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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66)화 (166/393)

<던전리셋 166화>

몸에 정화 스킬을 건다고 몸에 묻은 때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때는 그저 각질일 뿐, 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에 쌓이는 불결한 냄새도 독소가 포함된 냄새라면 사라지겠지만, 그냥 평범한 땀 냄새는 또 그게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결국엔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인데, 역시 제일 좋은 건 그냥 따뜻한 물에 몸을 푸욱 담구고 있는 게 최고라는 말씀.

그러고 나면 전신에 혈액 순환이 잘돼서 전신이 나른해지며 하루 내내 누적된 긴장이 싹 풀어지는 것이다.

물론 너무 자주하면 피부가 건조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던전에 가서 타이밍 잘 맞춰 생존자 전체 회복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첨벙, 첨벙.

“룰루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보송보송해진 몸으로 옷을 챙겨 입는 정다운.

그는 털이 복슬복슬한 가운을 하나 걸치고, 백작가 귀부인처럼 시크하게 턱짓을 하며 집사에게 말했다.

“늘 마시던 걸로.”

[여기 대령했나이다.]

챡!

충직한 집사 바하무트가 미리 시원하게 말아 둔 미숫가루 한 잔을 그의 앞으로 정중히 대령했다.

꼴깍.

“캬아-!”

받아서 한입 쭈욱 들이키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두 눈을 꼬옥 감고 행복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떠는 정다운.

[앉아서 드시지요. 다리 아프십니다.]

바하무트는 또 정중히 그를 괴물 가죽으로 만든 쇼파로 안내했다.

엉덩이를 쑤욱 밀어 넣고 등을 기대자, 그 옆에 미니 바하무트 하나가 입으로 바람을 솔솔 불기 시작했다.

“흐음, 좋군.”

더할 나위 없었다.

몸은 쾌적하고, 선풍기는 시원하며, 옆에서 내리쬐는 태양석의 햇볕은 따사롭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나이다. 주인님이 기쁨은 이 바하무트에겐 행복.]

“자아, 그럼 이제 슬슬 계획을 짜 볼까? 모두 모여 봐.”

그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쇼파에 기댄 체 모두를 앞으로 불렀다.

토끼가 투덜거렸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네요.]

“실제로도 상전 맞잖아?”

[그러네, 젠장!]

그가 바로 이 신전의 주인이었다.

“자, 문제는 스테이지-1으로 돌아갈 방법이야. 열심히 여기까지 왔는데 또 거길 어느 세월에 돌아 가냐는 말이지.”

[그러게요. 여기선 게이트를 열지 못하니, 별수 없이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야 할 텐데요.]

“흐음.”

세월아 네월아 가면 언젠간 도착하겠지만, 당장은 사방에 깔린 범독수리들이 문제였다.

<하늘 신전을 잠깐 허공에 정지시키고 여는 건 가능합니다. 다만 다시 돌아왔을 땐…….>

그들은 사실상 이 정체 불명의 계란섬(?)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다.

섬 밖으로 나가야 신전을 멈출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범독수리들에 의해 신전이 갈가리 찢겨 있을 게 분명했다.

바하무트가 용맹하게 앞으로 나섰다.

[주인님! 그냥 날아가시지요! 주인님께 던전을 바치기 위해서라면 제가 목숨을 걸고 길을 뚫겠나이다! 이미 죽었지만!]

[자기만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아무 말 쩌네.]

서로 아웅다웅하는 가운데 알파가 한 가지 의견을 꺼냈다.

<사실 신전의 권능 중 게이트 스킬을 2레벨로 발전시킨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다운이 단박에 알파의 속셈을 눈치챘다.

“그래서? 제물 좀 바치라고?”

<정확합니다.>

“왜 제물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그동안 모은 걸로도 부족해? 내가 제단을 얼마나 뺏어 왔는데.”

[그때마다 다른 도우미들과 싸우느라 상당한 손실이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얼마나 더 모으면 되는데?”

[정확한 수치로 환산할 수가 없습니다만, 상당한 양이 더 필요합니다. 게이트 스킬은 신전의 관리 스킬 중 가장 고차원의 권능입니다.]

“알았어. 그럼 제물이나 좀 바쳐 볼까?”

던전의 부르주아가 오랜만에 신전에 기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와르르!

<오오! 훌륭합니다!>

크게 흥분한 알파.

소지품 안에 그동안 열심히 쟁여 둔 식량들이 제단 위에 수북하게 쌓여 가기 시작했다.

크고 양질의 것 위주로.

