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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62)화 (162/393)

<던전리셋 162화>

슬러그의 핵은 크기가 다양한데 평균적으로는 주먹만 한 정도다.

평소에는 핵이 표면 위로 드러나 있지만, 계속 이동하다 보면 점액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유로이 위치가 바뀌었다.

정다운은 핵을 하나만 남기려고 했으나, 너무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중간을 끊어 낸 고랑에는 총 9개의 핵이 남아 있었다.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직접 뜯어내야겠는데?”

토끼가 우려를 표했다.

[직접 하게요? 위험할 텐데요.]

“아니, 나는 처음에 딱 한 번만 할 거야.”

[그럼 그렇지.]

토끼의 핀잔을 흘려 넘긴 정다운은 그림자 하인들을 불러 손에 각각 쇠꼬챙이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몸소 시범을 보여 줬다.

푸욱!

이쑤시개로 떡볶이 찍듯이 거침없는 찌르기로 핵 하나를 푹 떠냈다.

“자, 봤지? 이렇게 똑같이 하면 돼.”

“니야앙.”

[이 와중에 또 허리는 절대 안 움직이는 거 봐.]

“시끄러.”

낄낄대는 토끼를 무시하고, 떠낸 핵을 얼른 옆에 있는 슬러그 연못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상처 입은 핵이 점액질 안으로 천천히 숨어 들어갔다.

“찔려도 다시 회복되나 본데?”

[님 창술이 워낙 약해 빠져서 그래요. 서연 아씨처럼 창끝에 오러가 맺혀 있었다면 한 방에 죽었겠죠.]

“스킬이 아니라서 그렇구나.”

내심 아쉬운 정다운이었다.

사실 들고 있는 이 쇠꼬챙이는 그가 거의 처음부터 들고 다니던 도구였다.

심지어 흙 뭉치기 스킬이 생기기 전에는 이 쇠꼬챙이로 땅굴을 후벼 파지 않았던가.

사실 그쯤 했으면 땅파기 스킬이나 쇠꼬챙이 관련 스킬이 생길 법도 한데, 흙 뭉치기 스킬이 먼저 생긴 걸 보면 어지간히도 쇠꼬챙이를 다루는 데 재능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흙덩이를 예쁘고 완벽하게 뭉치는 일은 재밌었으니 말이다.

“니야앙?”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 핵들이 안으로 다 숨어 버렸는데요?]

“그러게.”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슬러그의 핵들이 전부 점액질 깊은 곳으로 쏙쏙 몸을 숨겨 버렸다.

그러자 쇠꼬챙이로 핵을 떠내던 그림자 하인들의 작업이 벽에 부딪혔다.

물컹하고 점성을 가진 두꺼운 점액질을 꿰뚫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잘 안 찔리나 본데? 이 쇠꼬챙이들 나름 관통력 옵션도 붙은 건데?”

그가 직접 찔러 봐도 마찬가지였다.

관통이 되기는 하지만, 질퍽거리는 점액질이 자꾸 엉겨 붙어서 진로를 방해했다.

[공격력이 약해서 그래요. 괜히 슬러그가 스테이지-5에서 처음 나오는 게 아님. 무기 강화를 더 하든가, 아니면 창술에 오러를 실어야 해요. 제대로 된 제국창술이었다면 아마 한 방에 푹푹이었을 거임.]

“에이씨, 저번엔 마법이더니 이번엔 또 오러 탓이야?”

[어쩌겠음? 님이 약한 탓인데.]

토끼의 비아냥에 정다운은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내가 어떻게든 저거 찌르고 만다.”

방법이야 많았다.

“분명 불에 약하다고 했겠다?”

그는 얼른 대장간으로 달려가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불구덩이에서 쇠꼬챙이를 빨갛게 달구기 시작했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손에 화상을 입을 수 있나이다!]

“괜찮아. 장갑 꼈어.”

[불귀신의 장갑 +2]

- 내구도 : 4/100(%)

- 옵션 : 화(火)속성 (2레벨)

그는 요즘 계속 대장간 일을 하느라 틈새 마을에서 소금 값으로 받은 장갑을 손에 착용하고 있었다.

뜨거운 함정을 해체할 때 사용하는 장갑이었다.

그는 쇠꼬챙이가 완전히 달궈지자, 그걸 다시 그림자 하인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이걸로 다시 찔러 봐.”

“니양?”

푸쉬익-!

이번엔 성공이었다.

슬러그는 뜨거운 쇠꼬챙이에 닿는 순간 거의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쑤욱 구멍이 뚫렸다.

푸욱!

그렇게 또 하나의 핵이 뽑혀 나왔다.

“좋아. 이제 딱 하나 남았다.”

잠시 후, 정다운은 핵이 달랑 하나 남겨진 슬러그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화! 정화!”

파앗! 파아앗!

거기에 정화 스킬을 엄청 퍼부어 대자, 녹색이던 핵의 빛깔이 점점 옅어져 갔다.

