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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69)화 (169/393)

<던전리셋 169화>

*   *   *

알파가 던전의 이름을 굳이 토끼 던전이라 지은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 이 던전은 토끼 님이 관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원래 하던 일이니까 익숙하지?”

[후우. 결국 이렇게 되나…….]

토끼도 바라던 바였다.

녀석은 아련한 표정으로 유적지의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후후, 보았느냐? 우여곡절 끝에 쫓겨난 왕이 결국 귀환했도다. 이제 모든 이들이 내 발 앞에 엎드려 발발 떨 것…….]

“응, 엎드려-.”

[흥. 기분 좀 내 보겠다는데 굳이 초를 치시네.]

토끼는 코웃음을 치며 주섬주섬 바닥에 엎드렸다.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네? 한 발 들어. 두 발 들어. 물구나무서기.”

[아, 잘못했다고요! 그래도 나 정도면 도우미치고는 제법 친절한 편 아니었음? 바분 봤잖아요! 바분이 관리하던 스테이지-2에서 초죽음당하지 않으려면 여기서 최대한 굴려야 했다니까요? 낑낑…….]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와중에도 순순히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토끼였다.

귀가 파들파들 떨렸다.

정다운은 이참에 자신의 뜻을 확실히 정했다.

“알아 둬. 이제 내가 이 던전을 인수했으니, 앞으로 여기에선 사람이 가급적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뭔 개똥 같은 소리임? 사람은 어차피 죽어요. 늙어 죽든 병들어 죽든, 괴물에 물려 죽든 함정에 빠져 죽든, 매한가지라고요. 낑낑.]

“그러니까 적어도 괴물에게 죽진 않게 하자는 거지.”

[얼씨구? 뻘소리 한번 이상적으로 하시네. 무슨 착한 사람 증후군임? 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렇게 곱게 키웠다간, 어차피 루갈의 스테이지로 넘어가면 바로 전멸당할걸요?]

“뭘 모르는 건 너야.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보면 언젠간 결국 성장하게 되어 있어. 나 보면 몰라?”

[…….]

정다운이 자신을 가리키자, 토끼의 입이 바로 다물어졌다.

그렇게 강해진 인간이 바로 여기 있었다.

처음엔 누구보다 약했지만, 끈덕지게 살아남아 발버둥치다 보니 어느새 훌쩍 성장해 버린 대표적인 케이스.

같은 말이라도 정다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그래도 애초에 괴물들은 관리자의 말을 듣는 놈들이 아니라고요.]

[맞는 말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루갈이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던전의 괴물들을 어떻게 관리할 셈이지?]

아무리 관리자라도 괴물들을 통제할 권한은 없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보지만, 이쪽에서 먼저 자극하면 괴물들도 관리자에게 적의를 갖고 덤벼드는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비선공몹’.

괴물들은 던전의 관리자들을 ‘유령’이나 ‘투명 인간’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정다운도 물론 그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동물들이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최소한 식물들은 통제할 방법이 있잖아?”

정다운의 뜻을 알파가 눈치챘다.

<함정 설치 스킬을 쓰실 생각이군요.>

“맞아. 괴물 식물들을 전부 함정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수준만큼만 공격하게 하면 난이도가 좀 떨어지지 않겠어?”

토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던전에 있는 식물들을 전부요? 그거 엄청 과소비일 텐데요?]

“문제없어. 초반 인테리어비가 많이 들어가서 부담될 수는 있는데, 한번 세팅해 두면 계속 리셋될 거 아냐?”

알파는 의외로 반대하지 않았다.

<전 찬성입니다. 적진을 빼앗았는데,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면 당연히 함정들로 도배를 해야겠지요. 다만 리셋하는 데도 생명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소모될 겁니다.>

“그건 원래 사람들한테 마력 뽑아내서 리셋하는 것 아니었어?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정다운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종말의 용은 피와 죽음을 제물로 받는다.

하지만 생명의 용은 반대였다.

“알파, 제물로 정확히 뭘 바치면 된다는 거지?”

<에르테아 님이 선호하시는 제물은 갓 수확한 신선한 농작물이 가장 으뜸이며, 그 다음은 핏기가 빠진 짐승입니다.>

“피는 왜? 피에도 생명 에너지 있잖아?”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괴물의 피는 가장 불결합니다. 물론 피를 굳이 빼지 않아도 제물은 받아 주십니다만, 피를 빼면 에너지 순도가 조금 더 좋아집니다.>

정다운도 이 사실은 처음 들은 사실이었다.

