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50화>
지금 던전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가 있다면 누구일까.
천지에 먹을 게 널려 있고, 하루 종일 퍼질러 자도 자신을 위협할 천적이 없는 존재.
정다운이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하늘 신전에 올라왔더니, 그곳엔 오만가지 뼛조각들을 다 긁어모아 하렘을 구축한 뽀뀨 대왕이 흥청망청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뽀뀨우-.”
오독 오독.
“뀨우우!”
와작 와작!
[어휴. 저 돼지 좀 봐. 저게 지금 돼지 새끼지, 땅다람쥐임?]
토끼는 뽀뀨의 터질 듯한 볼과 궁둥이를 보며 혀를 찼다.
돼지고기를 먹고 남는 뼈를 매일같이 던져 줬더니, 진짜 돼지처럼 뒤룩뒤룩 폭풍 성장하고 있는 뽀뀨였다.
처음에 주먹만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포동포동 살이 쪄서 주먹 2개만 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쟤 다이어트 좀 시킵시다. 저러다 진짜 배 터져 죽을 것 같아요. 아니면 볼이 터지든가.]
하지만 정다운은 언제나 뽀뀨 편이었다.
“왜? 귀엽기만 하구만. 뱃살 손으로 만져 봤어? 엄청 말랑말랑해서 손이 녹을 것 같다고.”
[누군 좋겠네. 밥만 잘 먹어도 칭찬받는 인생이라니. 그런데 그 말랑말랑한 뱃살이 다람쥐 쳇바퀴에 낑겨서 이젠 돌아가지도 않는 거 아심?]
“새로 만들어 주면 되지, 뭐. 그건 그렇고 뽀뀨야? 이번에 잡은 트윈헤드 오거 뼈도 먹어 볼래?”
“뀨우우!?”
그가 손을 내밀자 빵빵해진 볼을 뒤뚱거리며 손 위로 올라오는 뽀뀨.
열심히 실룩거리는 궁뎅이 위로 풍성한 꼬리가 파닥거렸다.
토끼가 치를 떨었다.
[헐, 또 먹겠다고? 걷기도 힘들어하면서? 와, 진짜 하는 것도 없이 하루 종일 먹기만 하네.]
“아, 거 되게 뭐라 하네. 그럼 토끼 너는 뭐 하는 일이 있어서 내가 먹여 키우는 줄 알아?”
[윽, 팩트로 뼈 때리기 있음?]
정다운이 째려보자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무는 토끼였다.
사실 놀고먹는 건 토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토끼는 뻔뻔했다.
[노는 게 제일 좋은 걸 어떡함!]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숨 쉬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도우미라는 직업.
그 굴레에서 벗어난 토끼는 배부른 뽀뀨처럼 사는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했다.
가능하다면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토끼의 헛소리를 잘라먹으며 알파가 본론을 물었다.
어젯밤부터 알파의 화살표는 그를 재촉하듯이 심연의 바다 너머에 있는 어딘가를 계속 가리키며 깜빡거리고 있었다.
정다운의 몸이 방향을 틀면 그 화살표도 같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계속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쯤 되면 진짜 네비게이션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람들만 데려다주고 우리도 떠나자.”
이제 이별할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날려 버린 참가자들을 마녀의 집 안까지 게이트를 열어 주기로 했다.
제2 던전은 눈 덮인 설원을 헤매며 ‘키 스톤’을 찾아내야 마녀의 집으로 공간 이동하게 되는 구조.
그 키 스톤은 아이스 그렘린들이 들고 다니는지 리셋 때마다 그 위치가 달라졌다.
운이 나쁘면 그들은 키 스톤을 못 찾고 마녀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각인의 저주가 발동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나를 도와줬으니, 끝까지 책임져 줘야겠지.”
던전의 부르주아가 이번엔 친히 버스 운전수가 되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 * *
번쩍!
마녀의 집 보스룸 앞에 게이트가 열렸다.
그 안에서 지서연과 석정호의 일행들이 우물쭈물 걸어 나왔다.
“이,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요…….”
과정 다 생략하고 유적지로 진입하는 일이 처음이다 보니 영 어색했다.
토끼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도 되나 싶고, 죄를 지은 것처럼 영 뻘쭘하죠? 알아요. 처음엔 다 그래요.]
그 기분,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토끼는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던전은 어차피 여기서부터가 진짜 위험하니까 방심하지 마요. 섬멸전이라서 이 안에 있는 괴물 한 마리까지도 남김없이 잡아 죽이지 않으면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임.]
……꿀꺽.
토끼의 엄포에 참가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그 옆에서 정다운이 해맑게 손을 들었다.
