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153)화 (153/393)

<던전리셋 153화>

태양석이 있는 이상 어둠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정다운은 태양석을 두른 헬멧을 두 개 만들어 토끼와 나눠 쓰고 동굴 속을 내 집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한 가지 아쉬운 일은, 바하무트에게는 몸이 녹을까 봐 태양석으로 만든 물건을 들려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넌 그냥 돌아가서 그림자 고양이나 길들이고 있어.”

[명을 받들겠나이다.]

바하무트를 하늘 신전으로 보내 버리고 다시 노가다를 시작하는 정다운.

아니, ‘정다운들’이었다.

콱콱! 쩌적! 쾅!

니야앙! 미야앙!

하나가 셋. 셋이 하나.

곡괭이질이 무슨 방직 기계처럼 똑같은 힘과 속도로 순차적으로 내리쳐졌다.

한번 관성이 붙으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돌 하나를 캐면, 그 바로 뒤에 실하게 생긴 석회암이 또 나타나 그를 유혹했다.

아무 생각 없이 벽을 무작정 파들어 갔다간 동굴이 무너질 위험도 있어서, 정다운은 계속 장소를 옮겨 다니며 곡괭이를 휘둘렀다.

그러다 안에 남아 있던 괴물 쥐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끼륵!

[전방에 쥐돌이 2마리 출현!]

일하기 싫어서 자기는 망이나 보겠다던 토끼가 재빨리 생색을 냈다.

그러면 이렇게.

“찌르기!”

니야앙!

끼낏!

정다운의 명령에 그림자 하인들이 곡괭이 대신 창을 들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괴물 쥐들의 급소를 찔렀다.

[후후, 역시 쥐는 고양이로 잡아야 제 맛이죠.]

하지만.

퍼펑!

니야옹!

괴물 쥐를 죽이다가 그림자 하인 하나가 날카로운 발톱에 스쳐서 그만 터져 버렸다.

[에잉, 약골들!]

“그러게. 그림자 하인은 다 좋은데 너무 약골인 게 흠이란 말이지.”

정다운은 혀를 차며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도망쳐 온 그림자 고양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딸랑-

“자, 다 싸웠으면 계속 일하자.”

니야앙.

가혹한 주인님과 그걸 또 군말 없이 따르는 충성스런 노예들이었다.

*   *   *

“이제 슬슬 길이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앞에 갈림길이 나타나자 정다운은 일단 걸음을 멈췄다.

[갈림길이네요. 어디로 가실?]

불규칙적이고 어두운 동굴 속.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길에 표시라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푯말을 만들자.”

그는 즉석에서 나무 푯말을 하나 만들어 태양석이 박혀 있는 부유석 위에 매달았다.

그러자 어두운 데서도 자체 발광을 하는 공중 간판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정다운 광산 (1)]

게이트로 돌아가는 길 ⇨

“좋았어. 이 정도면 되겠지?”

정다운이 흡족한 얼굴로 손을 탁탁 털었다.

이름까지 써 뒀더니 마치 여기가 자신의 전용 광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토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숫자 1임? 2도 만들게요?]

“응. 갈림길이나 헷갈릴 것 같은 길목마다 만들려고.”

내친김에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 갈림길 앞에 푯말을 추가로 더 만들었다.

[정다운 광산 (2)]

갈림길A : 이쪽 길부터 작업 중!


[정다운 광산 (3)]

갈림길B : 여긴 아직 미개척 지역!

“자, 이렇게 해 놓고 2번 길로 들어가면 길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지? 지름길을 번호로 기억해 두는 거니까.”

[오호라. 제법 똘똘한 방법이네요. 이러면 확실히 나중에 되돌아올 때 헷갈리진 않겠어요. 그런데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어요?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게이트 열고 빠져나가면 되잖아요.]

<매번 게이트를 여는 건 사치입니다. 생명 에너지는 땅 파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 넵.]

알파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토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 지역에 게이트가 여러 개 생기면 정다운 입장에서는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하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었고…… 사실 그냥 푯말을 만들어 두면 예쁠 것 같았다.

그렇게 정다운이 광산의 영역을 넓혀 나갈 때마다 푯말도 점점 추가되었다.

[정다운 광산 (4)]

여긴 막다른 길! 허탕!

뒤로 돌아가시오.


[정다운 광산 (5)]

바닥에 물웅덩이 있음! ㅠ0ㅠ

또 발 빠지면 안 되니까 흙벽으로 막아 둠.


