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149)화 (149/393)

<던전리셋 149화>

*   *   *

쏴아아!

굵은 빗줄기가 지붕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영역을 넓혀 간다.

“맙소사…….”

점점 지붕이 덮여 가는 마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참가자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특히 석정호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아예 스케일이 다르구나…….’

하늘 위의 하늘을 봐 버렸다.

뭐? 화염충? 이깟 날파리 좀 부리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정다운은 지금 거대한 바위를 놀이공원 풍선 띄우듯이 손으로 훨훨 날려 보내고 있었다.

골렘들을 끌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만, 화염충 따위로 기고만장하던 지금까지의 자신이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뚜껑(?)이 다 덮였다.

정다운은 빗물이 마을 밖으로 흘러내리게 ㅅ자로 경사진 지붕을 만들고, 천장에 태양석을 설치해 조명을 밝혔다.

화아악!

“오…….”

아래서 올려다보던 사람들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천장에 새로운 하늘이 생겼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자연광.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따사롭게 내리쬐는 인공 햇볕이 마을 구석구석을 포근하게 보듬어 주었다.

솨아아아…….

시끄럽던 빗소리도 이젠 엄청 멀리 들려와서 안과 밖이 완전히 딴 세상으로 구분된 듯 안락함이 느껴졌다.

“휴, 역시 비 오는 날엔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최고지.”

지붕이 완성되자, 그 빗면을 따라 빗물이 마을 밖으로 흘러내리더니 저절로 땅이 파이고 고랑이 생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성벽 둘레에 해자가 생긴 것이다.

그곳에 빠진 해골 병사들은 헤엄을 못치고 허우적댔다.

“점프도 못하고 헤엄도 못치고, 은근 불쌍한 녀석들이라니까.”

키키케켁…….

알파가 걱정을 했다.

<지붕의 원재료가 흙이라 언젠가는 비가 새고 말 겁니다.>

“그럼 아예 지붕을 함정으로 만들어 버리지 뭐. 함정 설치! 함정 설치!”

<……!>

[함정을 설치합니다.]

[함정을 설치합니다.]

정다운은 지붕을 하나의 함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구획을 나눠 가며 여러 개의 함정으로 지정했다.

이러면 비가 새는 부분만 딱딱 골라내서 리셋할 수 있으니 에너지 낭비를 줄일 수 있으리라.

그 알뜰함에 알파는 크게 만족했다.

<멋진 아이디어십니다.>

“그치? 게다가 이러면 마을에서 농사라도 지을 때 비가 필요하면 그 부분만 따로 뜯어내도 되잖아.”

<……!>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한 알파는 크게 탄복했다.

토끼도 놀랐다.

[여기다 또 농사를 지으려고요?]

“응. 요즘 지하 신전에 이것저것 너무 많이 들여놨더니 영 복잡하더라고. 이번 기회에 벼농사는 싹 1층으로 올려 버리면 예쁠 것 같아.”

[예쁘……?]

더 말해 뭐 하랴.

그는 이제 농경지의 모양까지 중시하는 참된 농부였다.

<제2 신전 ‘지하 신전’의 1층을 ‘틈새 신전’으로 명명합니다. 틈새 신전의 지붕을 함정으로 지정합니다.>

그러는 동안, 마을 안을 계속 수색하고 있던 지서연은 태양석 햇살에 반짝이는 어떤 물건을 발견했다.

“어? 저건?”

후다닥.

얼른 달려가 주워 들고, 묻어 있는 진흙을 다 털어 내자 손가락만 한 크기의 열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워낙 작고 얇아서 빗물과 진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비가 그치자 발견된 것이다.

“정보 확인.”

[바분의 황금열쇠 +1]

- 내구력 : 100/100(%)

- 특수 옵션 : 마법 창고 (1레벨)

“황금열쇠?”

보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아무튼 바분이라는 이름이 달려 있는 걸 보니, 정다운이 찾는 물건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정다운을 불렀다.

*   *   *

“황금열쇠요?”

열쇠를 건네받은 정다운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쪽에서 주웠는데요. 찾으시던 게 이거 맞으시죠?”

“아마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바분의 황금열쇠.

