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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47)화 (147/393)

<던전리셋 147화>

언제나처럼 그림자 하인들의 손속에는 일말의 자비도 느껴지지 않았다.

범독수리의 사체를 해체했을 때처럼.

슥슥 삭삭!

[크악! 이, 이놈들은 또 뭐냐!]

트윈헤드 오거를 산 채로 회를 떴을 때처럼.

슥슥 삭삭!

[이놈들은 설마 세르파의……!?]

그림자 하인들은 마치 생선 요리를 다듬는 가정주부처럼 꼼꼼하고 야무지게 바분의 몸을 도축해 나갔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바분의 몸은 잘라 내는 순간 살코기들이 전부 먼지처럼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질 뿐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실체를 유지시켜 주는 힘이 쭉쭉 외부로 빠져나가자, 바분은 경악하고 말았다.

맙소사! 심연의 바다에 있어야 할 그림자 고양이들이 왜 여기까지 나와 있다는 말인가!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

바분은 죽음을 직감했다.

마법은 자꾸 실패했고, 이 집요한 골렘 놈들은 끈질기게 자신의 몸을 옭아맸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자신의 몸은 끔찍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고, 사방에서 빗발치는 던전 콩들은 그 고통을 몇 십 배로 뻥튀기시켜 주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제는 세르파가 부리던 그림자 마수들까지 나타나 피를 쭉쭉 빨아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완벽한 함정이었다.

어딜 봐도 살아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바분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크허허……. 설마하니 내가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마치 요리당하는 기분이구나…….]

“어? 어떻게 알았지? 요리 맞는데.”

[……!]

[헐? 진짜로?]

그냥 비유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정다운의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짓자, 바분도 놀라고 토끼도 놀랐다.

그러자 그가 히죽 웃으며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응. 사실 이 함정의 이름은 ‘볶은 콩이 들어간 황토바분찜’이야.”

[으익? 뻥치시네! 그 이름 지금 막 정한 거죠?]

“진짜라니까?”

그렇다.

이건 사실 전략도 뭣도 아니었다.

그냥 틈새 마을이라는 거대한 냄비에 바분을 넣고 ‘요리’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기름 두르고, 콩도 볶고, 불맛도 내고. 고기는 즉석에서 살을 잘 발라서!

[앗! 진짜다! 그래서 볶은 콩이 들어간 황토바분찜이구나!]

토끼도 뒤늦게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정다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도 삼시 세끼 뭘 어떻게 해 먹어야 맛있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해 봐. 원래 우리 같은 생산직들은 매일같이 이런 고민을 달고 산다고.”

그 말에 바분은 순간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더니 급기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뭐? 생산직이라고? 크흐흐……! 설마 진짜로 나를 요리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이 바분을? 이런 미친놈이 있나! 크하하하!]

쩌렁 쩌렁!

“……!”

“뭐, 뭐야. 저기서 웃을 수 있다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몸이 산산이 해체되는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리는 바분의 모습에 성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간담이 모두 서늘해졌다.

설마 이 정도 함정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까?

<허장성세입니다. 놈은 곧 죽을 겁니다.>

바분의 몸에 남아 있는 생명 에너지를 보며 알파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그 또한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시뻘건 불길 속에 타들어 가면서도 바분의 눈은 정확히 정다운을 직시하고 있었다.

[크흐……. 세르파가 미친놈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진짜 미친놈은 따로 있었구나. 설마 세르파를 죽인 것도 네놈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일견 유약해 보이는 인상에 약간 뺀질거리는 표정.

하지만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영원을 살아갈 자신에게 이런 절대적인 죽음의 순간을 선사해 준 놈이었으니.

[그렇군. 네가 기타 누락자였나.]

바분은 뒤늦게 정다운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곁에 붙어 있는 토끼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타 누락자를 찾아오라 했더니, 아예 그쪽에 붙어 버렸구나. 하여간 무능력한 녀석.]

