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42화>
닥치는 대로 숲을 파괴하며 돌아다녔더니 바분의 주변은 온통 풀과 나무들이 다 쓰러지고 완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 덕분에 예전엔 미처 안 보이던 것들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법진이 그림자들 속에 섞여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세르파의 마법진이군.]
바분은 한눈에 마법진의 용도를 알아봤다.
[던전 자동화 시스템.]
하여간…… 세르파는 진짜 게으른 녀석이었다.
제4 던전도 그렇더니, 자신의 모든 던전을 자동으로 돌아가게 해 둔 것이다.
덕분에 지금 그가 없어진 순간에도 스테이지-4는 문제없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던전 입장이고, 바분에겐 아주 큰 문제였다.
이 던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결국 이 마법진을 깨트려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게 문제였다.
세르파의 마법력은 보통이 아니어서, 자동화 시스템을 억지로 훼손시켰다간 던전 자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이번에 제4 던전처럼 말이다.
[제기랄. 정말이지…… 죽어서까지 집요하게 나를 방해하는 놈이구나.]
바분은 투덜대며 그림자 마법진의 중심으로 찾아 이동했다.
다행히도 제4 던전에서 한번 경험해 본 덕에 이젠 어느 정도 세르파의 마법을 파악한 상태였다.
이번엔 절대 서두르지 말고 세심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얼마 후, 눈에 밟히는 모든 괴물들을 학살하면서 결국 마법진의 중심을 찾아내고 만 바분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이런 곳에 숨겨져 있었나.]
마법진 안에 또 다른 마법진이 숨겨져 있었다.
던전에는 저마다 도우미들이 평소에 쉴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존재했다.
그곳엔 보통 도우미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보물들이나 잡동사니들이 모여 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세르파는 아무래도 그 비밀 공간을 그림자 속에 심어 둔 것 같았다.
[흐흐 어디 무슨 보물을 숨기고 있었나 봐 주마.]
바분은 탐욕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림자 공간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미친 놈.]
보자마자 바분은 인상을 구기며 욕부터 내뱉었다.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었구나.]
그곳엔 수백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 공동묘지처럼 세워져 있었다.
크기는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검은 여왕인가!]
그것은 바로 그동안 세르파가 깎아 만든 마녀의 조각상들이었다.
[이런 제기랄. 과거를 잊지 못한 미련한 도우미라니! 죽어 마땅한 놈!]
얻을 게 아무 것도 없자, 바분은 극도로 분노하며 마녀의 조각상들을 전부 발로 짓밟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 결국 어떤 물건 하나를 찾아내고 눈을 빛냈다.
[오호라, 이건 각인의 저주 아닌가? 이거라면 제법 쓸 만하겠군.]
* * *
“으아아, 지루하다고!”
정다운은 갑자기 모든 게 지겨워졌다.
류승우의 연락은 그때 이후로 다시 끊어졌다.
동료들이 걱정되는데도, 당장 거기가 어디인지를 모르니 무작정 떠나기도 애매했다.
결국은 다음 연락이 올 때까지 여기서 멍하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차라리 땅굴을 파고 말지…….”
요 며칠 정다운은 한숨이 늘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멍 때리며 기다려야 하는 걸까?
게다가 이놈의 창술은 또 어찌나 어렵고 난해한지!
팍!
“에라이! 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창술을 수련하던 정다운은 결국 쇠꼬챙이를 바닥에 푹 꽂아 버리고 세상 게으른 포즈로 기지개를 폈다.
그러자 자동적으로 뒤에서 그림자 하인들이 화살을 쏴 지서연의 환상들을 물리쳤다.
푹푹푹!
“끼에엑!”
정다운은 제국창술에서 ‘찌르기’ 한 동작만으로 벌써 며칠을 애먹고 있었다.
아니, 한 동작이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이 찌르기 하나에는 두 개의 방어 기술과 하나의 공격 기술이 섞여 있었다.
“상대의 공격을 좌우로 빗겨 내 회피한 후 찌르세요.”
이제는 귓가에서 환청까지 들릴 정도인 지서연의 잔소리.
“상대의 공격을 밖으로 막을 땐 왼손부터 움직이고.”
