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60화>
정다운은 섬을 올려다보며 놀라워했다.
“뭐지? 던전이라는데? 설마 이 섬 전체가 던전인 건가?”
[그런가 본데요?]
“그럼 설마 저 다른 섬들도 다 던전인 건 아니겠지?”
[오, 그럴 수도 있겠다.]
“……?”
[왜요, 뭐. 뭔데.]
정다운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토끼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너는 전직 도우미면서 왜 아는 게 없냐.”
그 말에 울컥하는 토끼.
[너무하네! 안 와 봤으면 모를 수도 있죠! 내가 괜히 말단이었겠음? 그럼 님은 왜 그렇게 못생겼는데요? 흥.]
“뭐, 인마?”
정다운도 울컥했다.
“갑자기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그래도 나 정도면 제법……!”
[제법 못생겼죠. 님이 토끼였으면 아마 털이 제법 쥐똥 색깔이었을걸요? 물론 제법 안 굳어서 비료로도 못 써먹는 거.]
“헐, 말이 심하네! 내가 쥐똥이라니!”
[그렇게까진 말 안 했음! 얼른 쥐똥한테 사과해요!]
[저…….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닌 듯합니다.]
옆에서 바하무트가 쭈뼛거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섬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뭐?”
[앗?]
동시에 뒤를 돌아본 정다운과 토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놀랍게도 하늘 신전의 지붕이 되어 주던 부유섬이 점점 옆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부유섬들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속도는 느리지만 끊임없이 하늘 위를 떠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알파의 분석이었다.
정다운은 다급히 말했다.
“그럼 안 되지! 다시 쫓아가!”
[블리자드!]
콰오오오!
지금 주변에는 범독수리들이 자신들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상어 떼처럼 섬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섬 밖으로 나갔다간 바로 2차전 시작이었다.
“바짝 따라붙어!”
[알겠나이다! 그런데 언제까지고 이렇게 계속 마법을 썼다가는……!]
<에너지 낭비입니다!>
“나도 알아!”
정다운은 바하무트를 닦달하면서 동시에 하늘 신전과 섬을 하나로 연결할 방법을 고민했다.
“밧줄로 묶을까?”
[그럴 만한 밧줄이 있음?]
없다.
있다 해도 애초에 고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섬에 구멍을 뚫고 신전을 쑤셔 박자.”
[구멍을요?]
정다운의 머릿속에 우주 정거장 안으로 작은 우주선이 들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도킹(Docking).
우주결합(宇宙結合)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그래 봐야…… 현실은 그냥 또 땅을 파는 것에 불과했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그는 신전 중앙에 세워진 전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손을 뻗어 부유섬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손이 안 닿는 곳은 즉석에서 공중계단을 만들어, 그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멍을 계속 넓혀 갔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미친 듯이 땅을 파헤치는 정다운.
부유섬 던전 밑에 하늘 신전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은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런데 신기한 건 부유섬은 겉 표면만 태양석이었고, 그 안쪽부턴 평범한 흙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부유석이 아니라서 섬에서 뜯어내면 바로 중력의 영향을 받아 무거워졌다.
“대체 무슨 원리로 섬이 떠 있는 거지?”
[마법이겠죠, 뭐.]
“또 그놈의 마법, 편리해서 좋겠네. 누구는 손에 땀나도록 빗자루질하고 흙 뭉쳐서 만드는데.”
[내 눈엔 그게 더 신기해요. 편리하진 않지만. 아무튼! 이 정도 구멍이면 신전이 들어갈 수 있겠는데요?]
“그래. 신전 도킹!”
[예아!]
토끼는 재빨리 날아가 하늘 신전에 부유석을 추가했다.
그러자 하늘 신전이 부유섬 밑으로 쏙 들어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휴.”
[살았다. 이제 안전한 것 같아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다운과 토끼.
이번엔 진짜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던전이었다.
<신전에 누가 침입했습니다.>
“아오, 진짜! 쉴 틈이 없네! 또 뭔데?”
알파의 강력한 경고에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나는 정다운.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저들의 주거지를 침입한 것 같습니다.>
순간 정다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그건 그렇고…….]
류승우를 향해 코를 킁킁대던 루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렇군. 요즘 던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일들은 전부 네놈 짓이었구나.]
류승우는 조금 억울했다.
“아니, 딱히 내가 뭘 한 건 없는데…….”
[나를 속일 생각 마라. 나는 다 알 수 있다. 류승우 너의 몸에 사라진 도우미들의 냄새가 전부 묻어 있다.]
“나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냄새를 맡아 보는 류승우였다.
그 모습에 루갈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 맡아 봐야 헛수고다. 나에겐 마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인간에겐 무리다.]
“이봐. 겁을 먹든지, 시비를 걸든지 하나만 하지?”
[그렇다면, 미안하다.]
“…….”
그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순간,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꼬리를 마는 루갈이었다.
류승우는 또 할 말을 잃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루갈은 전부터 말수가 극히 제한적이고 무게만 잡다 사라지는 녀석이라 성격을 제대로 알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는 도우미라 해서 다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사적으로 말을 걸어오던 토끼.
탐욕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즐기던 바분.
또 나태하게 칩거하기 위해 자동화 시스템을 연구한 적극적인 게으름뱅이 세르파.
그에 비해 루갈은 참가자들에게 딱 필요한 말만 전달하고,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별 일 없다싶으면 냉큼 사라지던 칼퇴근의 명수였다.
킁킁?
