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67화>
* * *
파아앗!
하늘 신전의 제단 위에 황금빛 게이트가 열렸다.
기존의 게이트가 동그란 모양이었다면, 워프 게이트는 빛으로 된 네모난 문이 제단 위에 우뚝 서 있는 형상이었다.
<워프 게이트는 제단 위에서만 열리는 공간의 문입니다.>
“제단 위만? 일반 게이트랑 무슨 차이가 있는데?”
<이제 우리가 보유한 모든 제단에 ‘고정 좌표’가 생겼습니다. 이걸 이용하면 지금처럼 신전이 이동 중이라도 언제든 다른 신전과 게이트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 기능은 원래 용의 사도들이 신전 간에 남는 제물을 서로 주고받는 용도였습니다.>
“아하, 택배구나?”
정다운은 현대인의 감성으로 알파의 설명을 이해했다.
쉽게 말해 ‘고정 좌표’는 집 주소.
제단은 집이라 할 수 있었다.
집집마다 워프 게이트를 열고 주소를 달아 놓는다면, 언제든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 택배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배달부까지 함께 말이다.
“그럼 혹시 배달부, 아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 워프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어?”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건 동료들과의 합류였다.
이쪽은 어차피 일반 게이트로도 잘만 돌아다녔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워프 게이트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같은 던전 안에선 당신의 허가만 있다면 얼마든지 왕래가 가능하나, 던전 밖으로 이탈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쳇.”
그가 혀를 차자 루갈과 토끼가 끼어들었다.
[참가자들은 종말의 용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실제로 그들이 이용하는 게이트가 바로 이것과 같은 제물용 워프 게이트지.]
[맞아요. 님이 그쪽 게이트를 이용 못 하는 상황과 비슷한 거라고요.]
“남의 집으로 가는 택배다, 이거냐……?”
정다운이 실망하는 눈치라 알파가 슬쩍 첨언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면 왕래가 가능합니다.>
솔깃?
“사람이 아니면? 그럼 뭐?”
<앞으로는 용의 사도들과 식량이나 물자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겁니다.>
“오?”
<물론 저쪽에도 제단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만.>
진짜 솔깃한 내용이었다.
“아하, 이제 보니 택배가 아니라 메일로 첨부 파일 보내는 거였구나! 속도도 그렇고!”
아까보다 더 좋은 예시가 떠올랐다.
고정 좌표는 메일 주소.
제단은 노트북.
그리고 워프 게이트는 와이파이 존과 비슷했다.
이제부턴 다른 동료들과 제단을 통해 메일로 첨부 파일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생명의 용 통신사의 혜택이 제법이었다.
귓말은 문자 서비스, 워프 게이트는 메일링 서비스.
“와, 이걸 이용하면 내가 동료들 배고플 때 식량도 보내 줄 수 있고, 동료들이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면 나한테 보내 줄 수도 있겠구나!”
정다운의 큰 깨달음에 토끼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잇, 제발 아이템! 식재료 말고 먼저 아이템부터 받을 생각을 하라고요!]
<제발 부탁입니다. 제물은 받으라고 있는 겁니다. 줄 생각부터 하시다니…….>
“아니, 누구는 쫄쫄 굶고 있는데 쫌생이처럼 나만 꿍쳐 두고 먹으라고? 알파, 너 왜 이렇게 마인드가 치사하고 궁핍하냐? 쓰레기네.”
<…….>
쌀독에서 인심 난다.
부족함 없이 자란 던전의 부르주아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내세우자, 졸지에 혼자만 치사하고 궁핍해진 알파가 투덜거렸다.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만큼 에르테아 님의 힘이 점점 회복된다는 의미고, 또 그만큼 당신에게 돌아가는 혜택도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던 알파가 그에게 이어 말했다.
<워프 게이트도 열렸으니 지금 잠시 대신전에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도우미 루갈은 워프 게이트 이용이 불가하니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길.>
“대신전은 왜?”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 * *
군말 없이 바로 제단을 밟고 올라 워프 게이트를 통과한 정다운.
토끼와 바하무트가 그 뒤를 따랐다.
파아앗!
순식간에 눈앞의 시야가 뒤바뀌었고.
쭈뼛!