이렇게 떡하니 이름까지 쓰여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열쇠로 뭐 하는 거지? 마법 창고를 여는 건가?”

“혹시 소지품 능력 비슷한 거 아닐까요? 시동어 외치면 창고가 열린다거나.”

“흠. 역시 그런 느낌이죠?”

지서연의 말에 정다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건 직접 해 보는 게 최고다.

그는 열쇠 들고 설치는 요술소녀처럼 황금열쇠를 힘차게 앞으로 뻗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마법 창고야! 열려라, 얍!”

하지만.

“……?”

창고는 개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얍얍?”

세상 뻘쭘한 표정으로 지서연과 눈이 마주치자, 지서연이 슬쩍 눈치를 보며 의견을 냈다.

“호, 혹시 목소리가 작았다거나?”

아하, 그런가?

지서연의 말에 다시 한번 황금열쇠를 힘차게 치켜드는 정다운.

게이트를 열 때처럼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목소리에 힘을 딱 줘서 다시 외쳤다.

“열려라! 마법 창고! 얍!”

“…이얍?”

“……뿅?”

아무리 뿅뿅거려 봐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이렇게 흑역사 하나가 추가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다운의 뒤에서 그림자 하인들이 서로 손을 뻗고 뿅뿅거리기 시작했다.

“하지 마, 이것들아!”

니야옹-.

“어흠흠…….”

민망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손을 내리는 정다운.

때마침 알파가 그 물건을 알아봤다.

<마법 창고의 열쇠라니, 오랜만에 보는 마법이군요. 이건 그렇게 쓰는 물건이 아닙니다.>

“나쁜 놈아, 너 일부러 참았다가 지금 말하는 거지?”

<마법을 스캔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알파 놈은 못 들은 척 설명을 시작했다.

<이 황금열쇠는 아공간을 여는 마법의 매개체입니다. 열쇠로 문을 열면 바분만이 알고 있는 비밀 공간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겁니다.>

“오, 비밀 공간이라고? 그럼 진짜 보물 창고인 거잖아?”

세상 신난 정다운!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다운 님은 열쇠를 쓸 수 없습니다.>

“아, 또 왜.”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냐…….

김이 팍 샜다.

“와, 진짜 내 눈에 언제 마법사 한 놈만 딱 걸려라. 내가 뼈까지 다 갈아 마셔 준다!”

화들짝!

때마침 뒤에서 지나가던 바하무트가 움찔 놀라며 그 자세로 굳어 버렸다.

토끼도 다가와 황금열쇠에 관심을 보였다.

[바분은 진짜 한결같네요. 누가 욕심쟁이 아니랄까 봐 ‘시그니처’도 보물 창고 열쇠네.]

정다운이 물었다.

“너도 같은 도우미였는데 이거 쓰는 방법 몰라?”

[저도 못 쓰죠. 열쇠까지 있다는 건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원래 도우미들은 자기만의 비밀 공간에 누굴 들이는 걸 꺼려해요.]

“도우미의 비밀 공간? 그런 것도 있었어?”

[당연하죠. 그럼 우리는 뭐 사생활도 없겠음? 저도 가끔 옷 갈아입으러 공간 지퍼 열고 왔다 갔다 하잖아요.]

“갈아입은 거였냐…….”

어쩐지 매일 모자 색깔이 조금씩 바뀐다 했더니, 나름 옷에 신경을 많이 쓰고 사는 토끼였다.

도우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곤 했다.

세르파가 그림자 속에 비밀 공간을 숨겨 두는 방식이었다면, 바분은 열쇠를 통해 어디서든 문을 여는 방식.

그리고 토끼의 경우엔 지퍼를 여는 방식이었다.

[이 마법은 약간 ‘게이트’를 열어서 ‘소지품’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아무튼 바분의 보물 창고에 들어가려면 고정 좌표가 새겨진 마법진을 연성해야 한다는 거임.]

“열쇠 하나 가지고 뭐가 그리 복잡해? 바분은 이런 좋은 마법이 있었는데도 왜 죽기 전에 거기로 안 도망쳤데?”

