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58화>
흙이나 뭉치며 놀던 원시인이 드디어 철기 시대에 진입했다.
땅! 땅! 땅! 땅!
대장간이 생겨난 후로 정다운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매일매일 신나게 철을 두드리며 놀았다.
[진짜 놀고 있네…….]
토끼가 혀를 쯧쯧 찼다.
“그럼 던전까지 왔는데 놀아야지 공부라도 할까?”
[당연히 더 강해질 노력을 해야죠! 대장간이 생겼으면 당연히 초강력한 슈퍼 파워 무기부터 만들려고 하는 게 정상 아님? 이번 업적 보상도 봐요. 열심히 만들다 보면 장비에 특수 옵션이 각인된다잖아요. 그 좋은 효과를 놔두고 지금 만드는 게 뭐임?]
“음, 국자?”
[지금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라고요!]
“주방 도구는 처음에 한번 잘 만들어 두면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써먹을 수 있잖아.”
빠직.
따발따발 잔소리를 내뱉던 토끼가 결국 짜증에 못 이기고 소리를 꽥 질렀다.
[으아악! 이 인간 진짜 답답해 미치겠네! 그런 건 지금까지처럼 대충 나무 깎아서 해결하면 되잖아요!]
“네가 살림에 대해 뭘 알아! 집게도 만들고 프라이팬도 만들 거라고!”
정다운은 끝까지 당당했다.
“게다가 국자 만드는 건 뭐 쉬운 일인 줄 알아? 국자도 이렇게 어려운데, 무기를 내가 어떻게 만들겠냐고. 일단 이런 것들부터 차근차근 만들다 보면, 점점 요령도 붙고 실력도 늘지 않겠어?”
[아니죠. 몇 백번 몇 천번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무기부터 만들어야죠. 오랜 연구와 고된 연습을 겪어야 비로소 걸작이 나오는 거라고요. 그게 바로 장인의 길!]
“그러다 걸작이 안 나오면? 난 괜히 국자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
[……음?]
무적의 논리에 말문이 막힌 토끼였다.
말이 안 통하니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한 번만 더 국자를 무시했다간, 내가 국자로 국 퍼먹을 때 너는 숟가락으로 떠 줄 거야!”
[윽.]
뜬금없는 포인트에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정다운이었다.
하지만 한가한 시간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갑자기 정다운이 알파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틀림없습니다. 저는 정확한 좌표를 읽고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보기엔…… 어째 요즘 화살표 방향이 점점 위로 휘어지는 것 같은데?”
어느샌가부터 알파 네비의 화살표가 슬그머니 대각선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방향은 틀림없습니다.>
“기분이 좀 이상한데…….”
정다운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결국 그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하늘 신전이 점점 앞으로 이동할수록 화살표의 각도는 계속 위로 휘어져 갔고, 결국엔 정확히 ‘머리 위’를 가리키며 우뚝 서 버렸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냐?”
<방향은 틀림없습니다.>
며칠째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알파였다.
토끼가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제4 던전이 저 위에 있다는 말인가요? 워낙 깜깜해서 통 알 수가 없네…….]
“보이진 않지만 저 위에 산이나 절벽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제4 던전은 심연의 바다와 지형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했다.
그럼 이 근처 어딘가에 던전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럼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한번 위로 올라가 볼까?”
하늘 신전은 사실 앞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고도를 높이는 게 훨씬 쉬웠다.
[부유석을 추가하게요?]
“응. 네가.”
[쳇. 역시 그렇게 되나.]
정다운은 밑에 있던 골렘들을 다 위로 올라오게 하고, 신전 아래쪽에 부유석을 추가하는 건 비행 능력이 있는 토끼에게 전담시켰다.
“무게 중심 잘 봐 가면서 해야 된다? 균형이 안 맞으면 옆으로 기울 거야. 어허, 왼쪽으로 기운다! 잘 좀 하라니까? 아니, 오른쪽!”
[끼잉. 이거 언제까지 계속해요?]
“나도 모르지. 던전이 나올 때까지?”
[에효. 나 지금 좀 날파리 같지 않음?]
“아니, 똥파리. 큭큭.”
[제길슨.]
투덜이 토끼가 변기에 붙은 똥파리처럼 하늘 신전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신전에 부유석을 계속 추가해 나갔다.
신전이 점점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키햐악!
캬아오오!
군데군데 붙여 둔 태양석 때문에 신전 위를 날고 있던 심연어들이 질색하며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기회만 보이면 언제든 입을 벌리고 덤벼들 기세로 날카로운 이빨을 계속 딱딱 거렸다.
[어후, 음산해라. 어둠 속에서 갑자기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서 괜히 쫄리네요.]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잠수함이라도 타고 진짜 바닷속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나오기만 해. 다 갈겨 버릴 거니까.”
정다운은 모든 함정들과 골렘들, 그림자 하인들을 총동원해 최대한 습격에 대비했다.
[신전을 지키는 건 이 충직한 하인 바하무트에게 맡겨 주십시오.]
휘오오!
바하무트가 기세등등하게 사방으로 마법을 방출했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오든 보이는 족족 얼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심연어도 몸이 차가워지면 헤엄치는 속도가 극단적으로 느려져서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실제로 몇 번의 습격이 있었지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거뜬히 무찌르며 계속 위를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
하늘 위에서 갑자기 찬란한 빛이 새어 나왔다.
번쩍!
“……!”
[으익? 눈뽕!]
푸화악!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하늘 신전이 새까만 흑안개 위로 둥실 떠올랐다.