“……!”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 커졌다.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언제 이게 이렇게?”
[소름.]
[맙소사……!]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들은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본신.
대신전의 중심에는 언제나처럼 새하얗고 거대한 용의 유골이 바짝 말라붙은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품안에.
두근! 두근!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세밀한 혈관들이 나무뿌리처럼 돋아나 있었다!
“세상에…….”
두근! 두근!
에르테아의 몸 곳곳으로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고 있는 황금빛 혈관들!
두근! 두근!
서로 얽히고설키며 사방으로 자라난 아름답고 찬란한 빛줄기들이 심장 박동처럼 깜빡거리며 생명을 외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드디어 에르테아 님의 재생이 시작되었도다!>
알파는 뿌듯함을 담아 말했다.
정다운은 에르테아에게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대박이다. 네온사인 같아.”
아니, 네온사인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우며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털푸덕!
갑자기 토끼가 그 앞에 네발로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히잉! 에르테아 님! 진짜 살아 계셨군요! 제가 바로 이곳의 관리자……!]
<언제 봤다고 우는 척입니까?>
[헷. 들킴.]
토끼는 군말 없이 바로 뒤로 빠졌다.
하지만 에르테아에게 영혼의 그릇까지 바친 바하무트가 느끼는 감격은 진심이 절절 느껴졌다.
[에르테아시여! 미천한 종이 여기있나이다!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과 영광을 돌리나이다!]
<역시 바람직한 도우미군요. 정다운 님은 기분이 어떠십니까? 당신이 지금껏 꾸역꾸역 바친 제물들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멋있다.”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정다운의 표정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프라모델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마 제물을 바칠수록 점점 완성되는 구조였다니!’
실제 사이즈 공룡 모형을 생일 선물로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어찌나 감격했는지 정다운 어린이의 눈, 코, 입, 전신 모공이 전부 다 활짝 개방됐다.
머릿속까지 뻥! 뚫린 것처럼 소름 끼치게 감동적이고 보람찼다.
그동안 자신이 마지못해 바쳤던 제물들이 이런 소름 끼치게 멋진 결과물을 뽑아낼 줄이야!
이 와중에 뽀뀨는 자기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뀨뀨거리고 있었다.
물론 거들먹거려 봐야 알아봐 주는 이는 없었다.
삐걱삐걱 쳇바퀴를 달려 봐도 아무도 관심 없었다.
뽀뀨는 시무룩했다.
“야, 혹시 이러다 나중에 혈관들 다 생기면? 어떻게 돼? 내장도 생겨? 근육도? 피부도?”
<그렇습니다. 썩어 버린 육신이 모두 새롭게 재생됩니다.>
[‘생존자 전체 회복’처럼요?]
<그렇습니다. 성향만 다를 뿐, 용의 권능은 기본 원리가 같으니까요.>
정다운이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나 앞으로 열심히 제물 모아야겠다. 이거 끝까지 완성하고 싶어졌어.”
<그런 불경스런 말씀을……. 뭐, 됐습니다. 이제라도 의욕이 생기셨다면.>
알파도 만족했다.
정다운은 의욕적으로 소지품을 다시 열었다.
“그럼 이것도 마저 바칠까?”
와르르르!
<……!?>
정다운이 소지품에서 남겨둔 식량들을 더 꺼내기 시작했다.
<설마 아까 거기서 제물이 더 있으셨던 겁니까!?>
[와, 소름! 아까랑 말이 다르시네! 혼자만 먹으려고 이렇게나 많이 꿍쳐 둔 거 봐! 세상 쫌생이! 이 좁쌀영감!]
울컥?
“뭐? 좁쌀영감!? 말이 심하네!”
진짜 울컥한 정다운이었다.
“뭐어? 내가 좁쌀영감이라고? 내가 좁쌀영감이라고!? 아까 내가 좀 남겨 두겠다고 했잖아! 너도 좀 남기라며!”
[누가 이렇게 많이 남기랬냐! 이 좁쌀영감아!]
“그 말 취소해! 하! 내가 뭐? 좁쌀영감이라고? 좁쌀!?”
[취소하긴 개뿔! 이 좁쌀영감탱이! 맨날 구석에서 혼자 꼼질꼼질! 좁쌀영감이 딱이네!]
