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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65)화 (165/393)

<던전리셋 165화>

루갈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던전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하기 위해선 ‘제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살펴보니 스테이지-1과 스테이지-4에는 제단이 하나도 없더군.]

움찔.

그 말에 뜨끔한 정다운과 토끼가 눈치를 보며 서로를 쳐다봤다.

[도우미가 공석인 스테이지-1은 앞으로 리셋도 못 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게이트도 열리지 않는다. 이대로 두면 그곳은 괴물 쥐떼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겠지.]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규 참가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곳에 소환될 거라는 사실이다. 물론 오는 족족 괴물 쥐 떼에 먹히겠지. 결국엔 내 관할 지역까지 넘어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는 말이다.]

뼛속까지 스테이지-3만 생각하는 루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 대신 네놈들이 스테이지-1을 인수해 줬으면 한다. 인수 방법은 내가 가르쳐 주겠다.]

[으잉?]

“뭐?”

뜻밖의 결론에 정다운과 토끼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 커졌다.

“도우미가 그런 말을 해도 돼? 종말의 용이 뭐라 안 해?”

[알 게 뭐냐. 난 내 일만 잘하면 그만이다.]

“…….”

딱 잘라 말하는 루갈의 단호함.

토끼는 감동했다.

[쩌, 쩐다. 너무 칼 같아서 베일 것 같네요. 이게 바로 어른인가?]

<무책임한 건지, 책임감이 넘치는 건지 알 수 없는 도우미군요.>

알파조차 놀라워했다.

그래도 던전을 인수한다는 건 너무나 좋은 일이었다.

<정다운 님. 비록 적이지만, 도와준다고 할 때 기회를 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파가 갑자기 용통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럼 혹시 스테이지-4도 인수해도 됩니까?>

욕심도 부리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루갈은 욕심이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그곳은 세르파의 마법 덕분에 어차피 관리자가 없어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다. 괜히 건드렸다간 던전이 붕괴될 수도 있으니, 천천히 인수하도록.]

생각 이상으로 세르파의 자동화 시스템은 대단한 마법이었다.

바분 때문에 제4 던전이 붕괴되자, 시스템은 자동으로 제3 던전 ‘심연의 바다’를 최종 던전으로 재등록시켰다.

앞으로는 검은 여왕의 성까지만 공략하면, 바로 스테이지-5로 넘어가는 게이트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을 루갈에게 듣게 된 토끼는 세르파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대박. 세르파 뒤늦게 천재 인증이네요. 아니, 그 양반은 대체 어디까지 게으르게 살고 싶었던 거지?]

[쯧. 천재는 무슨…….]

루갈이 혀를 찼다.

[어차피 상위 스테이지로 가면 자동화 마법 같은 건 어디에나 있다. 당장 이곳 스테이지-5도 그렇지 않나.]

[헐, 여기도요? 그렇게 흔한 마법이었음?]

“그거 세르파가 자체 개발한 거 아니었어?”

[개발한 건 맞다. 하지만 세르파의 진정한 재능은 마법이 아니라 ‘흉내 내기’다.]

“뭐? 흉내 내기?”

[애초에 세르파는 마녀의 마법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다가 마법을 배우게 된 검은 고양이. 그 재능으로 상위 스테이지가 운영되는 방식을 겉으로만 보고 똑같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물론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지.]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자, 토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럴 수가! 세르파가 따라쟁이였다니!]

“어쩐지. 그래서 그림자 고양이들도 저렇게…….”

정다운이 뒤를 돌아봤다.

니야앙.

이 와중에도 자신의 그림자 하인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흙이나 뭉치고 있었다.

대체 누구 닮았는지……, 할 게 없으면 항상 저러면서 시간을 때우는 놈들이었다.

[아무튼. 이게 내 보상이다.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스윽.

말을 다 마친 루갈이 늘어져 있던 거대한 몸을 일으키자 육개장 칼국수로 꽉 찬 배가 출렁거렸다.