알파도 굳이 알려 주지 않은 것은 그동안은 워낙 궁핍해서 한 푼 두 푼이 아쉬운 판이었던 터라, 닥치는 대로 제물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르테아가 이제 본격적으로 재생을 시작했으니, 제물의 순도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거, 편식도 심하시네.]

<토끼님, 지금 물구나무 서는 중 아니었습니까?>

[낑.]

괜히 한마디 끼어들었다가 다시 몸을 숙이는 토끼였다.

“자, 그럼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결론은 신선한 농작물과 잘 도축한 고기를 좋아한다는 거지? 앞으로는 참가자들이 제물을 바쳐야 던전의 난이도가 내려갈 거야.”

정다운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생산직들이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   *   *

스테이지-1이 엉망진창이라는 루갈의 말은 사실이었다.

참가자들은 도우미가 없으니 숲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중엔 유적지를 찾아내는 노하우도 생기겠지만, 아직 그들에겐 무리였다.

그러다 보니 결국 제한 시간이 지나 괴물 쥐 떼가 득실득실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깜짝 놀라 팀이고 뭐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다니느라 각개격파당하고 있었다.

[진짜 전멸각이네요.]

“얼른 시작하자.”

긴박한 상황이었건만, 겉보기엔 하나도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정다운과 토끼는 괴물 쥐 떼 옆을 한가로이 거닐며 괴물 식물들을 함정으로 바꿔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협은 하되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로 공격하지는 못하게 명령했다.

던전 감자, 물엿꽃…….

그 외에도 사람들을 공격하는 위험한 식물들은 여기저기 많았다.

먹을 수 없어서 관심이 없을 뿐.

특히나 물엿꽃 같은 경우엔 악어 같은 입으로 인간들을 집어삼키기만 할 뿐, 안에서 소화액은 만들지 않고 그냥 물고만 있게 했다.

이 얼마나 안전한가!

“함정 설치, 함정 설치.”

괴물 식물들은 관리자가 된 그를 다가오거나 말거나 본체만체했다.

괴물 쥐들도 철저히 그를 무시하고 옆으로 지나갔다.

부딪힐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피해 갔다.

털끝 하나 스치기 싫은 것 같았다.

정다운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건 이것대로 좀 서운한데.”

[왕따 당하는 기분이죠?]

“네가 왜 말이 많아졌는지 알 것 같다.”

그는 안쓰럽게 토끼를 쳐다봤다.

하지만 오해였다.

[허튼소리. 토끼는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루갈이 옆에 나타나 진실을 고했다.

“너 아직 안 갔냐?”

[아직 퇴근 중이다.]

“언제 출근하게?”

[이것만 마저 보고 가겠다. 너희들이 어떻게 이 던전을 세팅하는 지 궁금하군.]

루갈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정다운은 열심히 괴물 식물들을 함정으로 바꿔 나갔다.

그런데 열심히라고 해 봤자, 멀리서 보면 그의 모습은 공원을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며 화단이나 구경하는 한가로운 인생처럼 보였다.

옆에서는 피를 토하며 세상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자기 혼자만 한량이 따로 없었다.

이 난리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에 자연히 근처를 뛰어다니던 참가자들의 눈이 그를 발견했다.

“헉? 저, 저기는 안전한가 보다!”

“저쪽으론 괴물들이 가지 않는다! 이쪽이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우르르!

사람들 한 무리가 정다운이 있는 곳으로 필사적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정다운도 당황하며 필사적으로 두 팔을 흔들었다.

“어? 오지 마! 오지 마요! 여기 아니야! 이쪽 아니라고!”

“저기다!”

“저쪽이 안전한가 봐!”

“말 좀 들어!”

말이 안 통했다!

오히려 그가 팔을 흔드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빨리 달려오라고 하는 손짓으로 보였다.

그러다 지나가던 괴물 늑대들이 입을 쫙 벌렸다.

“크와앙!”

“헉!? 여기도 위험하다!”

사람들이 기겁하며 다시 우르르 도망쳤다.

그러면서 원망스런 눈길로 정다운을 한 번 쳐다봤다.