“안으로 눌러 막을 땐 오른손부터 돌려 막아요.”
“전체적으로 허리를 웨이브 타는 느낌으로.”
“아뇨, 엉덩이를 빼는 게 아니라 허리를 돌려야 돼요. 웨이브, 웨이브.”
“으아아! 그래요! 나 웨이브 안 된다고요! 이럴 시간에 차라리 흙이나 뭉치는 게 더 재밌겠네!”
하여간 주입식 교육이 이래서 문제였다!
벌써 며칠째 계속 똑같은 자세만 강요당하니까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점점 집중력도 흐트러져서 이제는 창만 보면 하품이 찍찍 나오고 팔다리가 배배 꼬일 정도였다.
보다 못한 토끼가 이번에도 또 나름의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에휴, 그냥 포기하셈. 님한테 재능이 있었으면, 벌써 창술 스킬이 생기고도 남았을 거임.]
알파와 바하무트까지 합세했다.
<애초에 제국창술을 하루 이틀 만에 배우려고 하는 게 무리수입니다. 자고로 무술이란, 평생을 들여서 심신의 조화를 이룩해야…….>
[주인님, 무술 수련에 조바심은 금물이나이다. 꾸준히 단련하시면 언젠가는…….]
정다운이 짜증을 터뜨렸다.
“누구 놀려? 그렇게 잘난 척하고 싶으면, 너네가 직접 해 보든가!”
[헷, 난 팔이 짧아서 창을 그렇게 못 들어요.]
[송구스럽게도 저는 손가락이 없나이다.]
<저는 아예 몸이 없습니다.>
“…….”
아, 진짜…….
진짜로 짜증나는 놈들이었다.
정다운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근데 이거 진짜 지겨워서 미치겠다. 나 진짜 재능 없나?”
그는 괜히 뒤를 힐끔거리며 슬쩍 눈치를 봤다.
마침 지서연은 심연어들을 사냥하러 나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예쓰! 잠깐 놀자!’
하지만 논다고 해도, 지서연 선생님(?)이 내 주고 간 숙제가 있어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
“제가 사냥에서 돌아올 때까지 계속 창술 수련하고 계셔야 해요? 최소 찌르기 1000번!”
“…….”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녀가 돌아왔을 때 자신이 너무 탱자탱자 놀고 있으면 진짜 한심해 보일 것 같았다.
놀아도 여기서 놀기로 했다.
‘끄응, 뭐 하고 놀지? 어떻게 놀면 요령껏 잘 놀았다고 소문날 수 있을까?’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골똘히 고민하는 정다운.
그러다 무심코 지루한 수업 시간에 볼펜을 돌리듯이, 손에 든 쇠꼬챙이의 중심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쇠꼬챙이가 그의 손가락에서 손가락을 타고 움직이며, 신기하게도 계속 돌아갔다.
그 모습에 토끼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헐? 우와!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어? 뭐가?”
[그 창 돌리는 거요. 푸핫! 쓸데없이 너무 잘 돌아가는 거 아님?]
“아? 이거?”
정다운도 그제야 자신이 손가락으로 쇠꼬챙이를 돌리고 있다는 걸 퍼뜩 깨달았다.
하지만 돌리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무심결에 학교에서 집중이 안 될 때 하던 버릇이 나온 건데, 하다 보면 은근 중독성이 있었다.
그 모습에 바하무트까지 관심을 보였다.
[주인님은 혹시 봉술을 배우셨나이까?]
“뭐? 아냐, 이게 뭔 봉술이야? 이건 그냥 수업 시간에 펜대 좀 돌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
머쓱하게 말하다 보니 갑자기 혼자 기분이 좋아진 정다운이었다.
그동안 계속 창술 못한다고 갈굼만 당하다가, 누가 칭찬해 주니까 갑자기 기분이 우쭐해졌다.
“사실 이 정도는 누구나 하지. 하지만 이거라면 어떨까! 핫! 핫!”
빙글빙글!
붕붕!
그는 갑자기 신이 나서 진짜 봉술이라도 되는 양, 손오공 여의봉 돌리듯 이리저리 쇠꼬챙이의 방향을 바꾸며 계속 회전시켰다.
