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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56)화 (156/393)

<던전리셋 156화>

며칠 뒤.

“좋았어! 굳었다!”

태양석을 팍팍 써서 열심히 말린 보람이 있었다.

드디어 모루의 틀이 완성된 것이다!

[혹시나 망할까 봐 소금 원형을 여러 개 만든 게 정답이었네요.]

“그러게. 전부 망하고 2개만 제대로 굳었어.”

망한 시멘트들은 전부 비율이 틀렸는지 아직도 굳지 않고 있었다.

“이 황금 비율을 따로 적어 놔야지.”

쓱쓱.

정다운은 백지 마법서를 꺼내 들고 이번에 알게 된 시멘트의 비율을 잘 정리해 두었다.

그 모습을 바하무트가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님만의 마법서가 점점 완성되어 가는 모습이 보기 좋나이다.]

“마법서? 이게?”

바하무트의 말에 정다운의 시선이 다시 마법서에 적힌 내용들을 흘낏 훑어 내렸다.

쥐똥 비료 황금 비율.

고추농사 관찰 일기.

시멘트 황금 비율.

기타 등등.

“…….”

마법서라기보단 차라리 인터넷 블로그 느낌이었지만, 자신만의 노하우를 정리해 둔다는 의미에서는 마법사들의 마법서와 쓰임새는 비슷했다.

“자, 이제 틀에서 원형을 제거해 보실까?”

[소금이니까 물로 녹인다고 했었죠? 그런데 이 두꺼운 암염을 어느 세월에 다 녹이나…….]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 커다란 소금을 녹이는 게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바하무트도 옆에서 도움이 되지 못해 괜히 미안해했다.

[송구스럽게도 얼리는 게 아니라 녹이는 건 제 전공 분야가 아니라 도움이 못 되어 드릴 것 같나이다.]

시멘트에 섞여 있는 습기에 녹지 말라고 엄청 짱짱하게 뭉쳐 놓았더니, 이걸 다시 물에 불려 녹여 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흙 뭉치기로 직접 떼어 내는 것도 쉽지 않겠는데요? 구멍이 워낙 깊고 좁아서 안쪽까지 손을 넣기 힘들잖아요.]

흙 뭉치기 스킬은 직접 손이 닿아야 쓸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조심조심한다 해도 구멍이 깊어서 팔이 잘 들어가지도 않고, 그러다 안쪽에서 틀이 깨지기라도 하면 형태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안전한 방법이라면 단 한 가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녹여 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정다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물이 왜 필요해? 더 좋은 방법 놔두고?”

[……?]

토끼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로 녹이는 거 아니었음? 소금이니까 물로 녹여 틀 안을 싹 비우고, 그 안에 쇳물을 넣는 거라면서요?]

“잘 기억하고 있네. 맞아. 처음엔 그러려고 했는데, 그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 떠올랐거든.”

[……이건 또 뭔 소리지? 왜 자꾸 의미심장한 척하셈? 뭔데 그래요?]

정다운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탈속한 현자 모드가 되어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고추 농사를 하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또 고뇌했지. 어떻게 만들어야 더 잘 만들었다고 소문이 날까? 그러다 결국 큰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그 깨달음의 결과가 바로 이것!

“정보 확인!”

정다운이 시멘트 틀 위로 손을 뻗으며 중얼거리자, 정보창 하나가 떠올랐다.

[소금 모루 +1]

- 내구력 : 100/100 (%)

- 옵션 : 리턴 (1레벨)

[응?]

토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느샌가 귀환의 투창에서 추출해 낸 ‘리턴’ 옵션이 소금 원형에 붙어 있었다.

[소금 원형을 강화했다고?]

정다운은 우쭐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리턴!”

파아앗!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멘트 틀 속에 갇혀 있던 소금 원형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그의 옆으로 뿅 하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멘트 틀과 소금 원형이 완벽하게 분리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오오? 오오오!]

토끼가 저도 모르게 입을 막고 함성을 질렀다.

“이러면 땡이지. 쉽지?”

[대박! 님 진짜 잔머리 쩌네요. 리턴 옵션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줄이야!]

“훗, 내가 좀 해.”

정다운의 콧대가 우주 끝까지 뻗어 나갈 기세였다.

토끼도 이번만큼은 그의 잔머리에 감탄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보통 리턴 옵션이라는 건 투창이나 단검, 표창 같은 던지는 무기에 주로 사용되는 옵션이었다.

그도 아니면 화살에 리턴을 걸어서 궁수들이 화살이 부족해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쓰이곤 했다.

그런데 그 옵션을! 설마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이렇게 하면 원형을 괜히 수고스럽게 틀 안에서 직접 빼낼 필요가 없는 거지. 물로 녹일 이유도 없으니까 굳이 소금으로 만들 이유도 없고.”

