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57화>
태양석이 있어서 온도를 높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이건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었다.
화력을 극도로 증폭시켜 주는 대신 그만큼 장작이 엄청난 속도로 소진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다운은 토끼와 함께 화로 앞에 딱 붙어서 주기적으로 새로운 연료를 계속 보충해 줘야 했다.
“태양석!”
[여기요!]
화르륵!
“장작도!”
[요기요!]
화륵! 화르륵!
“장작 좀 더!”
[얍얍!]
화르륵! 푸확! 화륵!
불을 지피는 일은 생각보다 엄청 고된 일이었다.
계속 불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자꾸 어지럽고 숨도 턱턱 막혔다.
다른 것보다도 너무 더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전신에서 땀이 계속 비 오듯 쏟아져 내리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진이 빠지며 녹초가 되어 갔다.
“으아악! 더워!”
[맞아! 덥다! 으아아아! 너무 덥다아!]
진짜 더웠다.
끝도 없이 더웠다.
너무 더우니까 입에서는 자꾸만 미친놈처럼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히히? 님 왜 자꾸 웃으심?]
“으히히, 그러는 너는 왜 웃는데?”
[그러게요? 이히히. 나 왜 웃지?]
너무 어처구니없이 더워서 웃음만 자꾸 나왔다.
[히히히. 우리 지금 진짜 미친놈들 같지 않음?]
“그러게, 히히. 그만 웃을까?”
[그럼 울까요? 흐흐흑.]
“으흐흑.”
<ㅡ_ㅡ>
점점 정신줄을 놓아 가는 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알파.
한정된 텍스트만으로 지금 짓고 싶은 표정을 어떻게든 표현해 보는 중이었다.
푸쉭 푸쉭! 푸쉭 푸쉭!
이 핫한 분위기 속에서도 옆에서는 그림자 하인들이 전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정다운이 나뭇가지와 천 조각들을 얼키설키 엮어서 만든 원시적인 풀무가 화롯불 안에 지속적으로 공기를 주입시켜 주고 있었다.
[끼잉, 쟤넨 하나도 안 덥나 봐요. 세상 부럽네.]
“그러게. 그림자라서 그런가?”
그림자 하인들은 불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더운 것도 못 느꼈다.
틈만 나면 시뻘겋게 넘실거리는 화롯불을 자꾸 만지려고 하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조수였다.
정다운은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하무트! 바람이 약해졌다! 선풍기 강풍!”
[미니 블리자드!]
휘오오!
바하무트는 녹을까 봐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겠고, 멀리 떨어져서 정다운의 땀만 솔솔 식혀 주는 중이었다.
“더 시원하게는 안 돼?”
[지금보다 바람이 더 강해지면 화롯불에 영향을 줄 것 같나이다.]
“윽, 그럼 안 되지. 안 되겠다. 시원한 거라도 먹어 가면서 하자. 이러다 당 떨어져서 빈혈 올 것 같아.”
[수박화채도 다 떨어졌음. 선인장 하나 잘라 올까요?]
“아냐, 그보다 더 좋은 게 생각났어. 이럴 땐 역시 달달하면서 배도 든든한 걸 먹어야지.”
척.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소지품에서 꺼낸 건 바로 두유였다.
[두유? 그건 밍밍하기만 하고 맛도 없잖아요.]
콩을 직접 짜서 만든 두유라서, 편의점에서 파는 두유처럼 맛있지는 않았다.
토끼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짓자 정다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더 꺼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것만 먹으면 맛없지. 자, 어디 보자.”
척척척척.
소지품 안에서 이 날을 위해 조금씩 준비해 둔 식재료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의 재료 레시피>
쌀을 찌고 말리고 볶은 것.
볶은 콩, 볶은 들깨.
그동안 야금야금 모은 기타 등등 곡식 부스러기들.
그리고 설탕.
“흠, 종류가 좀 부족하지만, 아쉬운 대로 이렇게라도 먹어보자.”
[대체 뭘 만들려고 이렇게 많이 꺼내요?]
정다운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숫가루를 만들 거야.”
[미숫가루? 그건 또 뭐임?]
“기대해도 좋아.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테니까.”
[……?]