와르르……!
이 와중에도 식량은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히익? 이게 무슨 조금임? 최소 범독수리 1마리 분은 넘겠네! 이 좁쌀영……!]
“어차피 이걸로도 부족했을 거잖아! 너! 오늘 밥 먹기 싫어!?”
[아뇨, 영감님. 밥 먹고 싶어요.]
토끼는 바로 온순해졌다.
치사하게 밥 가지고 행패 부리는 좁쌀영감은 너무 무서웠다.
[저는 누가 뭐래도 영감님 편입니다.]
살랑살랑.
루갈을 본받아 솜털 같은 꼬리를 필사적으로 흔들어 보는 토끼.
하지만 정다운은 화가 오래갈 기세였다.
“하! 내가 뭐? 좁쌀영감이라고? 내가?”
[…….]
오래갈 기세였다.
* * *
번쩍!
스테이지-1으로 넘어갈 때는 워프 게이트까진 필요 없었다.
사자상 연못가로 넘어갔다.
[어휴, 얘네는 또 왜 이렇게 커졌데요? 왜 자꾸 커짐? 이러다 나중에 심연어처럼 커지는 거 아님?]
토끼가 질색했다.
연못 안에는 처음부터 길러 온 은빛 물고기들이 상어처럼 자라서 퍼덕이고 있었다.
흙 골렘 얻으러 올 때마다 정화한 뼛가루를 모이처럼 솔솔 뿌려 줄 뿐이었는데, 고작 그것 좀 먹었다고 올 때마다 꾸역꾸역 커져 가고 있었다.
[이제 뼛가루 그만 먹여 키우죠? 이젠 좀 무서울 지경이라고요.]
“에이, 귀찮게. 또 연못 키워 줘야겠네.”
[말 겁나 안 들으시네! 그만 좀 주라니까 더 키우려는 거 봐!]
정다운은 투덜거리는 척하지만 눈은 정작 웃고 있었다.
나름 제일 처음부터 키우기 시작한 녀석들 아닌가.
이렇게 무럭무럭 커지면 먹이 주고 키우는 사람 입장에선 큰 보람이 느껴졌다.
모이도 줬다.
이젠 애들이 커져서 뼛가루가 아니라, 큼직한 뼛조각들을 정화시켜 던져 줬다.
“자, 배고팠지? 더 먹어라.”
캬웁! 키야웁!
눈에 불을 켜고 몰려들어 뼛조각들을 집어삼키는 은둥이들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정다운.
“녀석들, 복스럽게도 먹네. 어차피 식용으로 키우는 건데 커질수록 좋은 거 아냐?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루갈이 여기 도착하기 전까지 몇 마리만 잡아가자.”
루갈은 다른 루트를 통해 스테이지-1으로 오고 있었다.
정다운은 그림자 창병들을 불러내 은둥이들 쇠꼬챙이로 은둥이들을 잡게 시켰다.
그러는 동안 자신은 옆에 새로운 구덩이를 파고, 마지막으로 가운데 벽을 허물었다.
촤르륵!
가림막이 사라지자, 연못의 넓이가 2배로 넓어졌다.
이쯤 되니 예전에 아기자기하게 꾸며 놨던 화장실이나 뼈 창고, 침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간이 연못이 되어 있었다.
“와, 여기 무슨 지하 낚시터 같은데?”
[이런 큰 물고기를 어떻게 낚아요? 여기 빠졌다간 목숨 걸고 싸워야 할 판인데.]
<좋은 함정이군요. 여기서 조금만 더 확장한다면, 위에서 추락했을 때 쇠꼬챙이에 찔리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밥이 되겠습니다.>
정다운은 억울했다.
“그런 용도가 아니라고! 내 은둥이들은 착해서 사람을 공격하지 않아!”
그때였다.
캬우웁!
펑!
그림자 하인들이 은둥이들에게 씹어 먹혔다.
펑펑!
다 터져 버렸다.
“……뭐야, 얘네 무서워.”
정다운은 은둥이들에게 정이 떨어졌다.
하지만 맛있으니 됐다.
결국 힘은 강한데 크기가 2미터 밖에 안 되는 오거 골렘을 불러와서 은둥이들을 잡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