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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54)화 (154/393)

<던전리셋 154화>

[그나저나 여기에 보물 같은 건 없나요?]

<없습니다.>

[에이, 그럴 리가. 명색이 용의 사도들의 묘지인데 진짜 없어요? 아무것도?]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보이는 토끼에게 알파가 덤덤히 대꾸했다.

<만일 보물이 남아 있었다 해도 종말의 용의 잔당들이 다 수거해 갔겠지요.>

[히엑? 그럼 진짜 없다고요?]

<이곳에 남겨진 건 오로지 과거의 쓰라린 패배의 기록들뿐입니다.>

[휴, 개털이라니. 뭔가 대단한 거라도 숨겨져 있을 것 같아서 기대했는데.]

<…….>

언제나 변함없는 토끼의 막말에도 알파는 흔들림이 없었다.

애초에 종말의 용 출신이었던 토끼가 생명의 용을 지키다 죽은 존재들에게 뭔 공감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세상에서 강제로 끌려온 정다운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알파는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문득 정다운이 물었다.

“아, 맞다. 그럼 여기에 알파의 무덤도 있겠네?”

<저는 이곳에 없습니다.>

“왜?”

<저는 최초이자 최후의 용의 사도. 마지막 순간까지 에르테아 님을 보위하다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

[어우야…….]

이 말에는 아무리 정다운과 토끼라도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의 무게는 결코 같지 않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보다는 자신이 가까이 지내던 친구의 죽음이 훨씬 무겁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물론 죽고 나서 만난 친구였지만 말이다.

그때, 불쑥.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인님께 충성 봉사하시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나이다.]

[엄머, 깜짝이야?]

“어우, 깜짝 놀랐네. 언제 왔어?”

갑자기 옆에서 바하무트가 얼굴을 불쑥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뭔데? ……헐, 설마?”

눈치 빠른 정다운의 눈이 커졌다.

바하무트가 가져올 만한 좋은 소식이라면, 하나뿐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바하무트는 정다운을 향해 가슴을 한껏 펴고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자랑했다.

[세 번째 그림자 고양이를 길들였나이다.]

덥썩!

“나이쓰! 잘했다! 진짜 잘했어!”

[으허허! 뭐 별말씀을. 으허허허……!]

크게 기뻐하며 바하무트를 얼싸안는 정다운의 특급 칭찬에 바하무트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 무덤이고 나발이고 그게 뭐가 중요할까.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지만, 자신에게 충성 봉사하는 그림자 하인이 더 늘어난 마당에.

“이제 돌아가자.”

석회암도 원하는 것 이상으로 다 모았으니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   *   *

“다시 출발!”

하늘 신전으로 돌아온 정다운이 돌부리에 한 발을 걸치고 해적 선장 같은 자세로 멋지게 호령을 했다.

<방향을 잡겠습니다.>

번쩍!

곧바로 알파 네비가 커다란 화살표를 띄워 올렸고, 그 방향을 따라 골렘들이 하늘 신전을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수많은 다리가 달린 역삼각형 괴물 같지만, 정다운 눈에는 마냥 멋있었다.

다행히도 심연의 바다 한가운데 떡하니 주차되어 있던 하늘 신전은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심연어들에게 전혀 공격받은 기색이 없이 멀쩡했다.

애초에 여기에 생명체가 타고 있지 않으면 하늘 신전은 그냥 흙과 돌로 이루어진 지형지물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고양이 어디 있어?”

정다운은 바하무트가 길들였다는 그림자 고양이를 찾았다.

[여기 숨어 있나이다.]

바하무트가 가리킨 곳에는 사방이 트여 있는 공터 한가운데 쇠꼬챙이 하나가 일자로 꽂혀 있었다.

그런데 저 길고 가느다란 쇠꼬챙이 그림자 속에 작은 그림자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길게 쭉 뻗은 상태로 드러누워 있었다.

“저 녀석이야?”

[풉. 숨바꼭질 실력 쩌네.]

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그림자 고양이은 본능적으로 그림자 속에 숨고 싶어 한다.

어떻게든 몸을 숨겨 보겠다고 낑낑대며 그림자 안에 몸을 구겨 넣고 있는 모습이 곰살맞고 귀여워 보였다.

[혹시나 이놈이 다른 곳으로 도망칠까 싶어서 다른 그림자들이 생기지 않게 주변을 싹 치워 버렸나이다.]

“잘했다, 잘했어.”

