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68화>
* * *
스테이지-1에 루갈이 도착한 건 한참 후였다.
루갈은 무심한 표정으로 보스룸 한가운데서 정다운을 기다렸다.
그 뒤엔 이번에 생성된 최종보스 골렘이 우두커니 서서 그 위압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압적?
사실 그건 옛날 얘기였다.
정다운에게 이 유적지는 그냥 골렘 자판기가 된 지 오래였다.
“어흠, 여봐라!”
[에헴, 게 아무도 없느냐!]
정다운과 토끼는 보스룸까지 오는 내내 거의 조선시대 양반처럼 뒷짐을 지고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왔다.
당연히 그들 앞으로 외뿔 멧돼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크워어!”
앞장서 걷고 있던 든든한 머슴 11호 오거 골렘이 무한한 체력과 터프한 힘으로 놈들을 몸으로 막아 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3명의 그림자 하인들이 저마다 다양한 무기를 들고 놈들을 사정없이 잡아 죽였다.
그 구성이 참으로 완벽했다.
활을 든 그림자 궁수는 원거리.
창을 든 그림자 창병은 중거리.
식칼을 든 그림자 요리사는 단거리.
심지어 들고 있는 아이템도 엄청났다.
궁수가 날리는 화살들은 저마다 마비독이 발라져 있었고, 창에는 관통력 강화 옵션이, 식칼은 도살자의 칼이었으니 말이다.
보스룸에 도착한 정다운이 중얼거렸다.
“왠지 감개가 무량하네.”
[앗, 내가 먼저 말할라 했는데!]
그렇다. 오늘은 무척 뜻깊은 날이었다.
오늘 골렘 하나를 더 얻으면, 정다운은 딱 12기의 골렘들을 모으게 된다.
골렘 12기!
그게 무슨 의미일까?
땅속에 낙오되어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불쌍한 생산직이 정처 없는 여행을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땅속에 갇혀 있던 세월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세월을 고통(?)받아 온 정다운.
그랬던 그가 오늘 드디어 이곳에 금의환향을 하고 말았다.
바로 이 신전을 인수하기 위해서!
[크흑! 기분이 최고임. 설마 내가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이야.]
토끼야말로 할 말이 많았다.
드라마로 치면 오늘이 바로 클라이맥스일 것이다.
평생을 몸 바쳤던 회사에서 맨몸으로 쫓겨나 영세한 라이벌 회사에 영입되었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자신을 쫓아냈던 그 회사를 본인이 인수하러 오게 된 것이다!
감개가 무량하다는 말은 사실 토끼에게 더 어울렸다.
[에헴! 이리 오너라!]
벌컥!
무슨 암행어사라도 출두할 기세로 보스룸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최종보스 골렘이 눈을 번뜩였다.
“크워어!”
“반갑다! 막내야!”
정다운은 거의 잃어버린 가족과 재회한 것처럼 반갑게 두 팔을 벌렸다.
기념으로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직접 상대하기로 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1분간 신체 능력을 올리고.
“개미 더듬이.”
10초간 감각을 올리고.
“크워어!”
쿵쾅, 쿵쾅!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골렘을 향해 자신도 용감하게 맞서 달려간다!
파박!
그가 뛰었다!
‘일단 균형을 무너뜨리고!’
처처척!
골렘의 코앞까지 달려가 잽싸게 그 발밑에 시멘트 반죽을 떨군다.
푸우욱! 기우뚱!
“크워!?”
시멘트를 밟고 몸을 허우적거리는 골렘!
순간적으로 거대한 껌이라도 밟은 듯 끈적한 시멘트가 놈의 한쪽 다리를 절게 했다.
그 순간 정다운이 그 가랑이 사이로 미끄러지듯 태클해서 등 뒤로 빠져나갔다.
예민해진 감각이 그 아슬아슬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 줬다.
촤아악!
그리고 미끄러지면서 동시에 시멘트를 밟지 않은 반대쪽 뒤꿈치를 손으로 잡아챘다.
“흙 뭉치기!”
콰직!
인간으로 치면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부위에 동그란 구멍이 파였다.
“크워어!”
쿠르릉!
결국 균형이 무너지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 최종보스.
그러자 그 바로 앞에는 어느새 정다운이 다가와 활짝 웃고 있었다.
“어서 와, 막내야.”
콰직!
막내의 핵을 뽑아냈다.
여기까지가 딱 10초.
