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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63)화 (163/393)

<던전리셋 163화>

*   *   *

“그쪽 막아!”

콰쾅! 콰아앙!

아무리 싸워도 끝도 없이 모여드는 슬러그는 무한의 지옥을 연상케 했다.

“이런 젠장! 아무리 죽여도 죽지를 않아!”

지금까지 어떤 괴물 앞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줬던 구호열은 이런 종류의 상대에겐 너무나 취약했다.

자꾸 사방에서 끈적한 점액질이 덮쳐 와 그의 몸을 옭아맸다.

그는 매번 개미지옥 같은 바닷속에 빠져 익사할 것 같은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했다.

“호열 아저씨! 저처럼 핵을 공격해요!”

의외로 윤진수가 발군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바람의 화살로 슬러그들의 핵만 공격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림없었다.

슬러그는 전체가 하나.

핵이 몇 개 깨져도, 근처에 있는 다른 핵들이 점액질을 전부 흡수해 버렸다.

그런 슬러그들을 피하기 위해선 한 곳에 몰려 있으면 몰살당하기 딱 좋았다.

서로 흩어져서 싸우다 보니 구호열과 윤진수는 단둘이 고립되어 있었다.

류승우?

그는 어차피 찾기 쉬웠다.

콰르릉!

마른 하늘에 낙뢰가 떨어지는 곳.

그곳에서 홀로 싸우는 이가 바로 류승우였다.

“……어우, 저긴 무서워서 가까이도 못 가겠네.”

“승우 형은 갈수록 대단해지네요. 우리는 이 지경인데.”

“야, 나도 강해, 인마!”

“그럼 아저씨가 어떻게 좀 해 봐요! 또 몰려오잖아요!”

“으라차!”

우지끈!

구호열은 근처에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잡아서 뜯어냈다.

그리고 빗자루처럼 거꾸로 들고 슬러그들을 거침없이 밀어내기 시작했다.

윤진수가 쌍엄지를 치켜들었다.

“우와, 트윈헤드 오거 같아요!”

“그거 칭찬이냐!?”

“암튼 멋있어요!”

“승우보다 더 멋있어?”

“아, 그건 아니죠. 승우 형은 잘생겼잖아요. 제 롤모델인데요.”

윤진수는 정색하며 말했다.

하여튼 요즘 애들은 거짓말을 못한다.

이 어린놈의 자식은 귀엽고 다 좋은데 가끔 싹퉁머리가 없는 게 흠이었다.

“썩을 외모 지상주의! 윤진수 너 두고 봐라? 너 크면 분명 이 아저씨 닮을걸?”

“말도 안 돼!”

그 말에 윤진수는 큰 충격을 먹었다.

그리고 그 울분을 모두 슬러그들에게 퍼부었다.

후아앙!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점액질을 썩둑썩둑 잘라 내고, 그 사이사이로 핵들만 골라서 박살 냈다.

그 현란하고 절묘한 전투력에 구호열은 기분이 조금 안 좋았다.

“아니, 저렇게까지 싫어한다고?”

“사실 아저씨도 그렇게 못생긴 건 아니에요.”

“흐흐, 그렇지? 그래, 나 정도면 제법…….”

“못생긴 사람들 중에선 제법 잘생긴 편인 것 같아요.”

“…….”

마흔 살 노총각이 이 10살짜리 꼬맹이를 진심으로 때려 보는 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멀리서 오창석 촌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입니다! 이쪽으로 피신합시다!”

“어? 촌장 아저씨가 안전한 곳을 찾았나 본데요?”

이런 난전 중에서 오창석의 눈치 스킬은 상당히 믿을 만했다.

그들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오창석 촌장을 향해 달려갔다.

촌장은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놈들은 주로 위에서 아래로 움직입니다! 높은 곳으로 이동하면 안전할 것 같습니다!”

“오, 확실히!”

대단히 어려운 팁도 아니고 누가 먼저 생각해 내냐의 문제였지만, 꼭 이런 건 오창석 촌장이 가장 빨리 찾아내는 편이었다.

주변이 거의 평지인데도 굳이 바위를 찾아내 올라간 것도 그렇고, 던전을 한번 같이 돌아보니 숨겨진 함정들도 금방 찾아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쪽 방향이 미약하게 언덕길입니다. 언덕을 등지고 싸우면 놈들의 움직이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질 겁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정작 오창석 촌장은 위에서 지시만 할 뿐 직접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슬러그들은 뼈가 없다 보니, 뼈를 2배로 잘 부수는 그의 능력이 먹통이 된 것이다.