그뿐이랴.

이 방식을 사용하면 앞으로는 훨씬 정밀한 형태라도 어렵지 않게 철로 찍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짜 대박. 미친 잔머리다. 악마의 두뇌다.]

“훗. 언제나 좋은 리액션, 항상 감사한다.”

정다운은 좋은 방청객인 토끼에게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해 주었다.

이에 질세라 바하무트도 득달같이 나타나 칭찬 대열에 합류했다.

[정말이지…… 주인님의 악마 같은 지혜 앞에 아둔한 제 자신이 초라해질 정도입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발명! 거의 마법이나 다름없나이다.]

“훗. 마법인가.”

점점 코가 피노키오처럼 높아져 가는 정다운이었다.

하지만.

<허튼소리. 마법은 결코 이런 조잡한 방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단한 잔재주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

이 와중에도 분위기에 쓸려가지 않고 중심을 딱 잡아 주는 알파였다.

참으로 듬직하고 고마운 나쁜 자식이었다.

<그래도 이런 수작업으로라도 신전의 모습이 점점 구조를 갖춰 가는 모습은 너무 보기 좋군요.>

알파는 흡족했다.

처음엔 휑하기만 하던 하늘 신전이 점점 아기자기하게 꾸며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기본 골조는 골렘 노예들이 들어 나르는 역 피라미드 형태의 마차.

그 정중앙에는 높은 전망대가 우뚝 솟아 팽이처럼 중심을 딱 잡고 있었고.

전망대의 꼭대기에는 화살 발사대가 설치되어 미니맵과 함께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신전의 둘레를 따라 빙 둘러져 있는 던전 콩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들도 보기 너무 좋고.

그 안쪽으로 소담스런 고추밭이라든가, 화로라든가, 조금만 있으면 완성될 대장간까지…….

<이대로라면 하늘 신전이 이동식 전투 요새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난 그냥 소일거리 삼아 만드는 건데…….”

혼자 흥분하는 알파를 보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만 긁적이는 정다운이었다.

이동식 전투 요새는 무슨,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   *   *

“그나저나 얘네는 또 왜 이렇게 잘 자랐어?”

잠시 쉴 겸해서, 토끼에게 맡겨 놓은 고추밭을 돌아봤더니 엄청나게 실한 놈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겨우 좁쌀만 하던 녀석들이 어느덧 키가 우뚝 커져 그의 배꼽까지 닿고 있었다.

[후후, 이제야 제 고추밭을 방문해 주셨군요. 웰컴 투 고추밭.]

이때다 싶어 그 앞으로 쪼르륵 날아온 토끼가 중절모를 벗고 과장되게 인사하며 그에게 고추밭을 자랑했다.

[짠, 이걸 보시라! 우리 마이클과 존슨이 미라클 존슨으로 성장했습니다. 꽃도 폈죠.]

고추밭 곳곳에 예쁜 고추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 고추꽃이네? 내일쯤이면 열매도 맺겠다.”

[후후, 열매를 찾으십니까? 바로 여기 있습죠.]

“벌써?”

[짠!]

토끼가 자랑스럽게 보여 주는 손톱만 한 풋고추를 보며 정다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쥐똥 효과가 진짜 대박인데? 농사 시작한 지 겨우 5일 만에 열매가 맺히다니!”

정말 대박이라는 말밖에 안 나왔다!

대박인 건 단지 고추 농사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정다운은 무슨 농사를 짓더라도 그 기간을 바짝 단축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효과는 거의 30배 이상!

비료의 비율을 바꾸면 그 기간을 더 단축시킬 수도 늘릴 수도 있었으니, 정말 굉장한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물은 잘 주고 있지?”

[물론이죠. 우리 애들 성장이 너무 빨라서 그런지 물을 겁나 많이 먹더라고요. 아무튼 내일쯤 다시 오셈. 우리 미라클 존슨도 더욱 짱짱맨이 되어 있을 거임.]

관찰일기도 꼬박꼬박 쓰고 있는 토끼였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 날.

정다운은 결국 중지보다 더 실하고 굵은 풋고추를 수확할 수 있었고, 토끼는 가슴을 쥐어짜며 오열을 했다.

[어흐흑! 이 잔인한 인간! 내 소중한 고추 새끼들을 그렇게 가차 없이 뜯어 내다니!]

“아까워하지 마. 첫 수확을 하면 열매가 더 많이 자란다더라고.”

[호오?]

그의 말은 정확했다.

<도민준 : 고추 농사는 원래 첫 열매를 제거해 주고 나면 더 많은 열매가 열린답니다.>

주말 농부 출신 도민준의 예언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또 다음 날이 되자, 고추밭에는 새빨갛게 익은 실한 고추들이 거의 5배 이상 달려 있었다.