만족스럽게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정다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다운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흠……. 좀 귀찮은데. 네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한번 고민을 좀 해 볼까?”

[……뭐?]

[히익?]

갑자기 거들먹거리는 정다운.

그 모습에 루갈의 얼굴 위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허어, 건방진 인간이구나! 뭐라! 고민해 본다고? 정 그렇게 원한다면이라고!?]

[으악! 잘나가다가 갑자기 무슨 헛소리임! 인간이 던전을 관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알아요!?]

토끼는 사색이 되어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다운은 계속 턱을 쓸며 대답했다.

“어떤 의미긴? 귀찮은 일이지.”

[그건 맞다. 세상 귀찮은 일이지.]

루갈도 화를 풀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화낼 입장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다. 아쉬운 건 나다.]

갑자기 둘 사이에 게으르기 짝이 없는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일이라는 건,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최고 아냐?”

[좋은 말이다. 어디다 적어 둬야겠군.]

루갈의 고개가 더욱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난 아직도 격이 오르면 뭐가 좋은 지도 모르겠다고. 게다가 스테이지-1에 제단도 없어서 격도 안 오르고, 얻는 게 뭐야?”

[그 말도 맞다. 사실 격이 올라가도 감당해야 할 일만 많아진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가급적 스테이지-2도 떠맡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죽이 잘 맞는 둘의 모습에 토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뭐지……? 이 게으른 종자들은?]

토끼 입장에선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던전이 생기면 당연히 신나는 일 아닌가?

하지만 주제를 아는 도우미 루갈은 자신의 처지를 바로 깨달았다.

아쉬운 건 자신이었다.

애초에 제단이 남아도는 도우미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 루갈을 도와줄 이는 정다운 한 명뿐이었던 것.

그런데 정작 정다운에게 던전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진짜 귀찮은 일만 떠맡게 되는 상황 아닌가.

[알겠다. 내가 뭘 하면 스테이지-1을 인수해 주겠나. 원하는 걸 말해라.]

[헐.]

결국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는 루갈의 모습에 토끼는 깜짝 놀랐다.

배째라식 흥정이 먹힌 것이다!

정다운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원하는 거? 좋은 아이템?”

[아이템은 안 된다. 내 던전에 들어온 참가자에게만 보상으로 주는 것이 규정이다.]

“그럼 전투 스킬 같은 건?”

[도우미가 스킬을 어떻게 주겠나. 나는 신이 아니다. 던전의 노예인 도우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라.]

“뭐지? 되게 무능력하네.”

그럼 생각나는 게 없었다.

[원래 도우미들이 좀 개털임.]

[토끼 넌 끼어들지 마라.]

[쳇.]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토끼였다.

다시 고민하던 정다운의 시선이 문득 루갈의 몸을 쳐다봤다.

“그럼 그냥 몸으로 갚든가.”

[뭐? 나는 줄 수 없다!]

루갈이 깜짝 놀라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꼬리까지 돌돌 말려 있었다.

[나는 종말의 용을 배신할 생각이 없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그럼 어쩌라고? 원하는 걸 말하라며?”

[큭. 그러게 말이다. 나도 지금 난감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루갈은 참가자도 아닌 인간과 이런 방식의 거래를 해 본 적이 처음이라 자신도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상대에게 원하는 건 있는데, 자신은 정작 상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일이 없는 일방적인 상황.

이 관계를 가리켜 사람들은 ‘갑을’ 관계라고 부른다.

갑다운이 말했다.

“좋아. 그럼 일단 이렇게 하자. 스테이지-1은 내가 인수할게.”

[오! 고마운 말이군! 원하는 건 무엇인가!]

“그건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 볼 테니까, 일단 그 전에 간단한 심부름이나 좀 해 줄 수 있을까?”

갑다운이 소소한 갑질을 시작했다.

루갈에겐 거부권이 없었다.

[간단한 심부름이라면?]

“혹시 저쪽 섬에 류승우라는 참가자가 싸우고 있어?”