정다운은 두말할 것 없이 모든 곡식들을 절구 안에 다 쏟아 붓고, 타조 골렘을 불러내 주둥이에 절굿공이를 쑤셔 박았다.
“꾸왁?”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꾸왁! 꾸왁!”
쿵떡 쿵떡!
양이 워낙 적다 보니 순식간에 곡식들이 잘근잘근 빻아졌다.
정다운은 그 가루들을 싹 긁어모아 큰 바가지 안에 담았고, 그 위로는 먼저 꺼낸 두유가 하얀 빛깔을 찰랑이며 부어졌다.
“설탕은 필수지.”
마지막으로 설탕까지 첨가한 뒤, 그는 큰 국자로 열심히 미숫가루를 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마음 가는 대로 잘 섞이지는 않아서 하얀 수면 위로 굵게 엉킨 콩가루들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쩝. 역시 이런 건 쉐이커에 담고 흔들어야 잘 섞이는데. 아니면 믹서기라도…….”
던전엔 참 없는 것도 많아서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다운은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 믹서기 비슷한 건 어찌어찌 만들 수 있을지도?”
좋은 생각이 났다.
그는 장작 중에 Y자로 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골라, 나이프로 모든 면을 납작하게 다듬었다.
그러자 어설프지만 작은 선풍기 프로펠러 같은 모양이 되었다.
여기까지 50초.
프로펠러의 중심에 얇은 줄기를 동그랗게 엮어서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이러는 데 또 10초.
딱 1분 만에 작은 프로펠러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낸 정다운.
프로펠러의 구멍에 손가락을 걸고 최근에 새로 얻은 스킬을 사용해 봤다.
“돌리기!”
부아앙!
스킬 ‘돌리기’가 프로펠러의 회전력을 높여 주자, 그 안에서 선풍기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이러면 선풍기고 믹서기지 뭐.”
[스킬로 별 재롱을 다 부리네요.]
씨익.
정다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프로펠러를 물로 깨끗이 헹궈 낸 뒤, 거꾸로 뒤집어 미숫가루 안으로 쑤욱 집어넣었다.
“돌리기!”
후르르륵!
그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미숫가루가 골고루 섞이기 시작했다.
“오, 된다! 역시 될 줄 알았지!”
토끼는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 사람? 이 정도면 그냥 국자로 계속 저어도 섞였을 텐데, 굳이 이런 걸 만들어 쓴다고?]
게으른 건지 부지런한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바하무트! 차갑게 마실 거니까 이 안에 블리자드 좀 써 봐!”
[헉? 안 됩니다! 그러다간 주인님의 손에 동상이라도 걸릴……!]
“누가 얼어? 얘가 뭘 모르네.”
피식 웃는 정다운.
자신이 바하무트를 거두면서 받은 업적 보상이 무엇이던가.
<최초 업적 달성!>
“불사의 주인!”
- 보상 : 리치의 힘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내 걱정은 말고, 빨리 블리자드!”
[미, 미니 블리자드!]
휘오오!
후르르륵!
바하무트의 냉기가 소용돌이치는 미숫가루 위에 사르르 내려앉았다.
그러자 조금씩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미숫가루가 슬러시처럼 변해 버렸다.
“좋아, 완성!”
정다운은 입맛을 다시며 숟가락을 꺼내 들었다.
“어디 맛 좀 보실까?”
홀짝.
미숫가루 한 숟가락을 신중히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정다운.
“……!”
그 순간, 그가 눈을 부릅떴다.
차갑고 고소하고 달달한 미숫가루 한 모금이 그의 혀와 입천장을 타고 흐르며 걸쭉하게 식도를 긁고 내려간다.
꿀꺽.
미숫가루가 품고 있던 두툼하고 오소소한 냉기가 더위에 찌든 그의 전신을 관통하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즐거운 맛이었다.
“크으! 역시 이거지! 딱이야!”
꿀꺽 꿀꺽!
크게 감격하며 미숫가루를 숨도 안 쉬고 들이키기 시작하는 정다운.
그 모습에 토끼도 슬그머니 다가와 기웃거렸다.
[이게 다 된 거임? 겉보기엔 그냥 물 뿌린 진흙 같은데요?]