루갈은 계속 류승우의 냄새를 맡으며 새로운 정보를 분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력의 냄새는 그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좌천당한 토끼 도우미가 아직 죽지 않고 네 곁에 붙어 있었나? 별일이군. 그 까다로운 녀석이 누군가한테 길들여지다니.]
“……?”
그건 정다운이 한 일이었다.
킁킁?
[흠, 그렇군? 토끼와 손을 잡고 바분과 세르파를 죽인 게 바로 네놈이었나. 지금 너 때문에 던전이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땡땡! 또 틀렸다! 그것도 정다운이었다!
이쯤 되니 마력의 냄새라는 것도 별로 신통치 않은 능력인 게 아닐까 싶은 류승우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루갈은 말을 멈추며 류승우를 향해 날카롭고 강인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네가 사고를 쳐 준 덕분에 나는 스테이지-2에 있던 던전을 모두 인수하고 격이 올랐다. 별로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건 감사하마.]
“격이 올랐다고?”
류승우도 정다운에게 어느 정도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 말의 의미는 대충 알고 있었다.
바분이 죽고 나서, 루갈은 그가 관리하던 스테이지-2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신속하게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
그 기세로 냉큼 스테이지-1도 인수하기 위해 넘어가 봤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곳엔 제단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스테이지-4까지 넘어와 봤더니, 여기도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단은 당연히 없었을뿐더러, 세르파조차 죽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이 제4 던전은 아예 리셋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네놈 때문에 정말이지 던전 꼴이 말이 아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닌 것인가.]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류승우는 진짜 억울했다.
[혹시 네게 묻어 있는 생명의 용의 냄새 때문인가?]
“……!”
루갈의 날카로운 눈빛에 류승우는 순간 움찔했다.
처음으로 그의 추측이 핵심을 파고든 것이다.
[정말 별일이군. 생명의 용이라니. 예전에는 그런 기척이 없었는데? 설마 스테이지-4로 넘어와서 뭔가 기연이라도 얻었나?]
“…….”
류승우는 고민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통 난감했다.
여기서 뭔가 자신이 잘못 대답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정다운에게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냥 속편하게 죽여 버릴까?’
류승우의 눈에 살기가 살짝 맺히려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루갈이 당당히 선언했다.
[더 물어보지 않겠다! 살기를 거둬라!]
……네?
류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안 물어보겠다고?”
[더 알아봐야 뭐 하랴. 여긴 어차피 내 관할 지역도 아니고,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다. 생명의 용이고 뭐고,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다.]
“…….”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루갈의 모습에 류승우의 기세가 또 한풀 꺾이고 말았다.
[나는 주제를 아는 도우미다. 도우미의 역할은 애초에 참가자들과 힘을 겨루는 게 아니라 옆에서 거드는 것! 힘을 시험하는 역할은 괴물들로 충분하다.]
“그럼 도우미가 하는 일은 뭔데?”
류승우의 물음에 루갈은 말했다.
[우리는 단지 집을 지키는 개일 뿐이다. 그런데 요즘 개들이 다 죽어서 집이 너무 어질러졌다. 이러다간 던전이 황폐해지고 남겨진 인간들 또한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미래는 결코 루갈이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현상 유지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안온한 일상이 좋다. 큰 변화를 싫어한다. 이상한 기연을 얻어 예상치 못한 힘을 각성해 버린 네놈의 존재도 꼴 보기 싫다.]
“그래서 싸우자고?”
파지직!
류승우의 양손에서 스파크가 튀자, 루갈은 눈을 번뜩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친절한 미소였다.
[그러니 내가 안전하게 다음 스테이지로 보내 주겠다. 동료들을 다 불러 모으도록.]
“…….”
그의 꼬리는 여전히 가랑이 사이에 말려 있었고, 시종일관 당당하고 자신 있게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의 본능은 류승우와 싸우면 죽는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기껏 이번에 격도 올랐는데, 이 상황에 죽는 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 * *
꾸물 꾸물.
온 사방에서 정체불명의 점액질 괴물들이 꾸물꾸물 신전을 향해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정다운은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건?”
아니, 저게 괴물이긴 할까?
끈적끈적한 검푸른 빛의 부정형 점액체.
그 위에는 물렁거리는 녹색의 핵들이 포도알처럼 송송 박혀 있었다.
“싸구려 액체 괴물처럼 생겼네.”
[무시하면 안 돼요.]
토끼는 긴장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들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점액 괴물 슬러그예요. 걸리는 모든 걸 다 먹어 치우고 이상 증식을 하는 탐욕의 왕임.]
“액괴 맞네. 그래서 약점이 뭔데?”
[불에 약해요. 추위에도 약하고. 하지만 이렇게 많이 모여 있으면 다 소용없어요. 이럴 땐 그냥 핵을 노려야 함.]
“……핵이 저렇게 많은데?”
정다운은 토끼가 가리키고 있는 ‘핵’이라는 걸 쳐다봤다.
청포도 사탕처럼 생긴 녹색의 핵들이 드글드글 모여 있었다.
[그게 문제죠. 슬러그는 군집체예요. 전체가 하나, 하나가 전체. 거의 불사나 다름없음.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이면 들어와도 슬러그의 본거지 한가운데로 들어오다니…….]
“그럼 그냥 나가자.”
[아?]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짓는 토끼.
정다운은 결정이 빨랐다.
“먹지도 못하는 애들이랑 싸워서 뭐해? 내가 무슨 승우 형도 아니고. 나가서 다른 구멍 뚫자.”
[…….]
빠른 태세 전환에 순간 얼빠진 표정이 된 토끼.
생각해 보니 굳이 싸울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