“……심연의 바다 위로 올라온 건가?”
주변을 둘러보자 일대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흑안개로 이루어진 새까만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자신들이 서 있는 하늘 신전이 섬처럼 떠 있었다.
“장관이네 이렇게 보니까 진짜 바다 같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 하나 잘 지었네.”
[그러게요. 실제로 이 밑에 물고기들도 득실거리고요.]
그런데 문제는 알파 네비의 화살표가 여전히 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 여기서 더 올라가야 된다고? 아무것도 없는데?”
<방향은 틀림없습니다. 좌표는 정확히 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 뭐……. 없으면 다시 내려가면 되니까. 갈 때까지 가 보자고.”
[그래도 어둠 속을 헤매는 것보단 밖으로 나왔더니 밝아서 좋네요.]
토끼는 이후로도 계속 부유석을 추가해 나갔고, 하늘 신전은 더더욱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위로 계속 올라갈수록, 처음엔 안 보이던 풍경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결국 실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헐.”
[대박.]
[맙소사…….]
그 위엔 크고 작은 섬들이 하늘 위에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아니, 저걸 ‘섬’이라고 보는 게 맞을까?
경악스럽게도 섬을 이루고 있는 암석들은 표면이 전부 ‘태양석’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섬이 아니라 ‘태양’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태양석이 뿜어내는 빛은 눈에 자극적이지 않은 자연광.
그 빛이 한곳에 뭉쳐져 있으니 멀리서 볼 땐 그냥 밝은 하늘로만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상상도 못 해 본 광경에 직면하자 정다운과 토끼, 바하무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다 뭐임? 왜 섬이 떠 있죠? 부유석 만든 거 님이 최초 아니었음?]
“그, 그러게? 너도 처음 본 곳이야?”
[당연히 저도 처음 봤죠. 제 주무대는 스테이지-1이라고요. 다른 곳은 별로 가 본 적이 없……. 아, 설마?]
토끼는 깜짝 놀라며 정다운이 부유석을 만드는 순간 받았던 업적의 내용을 떠올렸다.
[최초 업적 달성!]
“부유석 탄생!”
세계의 비밀을 엿봤습니다.
던전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세계의 비밀이라는 게 아무래도 이거였나 본데요?]
“아, 그런가.”
부유석을 탄생시킨 건 정다운이었지만, 그와 비슷한 원리로 하늘을 부유하는 암석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스테이지-5 ‘등천로(登天路)’에 진입했습니다.]
“응?”
[으잉? 등천로?]
갑작스런 메시지가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줬다.
등천로(登天路).
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왜 갑자기 스테이지-5야? 알파, 우리 제4 던전으로 가는 중 아니었어?”
<……아무래도 큐브에 남겨져 있던 좌표가 이쪽과 연계되어 있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인 것 같습니다.>
알파의 실수라기 보단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4 던전을 공략하면 참가자들은 세르파의 던전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게 될 테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제4 던전에 있던 제단이니까 그곳으로 가는 좌표보단 다음으로 넘어가는 좌표가 새겨져 있는 것도 말이 돼요.]
“야……. 이렇게 되면 내 동료들은 이제 어떻게 만나냐.”
일이 단단히 꼬여 버렸다.
동료들의 뒤를 따라가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먼저 앞질러 오게 된 것이다.
“일단 형한테 연락 좀 해 보자. 뭐 하고 있나.”
[그러죠.]
꿀꺽!
<정다운 : 승우 형? 뭐 하고 있어?>
귓말을 보냈으나, 답장이 바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바쁜가?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은 한참 전에 생겼죠. 그 던전 지금 바분이 깽판 쳐 놔서 붕괴 직전이랬잖아요.]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온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일단 동료들을 찾아서 다시 내려가는 게…….”
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크르렁!
쭈뼛!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맹수의 포효가 하늘 위에서 들려왔다.
“젠장.”
정다운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일이 꼬이려면 계속 꼬이나 보다.
범독수리 그리피오스가 이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나!
“이런 제기랄. 바하무트! 막아!”
[브, 블리자드!]
휘오오오!
갑작스런 전투가 벌어졌다.
상대는 그동안 몇 번이나 잡아먹었던 하늘의 포식자 범독수리!
하지만 동굴이 아니라 이런 하늘 위에서는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괴물이었다.
토끼는 사색이 되어 우왕좌왕하며 비명을 질렀다.
[히익! 우리가 저 태양석을 훔쳐 가려고 왔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동안 어디서 태양석 모아 왔나 했더니! 여기였구나!”
크르렁! 크롸락!
사자의 포효!
범독수리의 포크레인 같은 발톱이 하늘 신전을 우악스럽게 잡아 뜯자 땅이 크게 휘청거렸다.
“화살 발사대! 마취 화살 쏴! 던전 콩도 쏴!”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정다운은 가지고 있는 모든 함정들이 총동원해 범독수리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 * *
한편, 스테이지-4의 제4 던전은 완전히 붕괴 직전이었다.
쿠르릉! 콰르릉!
지진에 의해 땅이 갈라지고, 산에선 산사태가 발생했다.
하늘은 찢어질 듯이 천둥 번개가 내리꽂혔고, 모든 괴물들이 미쳐서 날뛰었다.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시체가 되어 산을 이루었고, 핏물이 온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걸터앉아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한 사내가 있었다.
“휴……. 이제야 좀 살 만하네.”
그는 바로 류승우였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 지경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게 만신창이, 아수라장이 된 이 던전에 이미 미래는 없었다.
리셋조차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진짜 어쩌지? 다운이한테 연락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