[정다운 광산 (6)]

이쪽은 석회암 다 캤음! 끝!

더 캐다간 동굴 무너질 듯!


[정다운 광산 (7)]

여기도 다 캤음! 끝끝! >_<)/


[정다운 광산 (8)]

이쪽 길에서 괴물 쥐 3마리 나옴.

혹시 또 나올까 봐 벽으로 막아 둠.


[정다운 광산 (9)]

낭떠러지!! 떨어질 뻔했음!

절대 들어가지 말 것! -_-;;

[뭔 일기장임? 점점 내용이 주절주절 길어지잖아요.]

“이게 은근 다시 읽는 재미가 있는 거라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읽어 볼 거야.”

[어휴, 돌이나 캐고 다니면서 재미란 재미는 다 찾아 즐기시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토끼도 푯말 끝에 그림 하나씩을 슬쩍 슬쩍 그려 넣고 있는 중이었다.

*   *   *

“우웁, 이 냄새는 또 뭐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걷다 보니 고약한 냄새가 나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정다운이 코를 막고 주변 공기를 정화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눈깔사탕 같은 동글동글한 회색 덩어리들이 바닥에 잔뜩 쌓여 있었다.

“뭐야, 이건?”

그 정체를 토끼가 알아봤다.

[아, 이거 쥐똥임. 괴물 쥐들이 싸는 거 많이 봤어요.]

“쥐똥이라고?”

그 말을 듣고 보니 발치에 굴러다니는 동글동글한 갈색의 덩어리들이 정말 똥처럼 보였다.

배설한 지 얼마 안 되는 건 갈색.

그 뒤에 굴러다니는 회색 돌멩이들은 수분이 다 날아가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오래된 쥐똥이었다.

“여기가 괴물 쥐들의 화장실인가보지? 그런데 왜 밖에서 안 싸고 냄새나게 여기다 싸질러 놨지?”

[나름의 영역 표시겠죠, 뭐. 배설물로 영역 표시를 하는 건 괴물들도 마찬가지니까요.]

괴물 쥐들이라고 다 같은 편인 건 아니었다.

서로 무리가 다르고 영역 싸움도 치열했다.

다른 무리들에게 이 동굴이 자기들 영역이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일부러 한곳에 모여서 배설을 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양이 너무 많았다.

“똥으로 사막이라도 만들 기세네. 싸는 놈만 있고 치우는 놈은 없나?”

[쥐돌이들한테 뭘 바라셈? 걔네야 원래 먹고 싸는 게 일인데요.]

애초에 괴물 쥐들은 ‘던전의 청소부’의 역할이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던전을 침략해 눈에 보이는 모든 걸 게걸스럽게 씹어 삼키는 놈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스테이지-1의 참가자들은 놈들에게 쫓기다가 필연적으로 최종 유적지까지 도착하게 된다.

뒤처지면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은 결국, 이 쥐똥 안에는 그동안 놈들에게 잡아먹힌 수많은 참가자들의 피와 살이 들어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제 보니 화장실이 아니라 무덤이었네.”

정다운의 표정이 좋지 않자 토끼가 촉새처럼 끼어들었다.

[사람만 먹었겠어요? 쥐돌이들은 진짜 닥치는 대로 다 먹는다고요. 시체가 입고 있던 옷도 먹고, 아이템도 먹고, 괴물들 사체도 먹고. 눈에 걸리는 건 모조리 먹어 치우고 돌아와서 이런 똥이나 찍찍 싸지르는 거임.]

“그럼 비료로 쓰면 딱이겠다.”

[……음?]

아니, 결론의 상태가?

진짜 뜬금없는 결론에 토끼는 뭐라 할 말도 잃고 입만 벙긋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정다운은 진심이었다.

“생각해 봐. 그렇게 골고루 먹고 쌌으면 이 똥에 영양분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겠어? 나 이따 돌아가서 고추 농사도 지어야 하는데, 동물의 배설물만큼 또 좋은 비료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바로 허리를 굽혀 회색 쥐똥들을 하나씩 소지품에 주워 담기 시작하는 정다운이었다.

토끼가 질색했다.

[으익? 더럽게 그걸 왜 손으로 만져요?]

“더럽기는? 다 굳은 건 냄새도 안 나고 손에 묻지도 않는다고.”

직접 만져 보니 회색 똥은 진짜 돌멩이를 만지는 것처럼 딱딱했다.