게다가 주무기인 도살자의 칼을 사용하자니 사정거리가 너무 짧아서 위험했다.

자칫하면 슬러그들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결국 그의 최선은 직접 싸우기보단 눈치를 살살 보며 필사적으로 잔머리를 굴리는 것뿐이었다.

‘끄응. 항상 유적지를 찾아다니다가 이번엔 갑자기 유적지부터 시작하게 되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하구나. 응? 저건 뭐지?’

문득 그의 눈에 새로운 광경이 보였다.

하늘에서 검은 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정체를 깨닫자 촌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 맙소사! 하늘에 범독수리들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내려옵니다!”

크르렁!

놈들의 존재를 알게 된 참가자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제기랄!”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땅 위엔 슬러그, 하늘 위엔 범독수리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 아닌가!

하지만 구호열은 슬러그보단 차라리 이쪽과 싸우는 게 속 편했다.

“저거다.”

그는 곧바로 소지품에서 기다란 심연어의 척추를 쭈욱 뽑아 들고 앞으로 휘둘렀다.

부와앙- 콰쾅!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앞에 있던 슬러그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래 봐야 죽지는 않겠지만, 범독수리라면 또 어떨까!

그는 용맹하게 심연어의 척추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윤진수! 뒤에서 엄호 부탁한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덤비지 못하게 바람 좀 잡아 줘!”

“네? 네! 소용돌이!”

윤진수의 손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며 범독수리들의 날개를 흔들었다.

콰르릉!

이미 저쪽에서도 류승우가 먼저 시작한 것 같았다.

“류승우! 같이 잡자!”

구호열이 류승우를 향해 달려가며 버럭 소리쳤다.

“그러죠!”

그 순간 류승우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폭살했다.

목표는 하늘!

선착순으로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범독수리를 향해서!

“뇌전!”

벼락이 내리꽂혔다!

콰르릉!

“흐랴압!”

동시에 구호열의 손에서도 심연어 채찍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부우웅- 콰쾅! 콰직!

“크르렁!”

범독수리가 무섭게 울부짖으며 성난 발톱과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들의 격돌로 인해 근처에 있던 슬러그들이 산산이 갈려 나가고, 지축이 흔들렸다.

섬 자체가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의 거친 몸부림이었다.

“이, 인간이 아니야…….”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오창석 촌장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무리 2 대 1이라도 범독수리와 대등하게 몸싸움을 하는 인간들이라니…….

그동안 저들에게 스스로가 크게 잘못한 일이 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다.

……젠장, 많았다.

“도망가지 못 하게 날개를 바싹 태워 주마!”

“날개를 찢어 버리겠다!”

범독수리의 발톱과 이빨을 몸으로 막아 내는 게 구호열의 역할이었다.

살점이 튀고 피가 뿜어져 나와도 스스로를 재생시키며 미친놈처럼 계속 뛰어올라 범독수리의 꼬리를 붙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쾅!

“크르렁!”

슬러그의 한가운데로 곤두박질한 범독수리가 크게 분노하며 다시 날아올랐다.

이쯤 되면 누가 괴물인지도 헷갈렸다.

인간이라면 범독수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흉포한 기세에 짓눌려 오금이 저릴 만도 하건만, 극도로 집중된 투쟁심이 그들의 공포를 억눌렀다.

“좋아. 내가 잡았다!”

구호열이 결국 놈의 날갯죽지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 쫘아악!

“크허엉!”

날개가 찢긴 범독수리가 울부짖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목줄기를 압도적인 힘으로 휘감아 오는 심연어의 척추뼈.

“크륵!?”

“흐흐, 잡았다. 이놈.”

구호열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대로 범독수리의 등에 올라탔다.

그를 떨쳐 내기 위해 거칠게 몸부림치는 범독수리.

그때 다른 놈을 상대하던 류승우가 갑자기 몸을 돌려 구호열이 잡은 범독수리의 심장에 칼을 콱! 틀어박았다.

씨익.

“나도 잡았다.”

그 순간 번개가 쳤다.

콰르릉!

그의 철검은 피뢰침이 되어 범독수리의 심장에 직접 낙뢰를 꽂아 넣었다.

“크라락……!”

놈의 눈이 결국 뒤집혔다.

<업적 달성!>

“범독수리 사냥꾼!”

하늘의 무법자 그리피오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뛰어난 기개와 용맹스런 무용담에 던전이 승리의 나팔을 붑니다.

- 보상 : 범독수리처럼 용맹해집니다.

