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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61)화 (161/393)

<던전리셋 161화>

철푸덕! 철퍽! 철퍽!

이러는 와중에도 검푸른 슬러그들이 폭포처럼 하늘 신전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물컹하고 걸쭉한 폭포였다.

“뽀뀨!?”

구석에서 혼자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고 있던 뽀뀨가 화들짝 놀라 고추밭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엔 최근에 숨겨 둔 간식 창고가 있었다.

아무리 위급한 재난이 다가와도 여기만 멀쩡하다면 문제없었다.

그런데 맙소사!

“뀨웃!?”

창고에 뼛조각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못된 고추 놈들이 자신의 간식까지 비료로 먹어 치운 것이다!

“뽀뀨! 뽀뀨, 뽀뀨!”

크게 분노한 뽀뀨가 두려움도 잊고 씩씩거리며 남은 간식을 찾아 고추밭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땅이 골고루 섞이며 토양이 점점 비옥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고추밭을 향해 진짜 재난이 닥쳐오고 있었다.

뽀뀨 입장에선 슬러그는 살아 있는 해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기에 둘러싸였다간 모든 숨구멍이 막혀 질식사할 것이고, 천천히 그 안에서 소화되어 갈 것이다.

꾸물렁, 꾸물렁.

밍기적 밍기적.

슬러그가 신전 바닥에 찐득하게 들러붙어 영역을 차츰 확장하고 있었다.

“뀨우우웃!”

고추밭 안에 홀로 고립된 뽀뀨가 동그란 눈을 부릅뜨고 한 편의 재난영화를 찍으려는 순간.

쭈우욱?

“뀨?”

토끼가 날아올라 뽀뀨의 목덜미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튈 거면 빨리 튑시다! 멍 때리고 있다간 온통 슬러그 밭이 되겠음! 이러다 내 고추밭도 다 망가지겠어요.]

토끼는 뽀뀨를 정다운에게 휙 떠넘기고는 해맑게 손을 흔들며 신전 밖으로 날아갔다.

[그럼 나는 부유석이나 다시 떼고 올게요! 그동안 님들은 여기 좀 청소하고 계셈! 그럼 수고링!]

휘잉-!

언제나 도망치는 게 잽싼 녀석이었다.

결국 바하무트와 나란히 슬러그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정다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신전이 온통 슬러그로 가득 뒤덮일 기세였다.

“무슨 피자 치즈한테 포위당한 기분이네. ……아, 피자 먹고 싶다.”

이 와중에 눈치 없이 꼬르륵거리는 배라는 놈이 야속했다.

바하무트가 기세 좋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주인님 제가 한번 얼려 보겠나이다. 블리자드!]

휘오오!

“오, 추위에 약하다더니 나름 효과가 있는데?”

차가운 냉기에 의해 슬러그들의 표면에 성에가 끼기 시작하자 움직임도 서서히 둔해졌다.

하지만 워낙 겉에 드러나는 면적이 넓다 보니 일부분만 냉각시키는 걸로는 시간 끌기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쩌적 쩌저적!

꾸물렁! 파창!

다른 슬러그들이 뒤에서 계속 밀려오면서 얼어붙은 부위가 결국 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안에서 걸쭉한 점액질 한 줄기가 바하무트를 노리고 촤악! 가래침처럼 쏘아져 나갔다.

[화가 났나 봅니다! 저에게 침을 뱉나이다!]

“무슨 스파이더맨 거미줄 뿜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의 공격도 하네.”

느림보인 줄만 알았더니 제법 성깔이 있었다.

부정형의 괴물이라 패턴이 자유로운 게 특징이었다.

진짜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싸웠더라면 정말 속절없이 잡아먹혔을 것이다.

물론 하늘 신전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마법 범위를 더 넓힐 수는 없어?”

[범위를 더 넓혔다간 뒤에 있는 고추밭까지 냉해를 입게 될 겁니다.]

“헐, 그럼 안 되지. 내가 어떻게 고생해서 키운 놈들인데!”

그가 딱히 고생한 건 없었다.

고생은 고추가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실하게 잘 여물어 가고 있는 고추들의 미래가 정다운에게 달려 있었다.

“일단 벽이라도 세우자!”

처처처척!

고추밭 앞에 기다란 흙벽이 생겨났다.

슬러그는 기본적으로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침을 뱉는 수준까진 가능해도, 핵이 포함된 부분이 억지로 벽을 기어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좋았어. 일단 급한 불은 껐고.”

꾸물렁?

……계속 시도하다 보면 기어오를 것도 같아서 조금 불안하긴 했다.