굳이 생색내지 않아도 바하무트가 열심히 해 준 게 눈에 보였다.

열심히 빛을 먹여 악몽을 싹 뱉어난 그림자 고양이는 정다운을 봐도 더 이상 지서연의 환상으로 변하지 않았다.

바하무트가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는 것도 감수하면서까지 끈덕지게 빛을 먹여 키운 결과였다.

바로 이 상태가 그림자 비술이 먹히는 순수 고양이 상태였다.

“그림자 비술!”

딸랑 딸랑!

미오옹-!

“고양이마다 울음소리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게 재밌단 말이지.”

스르륵.

“으흐흐. 좋다, 좋아.”

새로운 그림자 하인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정다운의 입꼬리가 헤벌쭉 귀에 걸렸다.

이로써 그림자 하인은 3명 째!

그만큼 작업 속도도 빨라진다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짜릿해서 소름까지 돋았다.

[흐음. 얘네들 특성을 잘 활용해서 뭔가 전투에 효과적으로 접목시키는 방법이 없으려나…….]

신중한 눈빛으로 그림자 하인들을 살펴보며 고뇌하는 토끼의 곁으로 정다운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야, 쓸데없는 고민 말고 이거나 거들어.”

울컥!

[아니, 전투가 쓸데없다니! 이젠 아주 당당하게 전투를……! 응? 그건 또 뭐 하는 거임?]

“고추밭 만드는 중이야. 대장간 만드는 게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그 전에 먼저 씨라도 심어 놓으려고.”

정다운은 하늘 신전 구석에 고추농사를 지을 작은 화단을 만드는 중이었다.

흙을 뭉치는 건 스킬로 하면 쉬운데, 농사짓기에 좋은 땅은 찰지게 뭉쳐진 흙을 다시 펼쳐내고 골고루 갈아 내야 했다.

[아하, 이건 수작업이네요?]

“응. 쟁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 급한 대로 비슷하게 만들어 봤어. 이걸로 밭을 갈자고. 자, 이건 네 쟁기야.”

[이게 뭐가 쟁기임?]

정다운이 건네준 건 쇠꼬챙이 여러 개를 노끈으로 묶은 것이었다.

“날아다니면서 이 뾰족한 부분으로 갈면 되잖아? 조금만 참아. 대장간 완성되면 진짜 쟁기도 만들 거니까.”

[원시인도 이것보단 좋은 것 쓰겠네요.]

토끼는 투덜대며 쇠꼬챙이들을 두 팔로 안아 들고 날아다니며 땅을 갈기 시작했다.

연장이 좋지 않아 몹시 어설펐지만 밭 사이즈가 큰 것도 아니고 정다운도 옆에서 같이 하니까 그럭저럭 할 만했다.

[뭐지? 나 지금 좀 소가 된 기분임.]

“소한테 사과해. 소는 너보다 천만 배 일 잘한다고.”

[와, 너무하시네. 지금 설마 얼굴도 모르는 소랑 나를 비교하신 거임? 내가 소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요?]

“소였으면 우유도 짜먹을 수 있잖아.”

[헐? 그거 지금 성희롱 발언임! 내 전생이 마녀일지도 모르는 판국에 우유라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너 요즘 은근히 그 마녀 컨셉으로 미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네 전생이 마녀인 게 말이나 되냐? 누가 봐도 토끼 인형이구만.”

[토끼 인형이 토끼로 환생한다는 건 상식적이고요?]

둘이서 아웅다웅하는 사이 밭을 다 갈았다.

여기에 정다운은 특별히 이번에 구해 온 괴물 쥐들의 똥을 갈아서 골고루 뿌렸다.

사실 비료라고하면 지금까지 써오던 정화된 뼛가루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쥐똥의 효과가 궁금해서 쥐똥만 써보기로 했다. 

“음. 비료는 많을수록 좋으려나? 한번 도민준 아저씨한테 물어볼까?”

[도민준 아재요?]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전에 정다운은 최근에 용의 사도로 임명한 ‘도민준’에게 귓말로 문의를 넣어 보기로 했다.

도민준은 정다운에게 고추를 줬던 석정호를 따르는 생산직들의 대표였다.

그때 토끼는 왜 전투에 하등 도움되지도 않는 생산직 따위를 용의 사도로 임명하냐며 투덜댔었지만, 정다운에겐 다른 누구보다도 도민준이라는 존재가 가장 소중한 인재였다.