[만세! 고추 부자다!]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치는 토끼 농부의 마음은 더없이 행복하고 뿌듯했다.

그 마음에 감동해 정다운도 뭔가 뜻깊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첫 열매는 네가 먼저 먹어 볼래?”

[헐? 그, 그래도 될까요? 그거 요리 안 해도 먹을 수 있는 거였음?]

“그럼 당연하지. 네가 처음으로 키워 낸 작물이니만큼 첫 시식은 너에게 바친다.”

[오오!]

정다운은 특별히 제일 예쁘고 실한 풋고추 하나를 골라 토끼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든 토끼.

감개가 무량했다.

난생처음 제 손으로 직접 키워 낸 첫 작물이 아닌가!

토끼는 황송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려 고추를 한입 베어 물었다.

와삭!

그리고…… 꽥! 비명을 질렀다.

[매워!]

“푸하핫!”

[갸아악! 끼에엑! 무울! 물!]

토끼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물을 찾아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미친개처럼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폴짝거리는 모습이 진짜 처절해 보였다.

“푸하하!”

[두, 두고 보자, 이 악마!]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신나게 낄낄거리는 정다운의 미소는 악마보다 더 악마 같았다.

*   *   *

사실 요즘 가장 바쁜 건 골렘들이었다.

골렘들 중 절반은 하늘 신전을 들어 나르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 위로 올라와 석회암을 석회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압도적인 힘으로 돌을 빻고 찧고 잘근잘근 가는 일이야 말로 골렘들의 천직이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일했더니 그 양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갔고, 정다운은 그걸 싹 시멘트로 만들어 소지품에 보관했다.

“와, 이게 다 얼마야? 이 정도면 빌딩 하나 지어도 남겠네. 아니다. 이걸 전부 물로 반죽해 놓고 소지품에 보관해 두면 어떨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흙벽돌을 꺼내서 괴물들을 공격하듯이, 이 시멘트 반죽을 괴물들에게 던진다면 어떨까?

시멘트는 기본적으로 접착제였다.

엄청난 무게를 지닌 접착제가 괴물들의 몸에 들러붙는다면 이동 속도와 움직임을 방해하는 훌륭한 공격 수단이 되지 않을까?

이 계획을 다 들은 토끼도 솔깃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님답지 않게 제법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지?”

그 와중에 알파가 눈치를 보며 의견을 꺼냈다.

<그전에 일단 시멘트로 대신전의 보수부터…….>

“재촉 좀 하지 마. 일단 모루부터 만들고 한다니까?”

<그러니까 그 모루는 대체 언제 만드시는 겁니까?>

“응, 지금부터 할 거야. 이제 대망의 마지막 과정만 남았다고.”

드디어 모루 제작의 마지막 과정, 쇳물을 녹여 낼 차례가 다가왔다.

“사실상 이게 가장 핫하고 빡센 일이지. 으챠!”

훌렁!

본격적으로 뜨거운 불 앞에서 일을 해야 해서 정다운은 일찌감치 웃통을 벗어 던지고 작업에 임했다.

드러난 그의 몸매는 제법 탄탄했다.

살이 쪘다고 항상 토끼가 놀리긴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쫄쫄 굶고 다니는 일반 참가자들에 비해서였고, 토실토실 물이 오른 적당한 근육들이 보기 좋았다.

[이 와중에 게을러서 복근은 없는 거 봐.]

“무슨 말씀! 남자라면 역시 복근보단 잔근육과 툭 불거진 힘줄이지!”

[그건 그냥 노가다 근육이고요. 세상 슬픈 근육이네!]

“그래, 내가 미안하다. 그만 화 풀라고.”

[흥. 이틀은 더 화낼 거임.]

고추 먹고 단단히 삐쳐 있는 토끼였다.

하지만 정다운의 입꼬리는 여전히 삐죽삐죽 올라가 있었다.

“푸흡.”

[아, 웃지 말라고요! 진짜 매웠다고!]

토끼의 눈총에 정다운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 내며 먼저 화로 위에 흙을 바짝 구운 가마를 올려 쇳물을 담을 바구니부터 만들었다.

손 가는 대로 만들다 보니, 언뜻 보면 생수통이 올라간 정수기 같은 구조가 되었다.

생긴 건 몹시 투박했지만.

촤르륵!

그 가마 안에 철갑조개의 껍질들을 깡그리 쏟아부었다.

참고로 철이 녹는 온도는 약 1500도.

사실 온도를 바짝 올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이 철갑들이 골고루 다 녹을 때까지 그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막바지 작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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