“아, 그래도 망령들은 내가 다 잡아 놔서 괴물들 중에 절반은 없을걸요?”
[에잇, 그렇구나 젠장! 아무튼! 이래저래 평소보다 2배 쉬워진 코스니까 방심만 안 하면 금방 끝날 거임. 살다 보면 요행도 있는 거니까, 이번만 그냥 누려요. 던전사 새옹지마잼.]
토끼도 이젠 해탈한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여기 도우미도 아닌데 던전이고 밸런스고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과정을 좀 생략해서 레벨 업이 좀 부족하면 어떤가?
나중에 이들 앞에 더 큰 난관이 나타났는데 힘에 부치면?
에이, 거기까지 생각해서 뭐 하랴.
이것도 다 자기들 운명이었다.
[어떻게 보면 고생을 덜한 만큼 동료들도 덜 죽었을 테니, 나중엔 대충 숫자 많아서 유리할 수도 있을 듯.]
어차피 뭘 어떻게 해 줘도 죽을 놈은 죽고, 안 죽을 놈은 안 죽는다.
하지만 이중에 누가 그 ‘죽을 놈’으로 당첨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참가자들 입장에선 정다운의 호의가 무척이나 고마울 뿐이었다.
“정다운 씨,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
“식량도 감사하고요.”
감사가 줄을 잇자 정다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에이, 뭘요. 어차피 남아도는 식량을 아이템 받고 판 건데요.”
물론 던전 부르주아에겐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긴 했다.
어차피 공짜로 준 것도 아니고, 바분을 잡는 데 도움도 받았는데 이게 뭐가 아까울까.
그런데 지서연은 정다운이 끝끝내 제국창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제가 많은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한 것 같아 너무 죄송해요.”
“아이구, 아닙니다. 제 허리가 잘못했죠 뭐.”
“그래도 저 없어도 앞으로도 창술 수련 꾸준히 하셔야 해요. 최소 하루에 찌르기 1천 번씩은 꼭!”
“하하, 네…….”
참으로 책임감 넘치는 과외 선생님 아닌가.
하지만 정다운 학생은 그만 배우고 싶었다.
겨우 며칠이었지만 그 고생을 했는데도 결국 그는 제국창술의 여러 동작들 중에서 반쪽짜리 찌르기 하나만 배운 셈이었다.
역시 이놈의 허리가 문제였다.
‘돌리기 스킬이 레벨 업 하다 보면 나중엔 허리도 좀 잘 돌아가려나?’
[귓말로 헛소리 좀 그만하셈.]
그런데 그때 지서연이 소지품에서 기다란 창 하나를 꺼냈다.
“이건 별건 아니지만…….”
“어? 저 주시는 건가요?”
“네. 제가 예전에 쓰던 무기인데, 정다운 씨가 창술을 계속 수련하시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오, 감사합니다.”
지서연이 건네주는 창의 정체는 의외로 투척용 창인 자벨린(Javelin)이었다.
“내구도가 거의 다 닳아서 전투에서 사용할 정도는 안 되고요. 길이가 적당히 짧아서 수련하시기에는 좋으실 거라 생각해요.”
짧다고는 하지만 1.5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런데 그 정보를 확인한 정다운은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감격했다.
“어, 엄마야…….”
[귀환의 투창 + 1]
- 내구력 : 5/100 (%)
- 옵션 : 리턴 (1레벨)
내구도는 진짜 바닥이었다.
그런데…… 저 멋진 이름도 그렇고, 유독 눈에 쏙 들어와 박히는 ‘리턴’이라는 옵션!
[어? 리턴이네요? 이건 무기가 다시 주인 손으로 돌아오게 하는 기능이에요.]
“대박!”
토끼의 확인 사살에 정다운은 크게 감동했다.
“이, 이거 어떻게 쓰는 건가요?”
“네? 그냥 던지고 나서 리턴이라고 외치시면…….”
휙!
그 말을 듣자마자 귀환의 투창을 바닥에 집어 던지는 정다운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혹시라도 고장날까 봐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윷놀이 하듯 조심히 던졌다.
그러곤 바닥을 뒹구는 투창을 보며 소심하게 외쳤다.
“리, 리턴?”
파앗!
그 말과 동시에 투창의 모습이 점점 그 자리에서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창은 정다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마술이 따로 없었다.
“에그머니나.”
세상에. 너무 멋지다. 진짜 멋지다.
진짜 쩔어 버렸다!
“우와, 이거 진짜 쩌는 기능이잖아? 지서연 씨, 진짜 감사합니다!”
“아니, 그 정도로 좋은 물건은 아닌데요……. 스테이지-2에서 얻은 거라 공격력도 별로고요.”