“안 되겠다. 고랑을 파서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자. 흙 뭉치기! 흙 뭉치기!”

그 근처에 땅을 파서 슬러그가 자연스럽게 중력의 영향으로 그 아래로 흘러내려 가기 시작했다.

“좋아! 됐어!”

[저는 여러 방향에서 한꺼번에 공격해 그쪽으로만 방향을 유인해 보겠나이다.]

바하무트는 곧바로 손을 휘저어 작은 눈덩이들 10개를 뭉쳐 냈다.

그리고 통통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며, 슬러그를 고랑 쪽을 제외하고 둥글게 포위하는 느낌으로 눈덩이들을 하나씩 배치시켰다.

그러자 그의 상태창이 변했다.

포만감 : 19/100 (%)

포만감 : 9/100 (%)

생명 에너지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갔다.

바하무트는 장엄하게 두 손을 번쩍 들고 명령했다.

[일어나라, 나의 분신들이여!]

그 말에 눈덩이들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더니 작은 눈사람으로 변했다.

[호우!]

[호우!]

[호우!]

미니 바하무트 10마리가 탄생했다.

정다운이 눈을 빛냈다.

“얘네도 마법도 쓸 수 있어?”

[미니 바하무트는 제 분신입니다. 미니 블리자드까진 가능하나이다.]

“좋네. 그럼 싹 얼리자.”

그 말에 미니 바하무트들이 일제히 아담한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호우!]

휘오오오!

후오오오오!

슬러그를 중심으로 미니 에어컨 열 개가 동시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까지 추웠다.

그 중심에서 꾸덕꾸덕 굳어 가는 슬러그들을 보며 정다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통한다!”

고랑이 있는 방향을 제외한 다른 모든 방향이 딱딱해지자, 자연스럽게 슬러그가 고랑으로 흘러내려 갔다.

정다운은 신나서 고랑을 계속 옆으로 이어서 만들어 나갔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이대로 신전 밖으로 빼 버리자.”

마침 그때였다.

[이얍! 부유석 뗐음! 더 뗄까요?]

토끼가 신호를 보내왔다.

그와 함께 하늘 신전이 점점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금세 부유섬 밑으로 쑤욱 빠져 나왔다.

“어? 그럼 일단 이쪽에 모아 두고 이사부터 가자.”

여기서 일시 정지!

일단 위에서 계속 떨어지는 슬러그를 막아 내는 게 급선무라, 일단 구불구불한 고랑 끝에 넓은 구덩이를 파서 슬러그를 그쪽에 전부 고이게 했다.

너무 깊게 파면 괜히 그림자 고양이 감옥까지 구멍이 뚫릴까 봐 옆으로 넓게 팠더니, 그곳에 ‘슬러그 연못’이 생겨났다.

“음? 나름? 경치가 좋은데? 이대로 함정으로 만들면 어떨까? 모든 걸 집어삼키는 연못인 거지.”

<불길합니다. 언젠가 슬러그가 연못 위로 타고 올라오는 순간 신전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말 겁니다. 몸속에 암 덩어리를 키우실 생각이십니까?>

괜히 솔깃한 마음에 알파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으나, 당연히 기각됐다.

“쳇. 아무튼 바하무트 운전해!”

[블리자드!]

쿠오오!

바하무트가 미니 바하무트들만 남겨 놓고 옆으로 이동해 능숙한 핸들링으로 신전을 운전했다.

그렇게 신전을 다른 곳으로 주차시킨 뒤, 정다운은 다시 그곳에 새로운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손 안 닿는다! 조금만 왼쪽으로 이동!”

[블리자드!]

“토끼야, 좀 더 위로!”

[예아! 부유석 하나 추가했음!]

“아직 낮아! 하나 더!”

[오키키!]

하나가 셋, 셋이 하나!

거의 합체된 슬러그 수준으로 완벽한 팀플레이였다.

하지만…… 여기도 꽝이었다.

“응?”

뭉그렁 뭉그렁.

새로 뚫은 구멍에서도 슬러그가 또 꾸물꾸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닌가벼.”

[다시 후진할게요!]

[브, 블리자드!]

다시 옆으로 옮기고 세 번째 구멍을 팠다.

그런데 거기서도 또 나왔다.

꾸물렁 꾸물렁?

[에잇! 다시 후진!]

그다음도.

흐물렁?

[에잇! 다시!]

또 그다음도.

꾸물…….

[그만해! 이 자식들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에라이! 무슨 크림빵도 아니고! 찌르기만 하면 앙고가 찍찍 삐져 나오냐아! 아, 크림빵 먹고 싶다.”