훈제고기, 훈제고기, 생선, 생선.

훈제고기, 훈제고기, 생선, 생선.

고기, 고기, 고기, 고기…….

또 고기, 고기, 고기, 고기…….

심지어 저 생선은 거대한 심연어를 먹기 좋게 잘라 둔 것이라 크기도 컸다.

그 모습에 어디서 굶주린 늑대 한 마리가 꼬리를 파닥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크르릅! 정말 어마어마하군. 이게 진정 일개 개인이 모아 둔 식량이란 말인가?]

“너 아직 안 갔냐? 일 안 바빠?”

[크르륵. 오늘은 퇴근했다. 그보다 슬슬 배가 꺼져 가는데, 제물로 바치기 전에 조금만…….]

“안 돼. 돌아가. 아까 많이 먹었잖아.”

[크룽…….]

단호한 거절에 루갈의 꼬리가 시무룩 아래로 쳐졌다.

그러는 사이 던전 부르주아의 본격적인 기부가 시작되었다.

제물 바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꿀꺽! 꾸울꺽!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꿀꺽! 꿀꺼덕!

쭉쭉 사라져 가는 아까운 식량들.

그걸 보며 발을 동동거리는 토끼와 루갈이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저거 맛있는데…….]

[크릉. 크르릉!]

파닥 파닥.

항상 마력 링거만 꽂고 살던 도우미 출신들이라 식탐이 강했다.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뱃속으로 들어가면 다 사라지는 것들 아닙니까.>

“그러게. 식량이야 언제든 또 구하면 되잖아.”

역시 던전의 부르주아는 통이 컸다.

무릇 식량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정 먹을 게 없으면 바로 농사해서 수확해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부위별로 맛별로 조금씩은 남겨 두고 있는 거죠?]

“당연히 그러고 있지. 이것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잠시 후, 제단이 텅 비자 알파가 물었다.

<더 없으십니까?>

“야, 더는 안 돼. 나도 먹고 살아야지. 얼마나 모자란데?”

<흠. 근처에 있는 괴물로 환산하자면 대충 범독수리 2마리 정도가 부족합니다.>

그 말에 정다운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헐, 아직도? 게이트 스킬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어?”

<초심을 잊지 마십시오. 애초에 정다운 님이 신전의 주인이 되신 이유는 바로 이 게이트 스킬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도 알아. 게이트 스킬이 중요하지.”

이쯤 되니 정다운의 마수가 슬러그 연못까지 뻗어 나갔다.

“저 슬러그들도 바쳐 볼까?”

<별 효과 없을 겁니다. 슬러그는 워낙 생명 에너지가 부족한 개체들입니다. 숫자가 많아지면 귀찮을 뿐 애초에 강한 개체는 아닙니다.>

“에이, 그럼 저건 뒀다가 내가 먹자.”

꾸물렁?

죽을 뻔하다 살아난 슬러그들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놈들의 운명은 야금야금 먹혀 죽을 운명이었다.

면으로 먹힐지 떡으로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아주 쫄깃할 것이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아, 그래! 그럼 승우 형한테 저쪽 섬에서 범독수리 2마리만 대신 좀 먹어 달라고 할까?”

[오? 제법?]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용의 사도를 뒀다 뭐 할까?

바로 이럴 때 써야 했다.

참고로 그들은 걸어 다니는 제단과 같다.

먹은 음식을 제물로 바칠 수 있다.

정다운은 바로 류승우에게 귓말을 보냈고, 얼마 후 답장이 돌아왔다.

<류승우 : 뭐? 나더러 저 큰 범독수리를 2마리나 먹으라고?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우린 파이터지, 푸드 파이터가 아니라고.>

류승우의 질색하는 말투에 토끼가 낄낄댔다.

[드립력 무엇? 전투 중이라 아주 흥이 넘치시나 보네.]

사람이 할 짓의 기준이 정다운과는 완전히 달라서 웃겼다.

먹는 건 힘든데, 범독수리들과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농담을 건넬 여유는 있나 보다.

정다운이 열심히 설득을 시도했다.

<정다운 : 왜? 진수도 있잖아. 맛있는 건 둘이 먹으면 더 꿀맛이라고!>

<류승우 : 꿀맛? 둘이 먹다가 진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모르겠네. 씹다가 입천장 다 헐고 턱 빠지겠다. 지금 살아남기도 벅찬 판국에 어느 세월에 저걸 다 먹고 앉아 있어?>

[호오? 노잼 류승우 선생의 드립이 제법 찰지군요. 학원이라도 다녔나? 개인적으로 별점 10점 드립니다.]