“일단 마셔 보고 말해. 분명히 말하지만 너 진짜 울 수도 있다.”
[흐으음?]
토끼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가 건네주는 미숫가루 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
그 순간 토끼의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더 말해 뭐 하랴!
단연컨대 미숫가루는 토끼가 즐길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음료였다!
[히이익! 이, 이 마약은 대체 뭐임? 나한테 지금 뭘 먹인 거야!?]
“맛있지?”
[세상 꿀맛!]
모두가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 순간.
<최초 업적 달성!>
“미숫가루를 만들었습니다!”
- 보상 : 미숫가루에 풍미가 더해집니다. (맛 +20%, 더위 내성 +30%)
업적이 달성되었다.
“와, 수박화채보다 더위 내성이 더 높네? 얼음 슬러시로 만들어서 그런가?”
[이젠 업적 달성되는 건 놀랍지도 않음?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요?]
토끼는 황당했다.
[이쯤 되면 님이 아무거나 만들어도 다 옵션 붙는 거 아님?]
“에이, 그건 아니지. 사실상 우리가 매 끼니마다 이것저것 뭔가 해 먹고 사는데, 그 음식들이 전부 업적을 달성하진 않았잖아?”
[어쨌든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무튼 앞으로는 이제 수박화채는 더 먹을 일 없겠네요? 미숫가루가 훨씬 옵션이 높으니까요. 같은 효과끼리는 중복이 안 될 거임.]
“뭔 소리야? 언제부터 우리가 옵션 따지면서 먹었다고. 맛있으면 먹는 거지.”
[그건 그러네요.]
하기야 옵션이 뭐가 중요하랴.
수박화채는 그 자체로 사랑이었다.
맛있으면 둘 다 먹으면 그만이었다.
“좋았어. 그럼 미숫가루 마시면서 계속 일하자고! 이러다 불 다 꺼지겠다.”
[예압!]
다시 힘을 내서 으쌰으쌰 화롯불을 지피는 둘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철갑조개의 껍질들이 용암처럼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쩐다! 쇳물 색깔이 세상 이쁨! 완전 황금색이에요! 아니, 거의 하얀색임!]
가마 위에서 쇳물의 상태를 확인한 토끼는 괜히 울컥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세상 어떤 황금보다도 아름다운 색감 아닌가!
[어이씨, 이거 왜 이럼? 저 갑자기 눈물이 터질 것 같아요. 뭔가 뿌듯함.]
기분이 이상했다.
저 뜨거운 열기를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심장 언저리가 괜히 근질거렸다.
이 기분은 설마……?
[사랑일까요?]
“그냥 부정맥 아냐? 심장병인 듯.”
[이 감성이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인간아.]
“그보다 뭐 하고 있어? 다 녹았으면 이제 틀에 부어야 된다고.”
그가 부르자 토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래로 내려왔다.
[앗! 조심하셈! 여기서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임!]
“자, 시작한다?”
[주인님! 마지막까지 힘을 내십시오! 이 바하무트도 응원하고 있나이다!]
꿀꺽.
정다운은 미숫가루 한 모금을 시원하게 들이키며, 가마 바로 앞으로 고생해 만든 시멘트 틀을 배치했다.
그리고 신중한 표정으로 쇳물이 찰랑이는 가마 한 가운데 쇠꼬챙이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그 위를 톡 건드리며.
“돌 깨기.”
쩌적!
동그라미가 그대로 뚜껑처럼 열렸다.
그 틈에서 노랗다 못해 새하얀 빛을 머금은 쇳물이 수돗물처럼 쫄쫄쫄 흘러나와, 그대로 시멘트 틀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푸쉬익!
쇳물이 모루의 형태로 천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 후.
“돌 깨기!”
쩌저적!
모루를 가두고 있던 시멘트 틀이 산산이 깨져나가며, 그 안에서 드디어 완성된 모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간이 완성된 것이다.
[업적 달성!]
“장인의 길!”
대장간을 건설했습니다!
당신의 뛰어난 기술력과 위대한 창조 정신에 던전이 크게 감격합니다.
- 보상 : 대장간에서 만드는 장비들에게 가끔씩 특수한 효과가 붙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