“응?”

“겨우 한 마리 잡았는데 업적이라고?”

그들은 몰랐지만 이것은 바로 오래전 정다운이 달성했던 업적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상 또한.

보자마자 어리둥절해지는 것도 똑같았다.

“범독수리처럼 용맹해진다고? 이딴 게 뭔 필요가…….”

“아, 그런 거였나!”

류승우는 본능적으로 이 업적의 효용성을 깨닫고 눈을 빛냈다.

그리고 곧장 윤진수를 향해 외쳤다.

“윤진수!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어떻게든 범독수리를 잡으라고 전달해!”

“응? 왜, 왜요?”

“너도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어떻게든 한 마리만 잡아! 이곳에선 필수다!”

무슨 소리인지 선뜻 이해가 잘 안 가는 말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루갈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군. 핵심을 정확히 꿰뚫지 않았나.]

사실상 저 ‘범독수리 사냥꾼’ 업적이야말로 등천로를 탐험할 때 가장 필수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높은 하늘 위에 있다 보면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이 정체불명의 부유섬이 갑자기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런데 저 업적은 단순히 고소공포증을 없애 주는 수준이 아니라, 범독수리처럼 하늘을 자유로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면서도 스킬이 절대 실패하지 않게 정신력을 단단히 보호해 주는 효력이 있었다.

“좋았어! 또 잡자!”

업적 효과를 받은 류승우과 구호열은 그야말로 범에게 날개가 달린 것과 같았다.

거침없이 온몸을 허공에 내던지며 다른 범독수리들한테까지 용맹하게 덤벼들었다.

[쯧. 미친 광전사들이 따로 없군. 나도 슬슬 돌아가 볼까. ……음?]

몸을 돌리던 루갈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서 우뚝 서며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흐음. 이것 봐라?]

*   *   *

콰르릉!

“뭐가 이렇게 시끄럽지?”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도 정다운은 한가롭게 앉아 칼국수를 끓이고 있었다.

이거저거 고민하다가 생선도 넣고 조개도 넣어서 점점 잡탕이 되어 갔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맛은 진정 아름다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마법의 조미료인 고춧가루까지 넣고 팔팔 끓였는데, 이미 아까부터 후각을 자극하는 알싸하고 칼칼한 냄새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좋아! 이제 한 번 먹어 볼까?”

[앗, 치사하게! 나도 덜어 주셈! 나도요!]

옆에서는 토끼가 아까부터 발을 동동거리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나무를 깎아 만든 국자로 칼국수를 한 그릇 푸짐하게 떴다.

특별히 국자 끝을 포크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놔서, 그 사이사이로 탱탱하게 튕겨 올라오는 슬러그 면발들이 팔랑팔랑 어깨춤을 췄다.

“크으! 이미 맛있다. 눈으로 먹어도 좋고, 코로 빨아 먹어도 맛있겠다.”

[나도요! 나도 얼른요!]

안절부절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앞 접시를 앞으로 쭉쭉 내미는 토끼였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자꾸 엄한 배경 음악이 훼방을 놨다.

콰르릉!

쿠릉 쿠릉!

[아니! 대체 어디서 자꾸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거야?]

“음?”

날벼락 하니까 정다운은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에이, 그럴 리가. 승우 형은 아직 제4 던전에 있을…….”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서 시선이 돌아갔다.

[이때닷!]

기회를 포착한 토끼가 냉큼 그가 들고 있던 그릇으로 포크를 꽂아 넣었다.

“야.”

찔끔?

[네? 아니, 나는 진짜 맛만 딱 보려고…….]

“그게 아니라. 저거 뭐냐?”

[음? 뭐요?]

토끼는 정다운이 쳐다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에서 빛이 쉴 새 없이 번쩍거렸고, 그 위로 여러 마리의 범독수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딱 보니까 싸움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섬에서부터 중력의 영향을 무시한 채 이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한 인영이 있었다.

[어어? 저 늑돌이가 여길 왜?]

그를 알아본 토끼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찬란한 은빛 갈기가 바람에 나부끼며,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무서운 표정으로 이곳으로 날아오는 거구의 늑대인간.

루갈은 붉게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정확히 정다운을 직시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거기 웬 놈이냐!]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루갈의 포효!

참고로 개의 꼬리는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감정에 100퍼센트 충실한 자동 안테나와도 같다.

[그리고 이 요망한 냄새는 또 무엇인가!]

살랑살랑!

가까이 다가올수록 루갈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선풍기처럼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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