[퉤.]

듣자마자 침부터 탁 뱉는 토끼였다.

워낙 불쾌한 기억들이 많아서 말 섞기도 싫었다.

그 모습에 바분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 화내지 말거라. 네가 이겼으니까 결국…….]

쿨럭!

입에서 걸쭉한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그 피는 금방 공기 중에 흩어져버렸다.

바분은 습관적으로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그러자 그 손이 무너져 내리며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이제 몸의 형체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바분은 여전히 토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에 무시만 하던 저 자그마한 놈에게 내려다보며 죽어 가는 꼬락서니라니…….

바분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여전히 신은 가혹하기만 하구나. 영원의 수명까지 얻고도…… 결국 이런 결말이라니.]

그는 세르파처럼 죽는 마지막 순간을 저주로 끝을 냈다.

[나의 운명을 저주한다. 그리고 너를 저주한다.]

“응? 내가 아니라 토끼를?”

갑자기 황당한 정다운이었다.

뜬금없이 바분이 자신이 아니라 토끼를 저주하고 있었다.

토끼도 당황했다.

[아니,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한다고!? 함정 만든 건 내가 아닌데? 내가 뭘 했다고!]

[……그걸 모르는 것이 네 죄다.]

[왓 더?]

더욱 황당해하는 토끼였다.

하지만 바분은 그 바보 같은 모습조차 꼴 보기 싫었다.

[그래, 쿨럭……. 너 혼자만…… 모든 것을 잊어버려서 속이 편하더냐.]

[네? 저, 저기요? 자꾸 혼자만 아는 얘기 하시면, 제가 맞장구를 못 쳐 드려요.]

[이 비겁한…….]

[네!? 비겁하다니! 아니, 이 자식이 다 죽을 때 돼서 갑자기 뭐라는 거야!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냐!]

[……우리는 모두…….]

[모두 뭐!?]

하지만 바분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바람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와르르!

[으악! 궁금하게 거기까지만 말하기냐!?]

토끼는 억울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었으나, 그는 결국…….

[업적 달성!]

“던전의 무뢰배!”

압도적인 힘과 지혜로 던전의 관리자를 소멸시켰습니다!

당신의 업적에 던전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 보상 : 관리자의 유품

 

[<함정 설치> 스킬이 3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바분의 최후였다.

[죽지 마! 이 자식아!]

죽는 그 순간까지도 토끼를 괴롭게 하는 바분이었다.

[아니, 내가 대체 뭘 잊어버렸다는 거냐고!]

안달복달하는 토끼에게 정다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로 중요한 건 아닐 거야.”

알아서 뭐 하랴, 어차피 죽은 놈의 사정 따위.

세르파도 죽였더니 옛 주인을 못 잊은 불쌍한 고양이라느니 어쩌고저쩌고 이상한 뒷얘기를 들어서 기분만 찝찝하지 않았던가.

“휴, 이번엔 안 들어서 다행이다.”

[아니, 좀 들으라고요! 내 출생의 비밀이면 어떡함?]

“출생은 무슨. 너 원래 토끼라며?”

[아, 맞다. 나 원래 토끼였지?]

긁적.

멍청하게 뒤통수를 긁는 토끼였다.

그래, 바분의 헛소리 따위 더 들어서 뭐 하랴.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응? 그런데 님 지금 쌍코피 나는데요?]

“아…….”

주루룩.

어느 샌가부터 정다운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다운은 코를 훔치며 토끼에게 힘없이 말했다.

“다 끝났으니까, 뒤는 맡길게.”

[응? 뭘 맡……?]

스르륵.

대답 들을 것도 없이 그 순간 그는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갑자기 그의 신형이 무너지자, 계속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지서연이 재빨리 그의 몸을 붙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서연은 만일에 대비해 바로 옆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이 함정의 핵심인 정다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계획이 허사로 돌아갔을 테니 말이다.