개미 더듬이로 인해 예민해진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놀랍군. 고작 10초 만에 골렘을 잡다니.]
전투를 지켜보던 루갈은 정다운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스킬의 상성도 상성이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세련된 전투였다.
특히나 골렘의 뒤꿈치를 뜯어낸 부위가 실로 절묘했다.
몇 톤이나 되는 골렘의 무게 중심을 무너뜨리기에 딱 적당한 위치를 찾아 공격한 것이다.
토끼와 정다운은 서로 주먹을 마주치며 흐뭇한 대화를 나눴다.
[제법인데요? 지금까지 중에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였음.]
“훗. 내가 쫌 하지.”
[인정 인정. 이번엔 인정하겠음!]
오늘따라 칭찬이 후한 암행어사 토끼였다.
자, 이제 이 망할 회사를 인수할 차례였다.
[다 끝났으면 이쪽으로 오도록.]
[넹!]
루갈이 그들을 이끈 장소는 본래 제단이 있던 위치였다.
[여기에 제단을 내려놓아라.]
“알겠어.”
정다운은 멀리 갈 것 없이 방금 쓰러뜨린 골렘에게 핵을 돌려주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번쩍!
“크워어!”
처음엔 다리를 절뚝거렸지만 점점 회복되었다.
거기에 오거 골렘까지 합세해서 가져온 제단을 마주 들게 했다.
황금빛 구슬이 떠 있는 생명의 제단이었다.
“자, 여기 내려놔. 조심조심.”
“크우우…….”
쿠웅-!
제단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루갈이 말했다.
[인수 방법은 어렵지 않다. 본래라면 이곳을 담당하던 도우미에게 직접 인계를 받았어야 했겠지만, 도우미가 죽었으니 일은 간단하다. 일단 산 제물을 바쳐라.]
“산 제물?”
[그렇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제단 위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면 된다.]
그런데 알파가 반대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직접 피를 보는 것은 종말의 용이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신선한 농작물을 바쳐도 됩니다.>
“농작물? 고추도 돼?”
<물론입니다. 신선할수록 좋습니다.>
어차피 소지품 안에 있으면 신선도가 떨어지진 않는다.
정다운은 최근에 잔뜩 수확한 던전 고추를 제단 위에 수북하게 쌓았다.
그리고 뒤로 나와서 보니 플레이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 감자도 좀 쌓아 볼까?”
고추 옆에 감자도 몇 알 내려 놓았다.
“흠, 미역도 좀…….”
[왜 자꾸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는 거임? 응? 아니, 이 양반이 장난하나!]
보다 못한 토끼가 버럭 했다.
제단 위에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고추로 된 빨간 머리카락과 빨간 눈썹이 삐죽삐죽.
감자로는 얼굴 색깔을 빼곡히 색칠하고.
그 위에 기다란 미역줄기로 이목구비를 그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음? 징그럽잖아요!]
<불경합니다!>
“하하, 아무튼 제물을 바칩니다.”
<아무튼이라니!>
꿀꺽!
아무튼 제물은 확실히 바쳐졌다.
번쩍!
그 순간 제단에서 황금빛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때 루갈이 무심하게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파앗!
그러자 검은 빛의 작은 마법진들이 그를 둘러쌌다.
<무슨 짓입니까!>
알파의 강력한 경고에도 루갈은 전혀 흔들림 없이 마법진을 다이얼처럼 이리저리 돌리며 대꾸했다.
[걱정 마라. 스테이지-2로 가는 고정 좌표를 새로 기입하는 것뿐이니까. 이곳을 공략하면 그 보상으로 생존자 전체 회복과 함께 워프 게이트가 열리게 수정하는 중이다.]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던전 게임을 유지시키는 데 있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결국 괴물 쥐 떼에게 몰살당하는 것밖에 없다. 오래전…… 이 땅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여기 살던 사람들이라고?”
정다운이 솔깃해서 묻자 루갈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계속 무심하게 마법진을 수정해 나갔다.
[이 땅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때를 추억하며 같은 경험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지.]
“무한 반복? 설마 리셋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 종말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 그게 바로 던전이다.]
루갈의 입에서 던전에 대한 비밀이 흘러나오자 정다운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럼 던전마다 상황이 다른 이유는 설마……?”
[그야 각 지역마다 경험한 ‘종말’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지. 예컨대 이곳은 괴물 쥐들의 이상번식으로, 어떤 곳은 이상 기후로. 또 어떤 지역은 심연의 흑안개가 몰려와 멸망했었다.]