서로 엉겨 붙어서 바위처럼 뭉쳐진 것들은 곡괭이로 일일이 쪼개야 할 정도였다.

“휴, 내가 이래서 땅 파는 걸 못 끊는다니까? 파도 파도 자꾸 새로운 뭔가가 나온단 말이지.”

쥐똥 줍는 사나이 정다운의 표정은 한없이 뿌듯하고 보람찼다.

푯말도 만들었다.

[정다운 광산 (13)]

쥐똥밭!

밟지 않게 주의할 것!

만족할 만큼 회색 쥐똥을 모은 정다운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그 말 오늘 벌써 10번째인 거 아셈? 이 마약 중독자 같으니.]

“아, 그런가? 하하.”

이런 작업이 너무 오랜 만이라 그런지 진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돌만 캔 정다운이었다.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결국 석고를 못 찾은 게 아쉽지만, 그거야 시멘트로 하면 그만이었다.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시멘트를 사용하기 위해선 추가적으로 모래와 흙도 필요하다는 것뿐.

“사막에 들려서 잠깐 모래도 좀 퍼 오자.”

소금을 발견한 사막 한가운데 게이트를 미리 설치해 둔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게이트로 돌아가기 위해 푯말을 보며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정다운.

문득 그에게 아까 그냥 되돌아 나왔던 갈림길 하나가 눈에 밟혔다.

[정다운 광산 (9)]

낭떠러지!! 떨어질 뻔했음!

절대 들어가지 말 것! -_-;;

“그러고 보니 이 아래는 뭐가 있을까?”

[어허, 또 어딜 들어가게요? 거기 아까 위험해서 돌아 나온 곳이잖아요. 낭떠러지가 너무 깊어서 빠지면 즉사임.]

“그러니까 네가 한 번 날아갔다 와 봐. 솔직히 너도 궁금하긴 하지?”

[……쳇. 들켜 버렸군?]

사실 궁금하긴 했다.

그래 봐야 어차피 석회암 밖에 없을 것 같았지만, 워낙 낭떠러지가 깊고 새까매서 묘한 신비감이 느껴졌다.

[낑. 어두운 거 싫어하는데.]

토끼는 투덜대면서도 결국 태양석 모자를 고쳐 쓰고 용맹하게 낭떠러지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그곳엔…….

[헐!?]

“왜? 뭔가 발견했어?”

[아, 아뇨. 아무것도 없는데요?]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

[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렇게 떨려?”

[이히. 또 들켜 버렸군?]

다시 위로 올라온 토끼의 표정은 뭔가 굉장한 것을 본 것처럼 잔뜩 흥분해 있었다.

“대체 뭐가 있길래 그래?”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임. 님은 그냥 내려가기 힘들 테니까 내가 밑에서 게이트를 열어 줄게요. 타고 오셈.]

그 말과 함께 다시 쑥 내려가는 토끼.

잠시 후 게이트가 열렸다.

[오셈.]

번쩍!

정다운은 토끼의 게이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우선적으로 새까만 어둠이 그를 반겼다.

그가 태양석부터 잔뜩 꺼내 부유석과 함께 사방에 띄우자, 이윽고 그 진면목이 드러났다.

“와…….”

어둠이 물러나자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간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셀 수 없이 많은 묘비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공동묘지입니다.>

아까부터 말수가 줄어들었던 알파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공동묘지라고? 너 아는 곳이야?”

[누구의 묘지인데요?]

<…….>

정다운과 토끼의 묻는 말에 대답을 주저하던 알파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곳은…… 에르테아 님을 위해 싸우다 죽어 간 숭고한 죽음들을 위로하는 곳입니다.>

“용의 사도들?”

<그렇습니다.>

알파는 과거에 수없이 죽어 간 동료들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 산의 정상에 생명의 신전이 위치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죽음의 산맥’이란, 이름 그대로 생명의 용이 죽어 잠든 땅을 뜻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던 용의 사도들까지도…….

알파는 침통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상 이 죽음의 산맥 전체가 바로 우리들을 위한 무덤입니다. 종말의 용은 전쟁에서 패배한 우리를 전부 이곳으로 내몰았지요.>

“아하, 그랬구나. 그럼 이제 비밀도 밝혀졌으니 슬슬 돌아갈까?”

<…….>

산통이 다 깨졌다.

사연이야 어찌 됐든 얼른 돌아가서 대장간이나 만들 생각만 하고 있는 정다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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