“휴, 아무래도 이 많은 던전 콩들을 다 컨트롤하는 일이 상당히 힘드셨나 보네요.”

[아, 맞다. 정신력이 좀 소모됐겠구나. 워낙 멀쩡해 보여서 미처 생각 못 했네요.]

토끼도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이 수많은 과녁들을 한꺼번에 신경 쓰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생을 한 것은 처음부터 그 많은 화염충들을 계속 조종해야 했던 석정호도 마찬가지였다.

털썩.

결국 석정호도 마을 한복판에서 정신을 놓아 버렸다.

[저 아저씨 지하 신전으로 옮겨 놔.]

토끼는 정다운이 시킨 대로 뒷정리나 하기로 했다.

*   *   *

정다운이 정신이 든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

어느덧 마을의 불은 전부 소진되어 있었고, 비는 여전히 멈출 기색이 없었다.

[이제 이 땅은 영원토록 비가 내릴 것이다!]

바분이 죽었어도 그가 이 땅에 걸어 둔 마법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던전 자동화 시스템이 완성된 것이다.

토끼는 비를 피해서 사람들은 전부 지하신전으로 대피시켰고, 빗물이 지하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바하무트에게 입구를 골렘들로 틀어막아 뚜껑을 덮었다.

[일어났어요?]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이틀이요.]

정다운은 무엇보다 참가자들이 아직 안 떠나고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들의 이마엔 어느덧 <27>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바분이 죽었어도 부패의 각인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 참. 내가 늦게 깨어나면 어쩌려고 다들 기다리고 있었데?”

[몹시 감동한 표정으로 틱틱대지 마요.]

정다운은 머쓱한 얼굴로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봤다.

“그래서 바분의 유품은 뭐였어?”

[안 그래도 사람들이 지금 올라가서 찾고 있어요. 불이 꺼진 게 얼마 안 됐거든요. 아, 들고 있던 큐브는 바로 골렘들에게 시켜서 찾아왔음.]

“오. 제단을?”

정다운은 토끼에게서 주먹만 한 크기로 작아진 제4 던전의 제단을 받아 들었다.

알파가 기쁘게 말했다.

<이로써 우리는 총 5개의 제단과 3개의 신전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경축할 일입니다.>

“이 제단은 계속 미니 사이즈인가?”

[바분의 마법을 풀 수 없으니, 계속 그렇겠죠. 미니 제단 귀엽다, 히히.]

<이건 이대로도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번쩍!

갑자기 정다운의 손에서 황금빛이 퍼져 나와 들고 있던 미니 제단을 유심히 스캔했다.

알파가 제단에 걸린 마법을 해석해 냈다.

<다행히도 이 제단에는 바분이 가장 최근에 쓴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무슨 마법? 비 오는 거?”

<게이트입니다.>

알파가 마침 좋은 소식을 알려 줬다.

<이 제단에는 바분이 최근에 다녀온 지역의 좌표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좌표를 추적하면 제4 던전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헐? 진짜?”

[오, 이젠 류승우 님이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임? 어차피 또 찾아가면 다른 데로 떠날 것을.]

토끼는 좋은 기분에 초를 치는 데는 선수였다.

정다운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무슨 방법을 내긴 해야 할 텐데.”

<방법이야 있습니다.>

“뭔데?”

<이 미니 제단을 류승우 님이 들고 다니게 하면 우리 쪽에서 좌표를 추적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오, 그럴싸한데?”

눈을 빛내는 정다운.

하지만 알파는 육체가 있었으면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신전의 주인이 마법을 모르니, 별 구차한 방법을 다 쓰게 되는군요.>

“…….”

병 주고 약 주는 알파였다.

아니, 약 주고 병 주는…….

“아무튼 승우 형을 일단 만나러 가긴 가야겠네. 알파는 바로 좌표 추적해서 방향 좀 찾아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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