토끼가 턱을 쓸며 정중히 점수를 매겼다.

사실 정다운도 마음 같아선 그쪽으로 넘어가서 같이 싸워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는 길이 험해서 가깝고도 먼 당신이었다.

그때였다.

<윤진수 : 으악! 승우 형, 뭐 해요! 반대편에서 2마리 더 날아와요!>

<류승우 : 알았다! 지금 간다!>

뚝.

더 바빠졌는지 귓말이 끊겼다.

“쳇.”

정다운은 실망한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쪽은 고기가 없고, 저쪽은 고기를 먹기 싫다고 아우성이다.

[근데요.]

토끼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꺼냈다.

[용의 사도라면 류승우 님 말고도 몇 명 더 있지 않음?]

“어? ……아아!”

그 말에 순간 정다운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구나! 식신이 있었지?”

바로 첫 번째 용의 사도이자 먹는 것 자체가 스킬인 중학생 소년.

‘식신 오동민’에게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넣어 보기로 했다.

*   *   *

얼마 후,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오동민 : 앗, 다운이 형! 저야 잘 지내죠! 요즘 살이 너무 많이 쪄서……. 그런데 제물이 필요하시다고요? 얼마나 보내 드리면 될까요?>

<정다운 : 얼마나 줄 수 있는데?>

<오동민 : 얼마든지요. 부족하시면 더 먹어서라도 보내 드릴게요.>

“……!”

[지,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대흥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토끼!

아아, 갑자기 얼굴도 보이지 않는 오동민의 귓말에서 후광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이게 바로 진짜 용의 사도라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오동민 : 이 정도면 될까요? 부족하면 더 말씀하시구요.>

잠시 후, 오동민에게서 막대한 양의 생명 에너지가 넘어왔다.

꾸울꺽!

알파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어, 엄청납니다! 무려 범독수리 3마리분의 생명 에너지가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헐. 그렇게나?”

겨우 중학생 꼬마의 거대한 배포에 모두가 놀랐다.

정다운이 던전의 부르주아라면, 오동민은 알짜배기 현금 부자!

빳빳한 지폐를 배에 두둑하게 담고 다니는 던전의 은행장이었던 것이다!

“거긴 범독수리도 없잖아? 얘는 대체 뭘 얼마나 먹고 다닌 거야?”

그 대답은 최근까지 오동민의 모습을 지켜봤던 루갈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다크호스라고 하지 않았나. 그 꼬맹이는 입에 들어가는 건 아무거나 다 먹는다.]

“아, 아무거나? 예를 들면 뭐를?”

[괴물들과 싸우는 도중에 빈틈이 보이면 바로 괴물의 몸을 물어뜯는다.]

……네?

뭔가 지금 엄청난 말이 지나간 것 같았다.

“뭐, 뭘 물어뜯는다고?”

[괴물의 뭐를요?]

정다운과 토끼가 동시에 물었다.

[못 들었나? 그는 전투 중에 상대 괴물을 바로 잡아먹는다. 산 채로. 팔이 빈틈이면 팔을 씹어 먹고, 다리가 보이면 다리를 뜯어 먹는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강해진다.]

“…….”

[…….]

갑자기 숙연해진 정다운과 토끼.

식신 스킬이 대체 어디까지 성장해 버린 것일까.

배부르면 강해지는 식신 스킬과 배불러도 계속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용의 사도의 능력이 대체 어떤 시너지를 보였단 말인가.

[……이, 이건 다 던전 잘못임.]

“그래. 이게 다 던전 때문이야.”

[던전이 밉다.]

“…….”

그들은 큰 상처를 받았다.

함께 소금 사막을 발견하고 즐겁게 뛰어 놀던(?) 그리운 추억이 산산조각 나 버린 것이다.

아아, 님은 갔다.

그 키 작고 통통하던 귀여운 소년 오동민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오동통이 별명이라며 해맑게 자신을 소개하던 그 착하고 어리숙하던 아이가 이제는 진정한 의미의 ‘짐승남’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몹쓸 던전의 현실이 한 소년을 괴물을 산 채로 씹어 먹는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눈치를 보던 알파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럼…… 충분한 생명 에너지가 모였으므로 ‘게이트 설치’ 스킬을 2레벨로 발전시키겠습니다.>

“그러든가…….”

번쩍!

[<게이트 설치> 스킬이 2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 제단과 제단을 잇는 워프 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다.

- 생명 에너지를 소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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