 자신에겐 쓸모없지만 참가자들에겐 빅뉴스들을 꼼꼼히 정리해 나갔다.
“흠. 정화 안 된 뼛가루와 괴물의 피를 병행하면 속도가 2배쯤이구나.”
본래라면 던전 감자의 수확 기간은 약 2주.
그런데 그게 거의 1주일로 단축되는 기염을 토했다.
정확한 계산법은 아니었지만, 괴물의 피를 뿌리면 농사 속도가 약 1.5배쯤 오르고 거기에 뼛가루까지 뿌리면 2배까지 빨라지는 것 같았다.
물론 여기서 만약 뼛가루를 정화해서 뿌렸다면 그 속도와 생산량은 두 배 이상 차이가 날 것이다.
“정화 스킬이 없이도 이 정도 효과라니. 제법 쓸 만한데?”
[그러게요. 일반적인 참가자들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되겠어요. 아무리 던전 감자가 빨리 자라는 편이라 해도, 보통은 2주 동안이나 한 장소에 머물러 농사할 상황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정보까지는 아니다.]
루갈이 옆으로 나타나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나중 되면 생산직들 중에서도 몇몇이 스스로 깨우치게 되는 농사법이다. 하지만 이걸 스테이지-1에서부터 알게 되었으니 장기적으로는 좋겠군.]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땅으로 내려서는 루갈을 보며 정다운이 황당하게 물었다.
“너 또 왔냐?”
[퇴근했다.]
“너 그러다 짤려도 난 모른다?”
[그것 참 우스운 말이군. 나 같은 성실한 도우미가 잘린다고? 지나가던 토끼가 다 웃겠군.]
[흥. 하나도 안 웃김.]
괜히 발끈하는 토끼.
토끼야말로 진짜로 잘려 본 경험이 있었다.
정다운은 피식 웃으며 첫 수확물들을 다 제물로 바치고 허탈해진 참가자들에게 다가갔다.
이제야말로 그가 나설 차례였다.
“자, 여기까지가 딱 정석적인 방법을 배웠으니, 이제부턴 편법을 좀 씁시다. 제물도 슬슬 바쳐야 하니까요.”
“……?”
“위험하니까 뒤에서 구경만 하세요.”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뒤로 물리며 감자밭으로 다가가는 정다운.
그가 꺼낸 건 바로 쥐똥 비료였다.
그냥 뼛가루가 2배.
정화한 뼛가루가 거기서 또 2배라면.
쥐똥 비료는 최소 30배였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그런데, 문제는 그냥 고추 농사라면 몰라도,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던전 감자에게 적용해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됐다.
본격적으로 혼자서 비료를 뿌리고 땅을 갈아엎기 시작하는 정다운.
동시에 씨감자도 척척 뿌리는 모습이 거의 스킬을 보는 것처럼 능숙하고 숙련된 동작이었다.
파바바밧!
“오오…….”
“빠르다!”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직접 힘들게 농사를 지어 본 입장에선 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처럼 빨랐다.
“휴, 끝.”
“……벌써!?”
잠시 후, 손을 탁탁 털고 감자 밭에서 걸어 나오는 정다운의 등 뒤에선 후광까지 비쳤다.
마치 100 대 1로 괴물들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오는 역전의 용사 같았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진짜 괴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물스물, 쿠와악!
던전 감자가 벌써부터 싹을 틔우고 꿈틀거리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마치 화분을 10배 속으로, 아니 30배속으로 빠르게 재생한 것처럼!
그리고 그 바로 앞에 보이는 정다운을 향해 위험한 촉수를 뻗었다!
휘와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위, 위험합니다!”
“함정 설치.”
[함정을 설치합니다.]
그러자 순간 우뚝 움직임을 멈추는 던전 감자들.
그걸 보며 알파가 한 소리했다.
<함정 설치에는 생명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제물을 모으기 위해 농사를 짓는 건데, 그걸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시면 어떡합니까?>
“……아?”
<…….>
알파가 문자를 부들부들 떨었다.
“끄응. 너무 기분을 내 버렸네. 그나마 밭의 한 귀퉁이에만 스킬을 걸어서 다행이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휘둥그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흠흠. 아무튼 이 비료는 아무데서나 구할 수 없는 귀한 거라 이번에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자, 농사 시작!”
사람들에게 쥐똥 비료를 나눠주고 그는 다시 뒤로 빠졌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마법서를 꺼내 들었는데, 그 내용이 뭔가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어? 내가 이런 걸 썼던가?”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감자>
감자는 참 맛있고 동글동글 귀여운 것 같아!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키워서 먹다니! 인간은 참 나쁜 것 같아.
나도 그렇고…….
만약에 감자가 동물처럼 살아 움직일 수 있다면, 분명 나부터 먼저 혼내 주러 오겠지?
자기 좀 잡아 먹지 말라고 내 손과 발을 꽁꽁 묶어 버리고 말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
“……뭐야, 이건?”
어째서인지 마법서의 내용이 변해 있었다.
마치 작은 소녀가 쓰기라도 한 듯이 귀엽고 동글거리는 필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