정다운이 상상 이상으로 기뻐하자 지서연은 되레 민망해했다.
내구도가 10 이하로 떨어진 무기는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기엔 굉장히 애매했다.
전투 중에 망가지면 엄청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 어디까지나 진짜 딱 수련용으로만 쓰라고 준 거였다.
하지만 정다운은 수련은 개뿔, 이걸 제물로 바쳐서 리턴 옵션만 뽑아 먹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 옵션을 뽑아내서 다른 물건에 붙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떨어지면 다 돌아오나?’
역시 좋은 일을 했더니 복으로 돌아오나 보다.
얼른 신전으로 돌아가서 당장 실험해 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선물 받자마자 제물로 바치는 건 좀 예의가 아니니까, 얼른 보내 버리자.’
[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은 제발 속으로만 생각하라고요. 자꾸 나한테만 들리게 귓말하지 말고요.]
겉과 속이 다른 정다운이었다.
“자, 그럼! 잘들 돌아가시고요. 더 할 말 있으시면 귓말로 하시고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한 손을 척 들며 쿨하게 몸을 돌리는 정다운.
그 모습에 당황하는 참가자들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 앞에 나타난 아이스 그렘린들의 모습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기를 고쳐 잡았다.
전투 시작이었다.
* * *
“알파! 이거 제물로 바친다!”
[접수합니다.]
꿀꺽!
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귀환의 투창을 제물로 바쳤다.
강화 시스템에 ‘리턴’이라는 옵션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쇠꼬챙이 하나에 옵션을 걸었다.
“강화!”
[쇠꼬챙이 +1]
- 내구력 : 100/100 (%)
- 옵션 : 리턴 (1레벨)
“오, 됐다!”
휙-!
환호성을 지으며 다짜고짜 쇠꼬챙이를 멀리 집어 던지는 정다운.
“리턴!”
그 순간 쇠꼬챙이의 모습이 점점 옅어지더니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겨우 1레벨짜리 강화라서 속도가 빠르진 않네요. 나중에 2레벨짜리 물건 하나 찾아서 제물로 바치면 2레벨 리턴도 가능해질 거임.]
“이걸로도 충분해!”
정다운은 이미 만족했다.
물론 그동안 꾸준히 긁어모아 놔서 쇠꼬챙이만 이미 몇 백 개나 있었다.
하지만 방어 스킬이 없다 보니 보통은 원거리에서 주로 쇠꼬챙이를 던지는 방식으로 싸운 적이 많았다.
하지만 리턴 옵션을 이용한다면 앞으로는 근접에서도 싸웠다가 또 멀리 떨어진 괴물한테는 원거리로 던지기도 하면서 자유자재로 전투 스타일을 바꿀 수 있었다.
“휴, 그래 레벨 업은 무슨, 역시 템빨이 최고지. 나는 이렇게 한 발 한 발 전투직에 가까워져 가고 있구나.”
[웃기시네. 그래 봐야 쇠꼬챙이로 싸울 거면서.]
한껏 자기 멋에 취한 정다운을 토끼가 비웃었다.
그가 정색했다.
“아니, 나는 깨달음을 얻었어. 나는 무기를 만들겠어.”
[갑자기요?]
“응. 이 정도로 전투 스킬이 안 생긴다면, 좋은 무기를 만들어서 싸우면 되지.”
토끼는 황당했다.
[좋은 무기를 찾을 생각부터 안 하고 만들겠다고요? 이미 마인드부터가 생산직…….]
“그럼 무기 찾겠다고 나 혼자 이 넓은 땅을 어느 세월에 찾아 돌아다니겠어? 만드는 게 훨씬 빠르지.”
<그래서 안 떠나실 겁니까?>
이 와중에도 알파는 꿋꿋하게 화살표를 깜빡이고 있었다.
“가면서 만들지 뭐. 어차피 가면서 할 것도 없잖아?”
그는 곧장 하늘 신전에 올라탔다.
“자, 출발!”
“크워어어!”
신호에 맞춰 그의 골렘들이 하늘 신전과 합체했다.
합체라고 해 봐야 별 거 없다.
하늘 신전을 아래쪽에서 받쳐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골렘들.
키아아아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 위에서 심연어들이 입을 벌리고 다가왔다.
“바하무트, 문어 띄워.”
[명을 받듭니다.]
부오오오!
하늘 신전 위로 거대한 호롱불, 아니, 문어 골렘이 떠올라 주변의 어둠을 물리쳤다.
그에 따라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심연어들.
그 아래서 정다운은 한가롭게 대장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뀨우?”
“어, 맞다. 우리 뽀뀨 쳇바퀴도 만들어 줘야지?”
[무기 만든다면서요!]
할 일이 태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