[마력이 부족했나 보죠, 뭐. 님이 수시로 열어 대는 게이트 마법도 알고 보면 엄청난 과소비라고요.]

<울먹.>

차마 직접 울지 못해 글자로 표현하는 알파였다.

정다운은 바하무트를 쳐다봤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바하무트도 마법사였잖아? 막 순간 이동도 하고?”

[……!]

또 화들짝!

얼음처럼 굳어 있던 바하무트는 바로 납작 엎드려 빌었다.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제 공간이동 방식은 얼음과 눈을 매개체로 하는 것이라 열쇠로 여는 방식은 전혀 모릅니다.]

“아니, 뭐 죽을 것까지야……. 그런데 진짜 도움 되는 놈 하나 없네.”

뭔가 되게 억울했다.

기껏 열심히 머리 굴려서 도우미를 잡았더니, 진짜 보상은 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니.

“그럼 결국 이번에 얻은 거라곤 쓸모없는 나무 조각품 하나랑 창고 없는 창고 열쇠가 전부잖아?”

[왜 쓸모가 없어요? 어쩌면 내 소중한 전생의 실마리일 수도 있는데, 너무 홀대하시네!]

“오냐, 네 전생이 토끼 인형이라서 좋겠다.”

[아니닷, 이 악마야! 내 전생은 분명 마녀였을 거임! 어릴 땐 귀엽고 다 크면 예쁘고 섹시한 검은 여왕!]

[네 이노옴! 마녀님께 무슨 망발을!]

[쓰읍! 또 반말!]

[……요!]

“…….”

아아, 혼란스럽다.

그런데 티격태격하는 바보 둘을 보며 고개를 젓던 정다운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번개가 쳤다.

“어? 잠깐, 잠깐만?”

그가 갑자기 황금열쇠를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

“이 열쇠로 문을 열어야 한다고 했지? 그럼 그냥 문을 새로 만들면 안 되나?”

[어허, 이 양반이? 왜 또 생각이 그런 식으로 빠지심? 마법도 못 쓰는 주제에 열쇠만으로 문을 어떻게 만들어요?]

토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마법 말고 이 열쇠로 열리는 진짜 문짝을 만들면 어떨까? 너무 1차원적인 생각인가?”

[그야 당연히…….]

<진짜 그게 가능하시겠습니까?>

[으익? 알파 님까지 혹했어!?]

그 말에 의외로 알파가 관심을 보였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마법 창고의 요점은 어디까지나 열쇠에 새겨진 좌표와 마법진의 좌표를 서로 연결하는 것. 열쇠에 정확히 딱 맞물리는 문만 존재한다면 아공간이 열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 진짜?”

[이익? 지, 진짜로?]

정다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물론 문을 여는 순간에 일정 이상의 생명 에너지를 주입시켜야겠지만, 열쇠 구멍만 딱 맞는다면 그 정도 마력 컨트롤은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긴 합니까?>

“못 할 건 또 뭐야? 문도 열쇠도 어차피 다 사람 손으로 만든 건데.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스마트폰도 만드는 세상인데.”

정다운은 쉽게 생각했다.

영화에서도 금고 털이범들이 몰래 훔쳐 낸 열쇠를 본떠서 새 자물쇠를 만드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오지 않던가.

그거 떠올리면서 열쇠의 요철에 맞춰 철판을 깎아 퍼즐처럼 이리저리 짜맞추다 보면 언젠가는 될 것도 같았다.

물론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어차피 널린 게 시간이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동안 바분의 보물 창고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재밌겠는데?”

당분간 느긋하게 가지고 놀 취미가 생기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 정다운이었다.

[에혀, 맘대로 해라…….]

토끼는 그냥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기대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정말로 만에 하나.

진짜로 정다운이 바분의 황금열쇠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도우미의 비밀 공간’을 사용할 자격을 얻게 된다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든 간에, 이미 저 ‘열쇠’ 자체가 그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되지 않을까?

토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옆에서 황금열쇠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정다운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그날 밤.

<미니 제단의 좌표 해석이 끝났습니다. 제4 던전의 방향을 알아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 안내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번쩍!

정다운의 손등에서 황금빛으로 된 커다란 화살표가 떠올랐다.

“네비게이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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