그런데 핵만 정화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근처에 있던 검푸른 점액질까지 덩달아 색이 점점 뽀얗게 변해 갔다.

거기다 아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그 색깔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토끼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통할 줄이야. 이쯤 되면 정화 스킬 너무 사기 아님?]

“스킬 중에 사기 아닌 스킬이 어디 있어? 내 입장엔 전투직들 스킬이 더 개사기야.”

[하긴 그렇죠. 그거 아셈? 류승우 님은 자기 몸에 전기 충격을 줘서 신체 능력을 강제로 각성시킨대요.]

“헐, 진짜? 대박. 그러다 틱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틱이 뭐임?]

수다를 떠는 동안, 슬러그는 계속 정화 스킬로 샤워를 했다.

고통은 없는지 도망갈 생각도 없이 계속 그 자리에서 몸을 꾸물거리며 색깔만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반투명하고 새하얀 점액질에 핵은 탱글탱글한 샛노란 색으로 변해 버렸다.

“……?”

정다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설마 계란…….”

꾸물렁?

“…….”

[…….]

어쩌다보니 살아 움직이는 계란이 만들어져 버렸다.

정다운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토끼를 쳐다봤다.

“에이……. 그, 그렇다고 설마 맛까지 계란 맛이겠어?”

[그, 그럼요. 슬러그를 무시하지 마셈. 이래 봬도 엄청 위험한 괴물이라고요. 모든 걸 먹어 치우고 이상 증식을 하는 탐식의 왕임. 분명 맛은 없을 거임.]

“…….”

[…….]

그렇다고 누구 하나 선뜻 먼저 먹어 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바하무트가 용감하게 나섰다.

[일단 저 핵부터 뜯어내셔야 하나이다. 언제 또 침을 뱉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푸욱!

노른자, 아니 핵이 뽑혀 나왔다.

그 순간 꾸물거리던 점액질이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것이다.

“이제 먹어도 되지 않을까? 토끼야, 내가 양보한다. 먼저 맛 좀 봐라.”

[왜요? 이제 와서 쫄리심? 아까부터 계속 입맛 다시던 분 어디 갔어요?]

“막상 대놓고 계란처럼 변하니까 좀 함정 같잖아.”

서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시식 순서를 서로에게 미루는 정겨운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

보다 못한 알파가 끼어들었다.

<아무나 드셔도 됩니다. 어차피 포만감이 100퍼센트로 찬 상태에서 식사를 하시면, 자동으로 제물로 바쳐지지 않습니까.>

“아!?”

[오!]

눈이 번쩍 뜨이는 혜안이었다!

그동안 완전히 깜빡하고 있던 사실을 알파가 되새겨 준 것이다!

[헐, 진짜 먹어도 돼요?]

“맞아, 그랬었지 참! 나는 입에서 맛만 느끼고 내용물은 전부 생명 에너지로 치환된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주워 드시면 안 됩니다. 날카로운 걸 삼키면 식도와 내장 기관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니, 어디까지나 본인이 씹어 삼킬 수 있는 것만 드셔야 합니다.]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둘은 이미 안 듣고 있었다.

“대박이네! 이거라면 걱정 없이 맛을 봐도 되겠어!”

[이히! 나도 먹어 봐야지!]

정다운과 토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식량을 꺼내 손에 잡히는 대로 와구와구 퍼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포만감이 차올랐다.

포만감 : 100/100(%)

“좋았어! 이제 먹어 본다!”

[나도 배부름!]

둘은 기쁜 얼굴로 동시에 슬러그의 점액을 한 움큼 푸욱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꿀꺽!

그리고 동시에 슬픈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무 맛도 안 나…….”

[말랑거리는 공기 맛임…….]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대한 만큼 배신감도 컸다.

그사이에 알파가 제물로 들어온 슬러그의 성분을 분석해 주었다.

<다행히 인체에 해로운 성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핵이 빠져서 그런지 생명 에너지도 거의 없습니다. 평소에 이것만 드신다면 영양소 부족으로 살이 빠지고 말 겁니다.>

“곤약이었냐…….”

그저 허탈했다.

어쩐지 맛이 없다 했더니 다이어트 식품이란다.

이쯤 되니 억울해서라도 오기가 생겼다.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든 맛있게 먹고 만다! 끓는 기름 솥 어디 있어!?”

[튀겨 먹게요?]

“튀기든 삶든 다 해 볼 거야.”

[맛 자체가 안 나는데요?]

정다운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결사의 의지를 불태웠다.

“나는…… 요리의 힘을 믿는다.”

[이딴 걸로 폼 잡지 마요. 안 멋있음.]

그는 빈 마법서를 꺼내 들고 하나하나 적어 가면서 실험을 시작했다.

<슬러그 요리법>

1) 튀겨 봤다. -> 까맣게 타 버림.

2) 삶아 봤다. -> 서로 뭉쳐지면서 푸딩처럼 탱탱해진다. 여전히 맛은 맹맛.