먹고 싶은 게 많았다.

정다운은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새로운 구멍을 계속해서 뚫어 나갔다.

덕분에 부유섬도 꼴이 점점 볼썽사나워져 갔다.

아래쪽에 숭숭 뚫린 구멍들에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슬러그가 밑으로 줄줄 새고 있었다.

“야. 차라리 저거 다 빠지면 그때 들어가는 게 낫겠다.”

[그러게요…….]

포기하기로 했다.

정다운은 결국 에너지가 조금 낭비되더라도 부유섬을 졸졸 따라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 후.

결국 처음 뚫었던 구멍에서 슬러그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그곳으로 얼른 들어갔다.

“좋았어. 도킹 완료!”

무사히 하늘 신전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는 와중에 신전 아래쪽에선 아주 난리가 나고 있었다.

“뭐야, 저것들은 또?”

키햐악! 캬웁! 캬아웁!

심연의 바다에서 심연어들이 때 아닌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먹이가 쏟아져 내리자, 심연어들이 입을 쩍 벌리고 바글바글 모여들어 슬러그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주 잔치 잔치가 열렸네요. 누가 보면 생일파티인 줄.]

“심연어가 슬러그도 먹어?”

황당해하는 정다운에게 토끼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먹나 보죠 뭐. 쟤네도 먹고 살려면 뭔들 못 먹겠음?]

“흠. 물고기들이 소라나 달팽이 같은 거 먹는 느낌인가. 아니, 플랑크톤?”

더 없냐는 듯 심연의 바다 위로 얼굴을 빼꼼 내민 심연어들을 바라보던 정다운이 문득 입맛을 다셨다.

“그럼 혹시 우리도 먹을 수……?”

[그만해, 이 돼지야!]

하지만 말려도 소용없었다.

정다운은 이미 식탐이 가득한 눈으로 슬러그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가 살살 타일렀다.

[자, 그러지 말고, 우리 쟤네부터 좀 처리합시다. 구석으로 잘 유인해서 아래로 떨어뜨리면 심연어들이 알아서 먹어 줄 거예요.]

“가만있어 봐. 정화라도 좀 해 보자고.”

[이 돼지 새끼야!]

입맛을 다시며 슬러그 연못으로 다가가는 정다운.

실제로 그동안 만났던 거의 모든 괴물들을 잡아먹어 본 그였기에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해골 병사야 뼈밖에 없어서 안 먹었다지만, 괴물들이 사람처럼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닌데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없었다.

“쩝. 일단 새로운 식재료를 봤으면 맛이라도 보는 게 인지상정. 내가 이래 봬도 전직 생산직이란 말이지.”

[현직이겠죠. 님 정도면 현역으로 뛰는 전문직 스페셜리스트임.]

“정화!”

파아앗!

정화 스킬이 원거리가 가능해진 건 정말 최고의 변화였다.

새하얀 정화 구체가 날아가 슬러그의 질퍽한 몸체에 스며들자, 놀랍게도 검푸른 색깔이 점점 옅어졌다.

“어? 진짜 되나 본데?”

[헐? 진짜로?]

토끼조차 솔깃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꾸물렁.

[에이, 뭐야. 다시 색깔 돌아왔잖아요.]

정화의 빛이 사라지자, 슬러그는 금방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다운은 포기할 생각 없었다.

“정화! 정화!”

파아아앗!

아무리 정화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집요하시네. 그냥 포기하셈. 포기하면 편해요.]

“흠. 부패의 흙이랑 비슷한 느낌인가? 아, 그러고 보니 색깔도 비슷하구나.”

모처럼 진지하게 고뇌하는 정다운의 입에서 침이 흐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먹을 것만 생각했더니 배가 고팠다.

극심한 허기가 열정을 압도했다.

“그럼 핵을 직접 정화하면 어떻게 되지?”

파아앗!

떠올라 있던 정화 구체가 방향을 틀며 슬러그의 녹색 핵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역시나 그 빛깔이 잠시 옅어지다가 다시 녹색으로 돌아왔다.

“음?”

그런데 그 순간 정다운의 눈이 반짝였다.

색이 다시 돌아오는 순간, 옆에 있던 다른 핵들이 살짝 녹색 빛을 뿜어낸 것이다.

“얘네들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

[네. 전체가 하나, 하나가 전체.]

“그럼 하나만 잘라 내서 실험해 보자고.”

정다운은 연못에서 고랑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러그가 흐르는 고랑의 양쪽에 흙벽으로 가림막을 만들어, 슬러그 중간을 뚝 끊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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