괜히 민망했다.

“아니, 그러게 내가 여기 아니라니까…….”

이후로도 같은 패턴은 수도 없이 반복됐다.

“저기다! 저기가 안전한가 봐!”

“아니라고!”

“저기다! 저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립시다!”

우르르!

“아니라니까! 말 좀 들으라고!”

“크와앙!”

“젠장! 아닌가 보다! 튀어!”

우르르!

“……거참.”

계속 반복됐다.

“저기다!”

“아니라고!”

계속 계속.

“저기다!”

“말 좀 들어!”

끊임없이 반복됐다.

보다 못한 토끼와 루갈이 서로 흩어져 참가자들에게 유적지가 있는 방향을 알려 주며 다녔지만, 그래도 정다운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사람은 끊임없이 생겨났다.

“이 와중에 사람들 왜 이렇게 많아?”

[그 사이에 참가자들이 한 번 더 소환됐었나 봐요! 중복 소환임! 도우미가 사라지면서 참가자들이 자동으로 소환됐나 봄!]

“바분 진짜 일 못하네!”

이제 와서 죽은 도우미를 욕해 봤자 소용없었다.

애초에 그가 안 죽였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계속 함정 설치 스킬을 쓰다 보니 결국 생명 에너지가 바닥나 버렸다.

<제물을 더 바치셔야 합니다.>

“식량을 쓰긴 아깝고, 현지 조달하자.”

상황상 괴물 식물을 제물로 바치는 건 맞지 않아서, 자연히 옆을 지나가는 괴물들에게로 시선이 갔다.

“괴물들 좀 잡아와.”

니야앙!

골렘들까지 불렀다간 가뜩이나 공포에 질린 참가자들이 더 놀랄까봐 그림자 하인들을 시켰다.

푹! 푹푹!

그림자 하인들은 정다운의 스킬이나 마찬가지라 괴물들이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림자 하인들은 전혀 공격을 받지 않고 괴물들을 척척 잡아 왔다.

그 모습을 또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 달려왔다.

“이쪽이다! 이쪽 괴물들이 좀 더 약한가 봐!”

“그렇구나! 제대로 덤비지도 못하고 한 방에 죽는다!”

우르르!

“크와앙!”

“아, 아니다! 뒤로 빠져!”

“이쪽도 위험합니다!”

또 우르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선 진짜 죽을 맛이었다.

목숨을 걸고 개그를 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정다운은 웃지도 못하고 괜히 미안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일일이 누굴 도와주자니 그게 더 비효율적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도와줬지만, 애초에 자신은 괴물 식물들만 찾아다니며 이동 중이라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더 위험했다.

이 넓은 숲에 뿔뿔이 흩어진 참가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도와주는 것보단 최대한 빨리 괴물 식물들을 약하게 만드는 게 그들을 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또 아니었다.

캬아웁!

“끄아악!”

[어? 약화된 물엿꽃이 사람 하나를 삼켰는데요?]

“괜찮아. 저거 그냥 물고만 있는 거라, 금방 나올 수 있어.”

쫘아악!

그 말과 함께 물엿꽃의 옆이 반으로 갈라지며 참가자가 탈출했다.

“휴, 살았다…….”

참가자는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몸에는 찐득한 물엿이 가득 묻어서 움직임이 불편했지만, 다친 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몹시 위험한 소리가 들려왔다.

왜애앵-!

“……!”

괴물 꿀벌이었다.

그것도 수십 마리!

“으아악!”

물엿꽃의 당도는 괴물 꿀벌이 가장 좋아하는 별미.

평소에는 그걸 먹기 위해서 물엿꽃 안으로 기어 들어가 스스로 물엿꽃의 밥이 되어 버리는 비운의 괴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신나 보였다.

“으아아악! 살려 줘!”

“이쪽으로 오지 마! 우리까지 말려든다고!”

사방팔방 괴물 꿀벌 떼에게 쫓겨 다니는 참가자들.

그 난리통 한가운데서 자기만 안전하게 서 있는 정다운.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난이도 내린다면서요?]

“…….”

게임 밸런스 잡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바하무트까지 불러냈다.

바하무트가 이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

[오오! 역시 우리 주인님이시다! 버러지들을 위한 지옥을 만들고 계시는구나!]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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