한 가족의 가장이자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도민준의 인생은 사실 특별한 일이라곤 전혀 없는 뻔한 인생이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인생을 다 바쳐 가며 일에만 매진하던 전형적인 50대 남성.

그 고되고 뻔한 인생 속에서 그나마 유일한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는 일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주말마다 가족들과 함께 다녀오던 ‘주말 농장’이었다.

“던전에서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 찾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찾아보면 많겠죠 뭐. 대부분은 다 죽었겠지만.]

잠시 후, 정다운의 호출에 도민준의 기나긴 답장이 돌아왔다.

<도민준 : 쓸 만한 비료를 찾으셨다고요? 정말 잘됐습니다! 비료를 쓴다면 농사 기간이 훨씬 단축될 겁니다. 고추 농사는 땅의 지력을 많이 소모하거든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고추농사를 한번 지으면 다음 해 1년은 땅을 쉬게 해 줘야 돼요.>

[어우, 장문톡 쩌네. 아재요.]

토끼가 종알거리는 건 잠시 무시하기로 했다.

<도민준 : 괴물의 배설물이라면 일단 독을 좀 빼야 하지 않을까요? 정화 스킬을 충분히 거시고, 고추밭으로 쓸 땅과 4:6 비율로 섞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익? 그렇게나 많이? 그럼 거의 흙반 똥반이 되는 거네요?]

질색하는 토끼 옆에서 정다운은 그가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이럴 때는 참 마녀의 서재에서 얻은 백지 마법서가 참 유용했다.

“4 대 6이라고? 혹시 모르니까 구획을 나눠서 3 대 7과 5 대 5도 실험해 봐야겠다.”

그는 바로 괴물 쥐의 회색 똥을 곱게 갈아 비율에 맞춰서 땅에 충분히 섞었다.

그리고 그 둘레에 고랑을 파고, 물도 충분히 적셔 주었다.

그 옆에는 광합성을 위한 태양석도 줄줄이 설치했다.

그러자 보기 좋게 네모난 고추밭이 탄생했다.

<도민준 : 아, 그 전에 먼저 고추씨로 모종부터 만드셔야 하는데, 그건 저번에 가르쳐 드렸죠?>

도민준의 조언은 이후로도 쉴 새 없이 흘러들어 왔다.

던전에서 계속 무시만 받다가 자신이 아는 분야를 물어보자 도민준도 흥이 난 것 같았다.

전투직이 아니라 평소에 전투를 하지 않으니 귓말을 보낼 여유도 충분했다.

물론 기껏해야 주말 농사 경험 정도로 그가 제대로 된 농부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선 그 정도 경험으로도 너무나 값진 조언이었다.

정다운은 이미 그가 알려 준 대로 앞서서 고추씨를 물에 충분히 불려 놓은 상태였다.

[앗! 그러고 보니! 얘네 새싹이 나왔어요!]

구석에 잘 펼쳐 둔 씨앗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온 토끼가 엄청 호들갑을 떨면서 씨앗 하나를 손에 들고 폴짝폴짝 달려왔다.

좁쌀만 한 씨앗에 연두색 새싹들이 쑥쑥 자라나 있었다.

[대박! 진짜 대박임! 나 던전 리셋 말고도 이렇게 새싹이 난 모습은 처음 봐요!]

토끼가 흥분하는 것도 당연했다.

“잘됐다. 그럼 이제 씨를 싹 뿌려 놓고, 그동안 우린 대장간이나 만들자.”

[에효, 뭔 놈의 일이 그렇게 많음?]

“그럼 여기서 뭐 하게? 어차피 이것 말곤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지금 이 순간도 하늘 신전은 알파 네비가 알려 주는 방향대로 열심히 이동 중이었다.

그림자 하인들은 심연어들을 막아 내고 있고.

여기서 가장 할 일이 없는 건 정다운과 토끼뿐이었다.

“이런 게 노는 거지 뭘. 너는 씨를 뿌리렴. 나는 그동안 대장간을 만들 테니.”

콧노래까지 부르며 슬슬 대장간 만들 준비에 착수하는 정다운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게임도 없고 영화도 없는 던전에서 이러고 노는 게 사실상 제일 재밌는 일이긴 했다.

[에효. 대충 뿌리면 되겠지 뭐.]

이런 게 하나도 재미없는 토끼는 잘 꾸며진 고추밭 위에 설렁설렁 씨를 뿌렸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뿌려진 고추씨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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