쿠르릉!

그가 아까부터 계속 번쩍거리며 시끌벅적한 부유섬을 가리키며 묻자, 루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직접 데리고 왔지.]

“오, 그래? 그럼 우리도 좀 저쪽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 형이랑 합류하게.”

[미안하지만, 내 게이트는 참가자만 통과할 수 있다.]

“아 진짜! 되는 게 없네!”

흠칫.

정다운이 갑자기 버럭하자, 루갈은 본능적으로 털을 쭈뼛거리며 꼬리를 뒤로 말았다.

자꾸 자신의 무능력함만 반복되다보니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이다.

류승우 때는 보자마자 꼬리가 말렸지만, 정다운과 있으니 그냥 말리는 기분이었다.

“아, 그럼 어떡한다? 뻔히 저 앞에 있는데 갈 수가 없네.”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날아가거나 게이트 열거나.

하지만 날아가는 건 범독수리들 때문에 위험했고, 게이트는 이동 중이라 좌표가 고정되지 않았다.

알파가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일단 미니 제단을 류승우 님에게 전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 적어도 그가 어디를 가든지 방향을 알고 찾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 말에 정다운이 미니 제단을 꺼내며 말했다.

“그래, 아쉬운 대로 일단 그렇게라도 하자. 루갈, 이걸 형한테 좀 전해줄래?”

[흠. 제단을 말인가? 얼마든지 전달해주마. 나에게 맡겨라.]

루갈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살랑살랑!

하지만 그의 꼬리는 이미 흥분으로 파닥거리고 있었다.

정다운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안 되겠다.”

[왜, 왜지?]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토끼한테 들려 보낼 테니까, 너는 범독수리들한테서 토끼 좀 지켜줄 수 있어?”

아까 루갈이 이쪽으로 날아올 때 보니까, 도우미라 그런지 범독수리들이 그를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했었다.

하지만 토끼는 공격한다.

[흠. 그건 가능하다. 내 등에 업혀서 빠르게 이동하면 된다.]

“갑자기 잡아먹는 거 아니지?”

[토끼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갈은 처음부터 토끼에게 호의적이었다.

토끼도 루갈과 같이 움직이는 것을 별로 겁내지 않았다.

[걱정 마셈. 우린 원래 좀 친함!]

[친한 척 하지 마라. 아까 내가 맞을 때까지 마구 쏘라고 하는 것 다 들었다. 이 양아치야.]

[쳇. 귀도 밝네.]

서로 티격대는 모습이 친해 보이면서도,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아무튼 얼른 다녀와. 난 좀 쉬고 있을테니까.”

[오키요.]

[금방 다녀오겠다.]

말이 끝나자 마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전직 도우미와 현직 도우미.

그들은 순식간에 류승우가 있는 섬에 도착해 미니 제단을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치열하게 전투 중이던 류승우는 토끼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토끼!? 여긴 어떻게?”

[여어! 오늘도 잘 싸우시네요? 자, 이건 선물! 미니 제단인데 소지품에 잘 넣고 다니셈!]

“자, 잠깐! 이놈만 죽이고!”

번쩍!

[<외뿔 멧돼지의 기운>이 10레벨로 발전했습니다.]

때마침 류승우의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와우! 레벨 업 축하요! 오늘도 보람이 넘치시네!]

그동안 고생해 온 레벨이 다르기에 정다운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경지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피가 아니라 전부 범독수리들의 피였다.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다치던 말던, 토끼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다시 날아 올랐다.

[자! 나는 분명 전달했음! 나중에 또 봐요!]

[계속 고생하도록.]

할 일만 마치고 바로 하늘 신전으로 돌아온 토끼와 루갈.

그곳에서 정다운은…….

“왔어?”

첨벙.

[…….]

[…….]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정다운은 신전에 자그마한 온천을 하나 만들고 그 안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요즘 그의 일과였다.

아침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반신욕은 최고다.

몸에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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