[아니,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그렇게까지 다양하게 멸망했대요?]
[…….]
루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끼를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봄?]
녀석을 바라보며 루갈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 좋겠구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히익? 또 의미심장한 척 오지네! 바분도 그러더니? 대체 내가 뭘 까먹고 있는 건데요? 자꾸 떡밥만 뿌리고 안 알려 주면 노잼이라고요.]
답답한 건 못 참는 토끼가 버럭 화를 내더니, 갑자기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넌지시 물어봤다.
[난 역시…… 마녀의 환생이었던 거임? 그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마녀가 나였던 게 맞죠?]
[뭐? 네가 마녀의 환생이라고?]
그 말에 루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곤 이내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풉, 크하하하! 별 재미있는 농담을 다 들어 보겠구나!]
[아, 아니었음?]
당황하는 토끼.
[크흐흐, 대체 누가 그러더냐! 네가 마녀의 환생이라고. 설마 바분이 그랬을 리는 없고! 크하하!]
정다운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말 안 했어. 누가 그랬냐면, 처음부터 계속 이 녀석 혼자만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지.”
[크하하! 역시 재미난 녀석이구나! 생각머리가 아주 또라이야!]
[…….]
토끼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나는 누군데요? 대체 내가 뭘 기억 못 하는 거냐고요.]
[전부 다! 너는 전부를 기억하지 못한다. 원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음에도.]
[어이쿠야, 말장난 쩌시네? 뚫린 입이라고 그렇게 막말하면, 내가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대모험이라도 떠나야 함?]
발끈하며 노려보는 토끼가 하찮고 귀여워서 루갈은 피식 웃었다.
[크큭, 그럴 필요 없다. 그냥 알려 주마. 너는 마녀의 토끼 인형이었다. 마녀가 어릴 때부터 물고 빨던 꼬질꼬질한 인형이 바로 너의 정체다.]
[……네? 진짜로?]
[그렇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탠 진짜 진실이다.]
[에잇, 젠장! 역시 그거였냐!]
토끼는 좌절했다.
“……풉.”
[어허! 웃지 마요!]
옆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에 휙 고개를 돌려 정다운을 째려보는 토끼였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내가 뭐랬어? 토끼니까 토끼 인형이랬지? 마녀는 개뿔.”
[아니, 뭐 이딴 과거가 다 있어? 내가 토끼 인형이었다니! 오호라? 이제 보니 인형이라서 아무 기억도 없는 거였구만!?]
[크흐흐, 바로 맞췄다. 그게 진실이지.]
토끼는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루갈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귀여운 손주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큰 손을 얹고 토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녀석, 조바심 내지 마라. 네 격이 오를수록 점점 아는 게 많아질 것이다. 비록 인형이었더라도 옆에서 마녀에게 보고 들은 게 많았으니 말이다.]
[퍽이나 위로가 되네요. 그래 봤자 토끼 인형인데. ……알고 보면 혹시 영혼이라도 마녀의 영혼인 건 아니고요?]
[전 주인에게 자꾸 집착하지 마라, 이 또라이야. 넌 지금 섬겨야할 새 주인을 얻었지 않느냐.]
[제길!]
또 한 번 좌절하는 토끼의 모습에 루갈은 피식 웃으며 정다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좌표 기입이 끝났다. 이제 신전의 주인이 영역을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오케이.”
정다운은 제단 위로 손을 올리고 평소 하던 대로 선언했다.
“이곳을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네 번째 신전으로 선포한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번쩍!
제단에서 시작된 황금빛 기운이 보스룸 전체를 훑고 지나가 유적지 밖으로 확산되었다.
스테이지-1 던전 전체에 퍼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 던전은 종말의 용에게서 온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나왔다.
<신전의 영역이 선포되었습니다. 앞으로는 통칭 ‘토끼 신전’으로 명명됩니다.>
<던전의 영역이 선포되었습니다. 통칭 ‘토끼 던전’으로 명명됩니다.>
[아씨! 유치하게 이름으로 장난질이시네! 왜요? 아주 토끼 인형 던전이라고 하시지?]
이제 알파마저 놀리고 있었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 던전의 함정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던전의 괴물들이 관리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먼저 공격하면 적의를 갖게 됩니다.>
<던전에서 발생하는 모든 에너지가 제단으로 모여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