3) 프라이팬 위에 기름을 두르고 살살 데쳐 봤다. -> 진짜 계란 후라이처럼 됐음. 그래도 여전히 맛은 맹맛. (대신 식감은 좋아졌다.)

…….

“차라리 식감 위주로 가자.”

접근 방향을 수정했다.

이번엔 슬러그를 생으로 뜯어서 손으로 반죽하기 시작하는 정다운.

“……너무 찐득거려서 반죽이 힘드네. 쌀가루를 좀 섞을까?”

슬러그에 쌀가루를 버무리고 또 열심히 반죽을 시작했다.

얼마 후 딱 적당히 찰진 반죽이 만들어졌다.

“……이것도 하다 보니까 은근 재밌는데?”

사람들이 왜 액체괴물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면서 노는지 이해가 됐다.

점점 초심을 일혹 재미가 들려서 반죽을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정다운.

반죽을 쭈욱 길게 잡아당겨서 절반을 접고, 또 그걸 길게 늘려 또 반으로 접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반복했더니, 어쩌다 보니 어설프지만 칼국수 같은 면발이 생겨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아, 그래! 이번에 고추도 생겼겠다, 칼칼하게 칼국수나 만들어 볼까? 생선도 많으니까 매운탕 칼국수! 아니다. 철갑조개 알맹이로 바지락 칼국수를!”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무릎을 탁 치며 슬러그 면을 다시 팔팔 끓는 물에 삶기 시작하는 정다운이었다.

그렇게 점점 슬러그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쳐 나가고 있었다.

*   *   *

번쩍!

루갈이 스테이지-5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 열린 게이트 안에서 류승우를 비롯한 제4 던전에 있던 생존자들이 따라 나왔다.

“여기가…… 스테이지-5인가?”

도착한 곳은 폐허가 된 유적지였다.

쭈뼛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참가자들은 곧이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섬이 떠 있어?”

하다하다 이제는 하늘에 떠다니는 섬까지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굳이 자신들이 서 있는 섬 아래를 내려다볼 필요도 없이 온 사방에 크고 작은 부유섬들이 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하늘 위다. 다 놀랐으면 지금부터 내 설명에 집중하도록.]

루갈의 근엄한 목소리가 웅성거리던 참가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은빛 갈기로 뒤덮인 거대한 늑대인간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다면 누구도 감히 그 말을 거역하기가 힘들었다.

[쯧. 원래라면 세르파가 설명해 줬겠지만, 별수 없이 앞으로는 내가 떠맡게 됐구나. 그러니 잘 들어라. 딱 한 번만 설명해 줄 테니 못 알아들으면…… 물론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설명해 주겠다.]

“……?”

[나는 친절한 도우미다.]

“……?”

괜히 사람들에게 엄포를 놓으려다 류승우와 눈이 딱 마주치자 바로 꼬리를 내리는 루갈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류승우를 여기 버려 두고 돌아가고 싶었으나, 성격상 할 일은 해야 했다.

[크흠. 아무튼 설명을 시작하겠다. 우선 스테이지-5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와 같은 도우미를 보기 힘들 것이다. 이건 너희에겐 분명 희소식이겠지만 많은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

“도우미가 없다고?”

그 말에 또다시 웅성거리는 참가자들이었다.

[물론 여기도 도우미가 어딘가 존재하긴 한다. 어떤 형태로든. 하지만 만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네놈들도 이제 더 이상 초짜도 아닌데 도우미가 필요할 일은 별로 없지 않나.]

사실 도우미라는 존재가 가장 필요한 시기는 아무것도 모르던 던전 게임의 초반뿐이었다.

스테이지-4까지는 도우미들이 직접 참가자들을 만나 조언을 해 주지만, 이제부턴 그럴 필요도 의무도 없었다.

문득 류승우 곁에 서 있던 윤진수가 빼꼼 손을 들고 물었다.

“늑대 아저씨. 도우미가 없다면, 그럼 앞으로 길은 누가 안내해 주나요?”

[좋은 지적이다.]

씨익.

루갈은 눈을 찡그리고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 물음에 답했다.

[이곳의 이름은 등천로(登天路). 이 하늘 위에서 길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네놈들에게 주어진 숙제다. 주어진 시간 안에 길을 찾지 못하면 이 섬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

[지금 주변에 보이는 크고 작은 섬들은 전부 개별적인 던전이다. 어떤 곳은 위험하고 어떤 곳은 쉽지. 그중에 어떤 길이 정답인지는 네놈들이 알아서 찾아라.]

말을 마치자마자 루갈은 근엄하게 팔짱을 낀 채로 잽싸게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참가자들은 사방에서 자신들을 중심으로 꾸물꾸물 모여들고 있는 엄청난 양의 검푸른 점액질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물론 그 전에, 여기서 살아남는 것이 먼저겠지. 이곳은 탐식의 왕 슬러그들의 둥지니까.]

늘 그렇듯이, 스테이지-5은 새로운 지옥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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