[어? 우와아! 진짜 봉술이다! 이분 은근 봉술의 달인이었네!]
물론 이딴 게 봉술일 리 없었다.
전투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냥 중심 딱 잡고 빙빙 돌리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적어도 겉보기엔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휙!
“어이쿠?”
물론 그러다 놓쳤지만.
툭, 하고 쇠꼬챙이가 바닥을 굴렀다.
[푸핫! 놓쳤데요!]
토끼가 허공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까르르 웃었고, 그 모습에 정다운도 덩달아 같이 낄낄댔다.
역시 딴청 피우는 게 최고였다.
[님, 또 보여 줘요, 또.]
토끼가 재미 들렸는지 쪼르르 달려가 쇠꼬챙이를 다시 주워 왔다.
하지만 이미 의기양양할 대로 의기양양해진 정다운.
“그거 말고 이건 어떨까?”
정다운은 그림자 하인이 들고 있던 활대를 빼앗아 중심을 딱 잡고 손가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잘도 돈다!
[어? 푸히히! 이것도 돌아가네?]
토끼가 까르르 웃었다.
[화살도 돼요? 돌아감?]
“화살? 훗, 이딴 건 얼마든지!”
빙글 빙글!
[호우!]
화살은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난해했지만, 결국 1초 만에 휙휙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하라는 창술은 안 하고 쓸데없는…….>
알파의 허탈한 중얼거림은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토끼가 눈을 번뜩였다.
[그럼 아예 무거운 건 어때요?]
들고 온 건 망가진 철방패였다.
정다운의 눈도 신중해졌다.
“방패? 과연……. 도전 정신이 생기는 물건이군.”
기다란 막대기를 돌리는 것과 넓은 판을 중심 잡고 돌리는 건 원리가 완전히 달랐다.
볼펜을 잘 돌리는 사람이 공책까지 잘 돌린다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정다운은 가능했다.
“흐랴압!”
정다운은 커다란 방패의 중심을 검지로 받치고 힘껏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위에서 그 무거운 방패가 잠시 비틀거리더니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아슬아슬한 장면에 토끼가 안달을 내며 열심히 응원했다.
[어어? 으아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요!]
“아자아아!”
그가 열심히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자 방패가 점점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해, 해냈다!]
토끼가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몰아쉬며 정다운을 극찬했다.
[크으! 이걸 또 해내시네! 님 지금 뭔가 멋짐! 쓸데없지만 멋지다! 이건 인정한다!]
‘……나는 역시 멋지구나!’
정다운은 방패를 돌리며 진심으로 지금 자신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거! 다른 거요!]
토끼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정다운은 돌리고 돌리는 걸 반복했다.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평평한 방패 다음에는 훨씬 무거운 솥단지도 돌려 보고!(손가락이 후들거렸지만 결국엔 해냈다.)
애매하게 생긴 어깨 갑옷도 돌려 보고!
[서, 성공!]
내친김에 불규칙하게 생긴 투구도 돌려 보고!
[성공!]
머리에 쓰는 걸 돌린 김에 토끼의 중절모도 벗겨서 돌려 보고!
[히야아!]
그러다 아예 토끼까지 몸을 웅크리게 해서 등판에 딱 중심을 잡고 돌리기 시작했다.
[이히히! 이건 너무 간지러움! 근데 나도 돌아감!]
토끼가 허공에서 몸을 바동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리 리액션 하면 토끼!
그 덕분에 정다운은 완벽하게 신이 나 버렸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많은 걸 돌려 본 적은 없었는데, 자꾸 도전하다 보니 이제는 별게 다 돌아가는 것이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 지서연이 내 준 숙제는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찌르기 1000번은 고사하고, 1000개의 물건을 손가락으로 돌릴 기세였다.
[이번엔 양손으로 어떰? 각각 다른 걸 돌리기!]
“뭐든 가져와!”
그가 호탕하게 검지를 치켜들었다.
엄청난 자신감으로 목소리에 점점 카리스마까지 섞이고 있었다.
‘나의 재능을 발견했다!’
정말이지 뜻밖의 재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돌리고 돌리다가…….
번쩍!
<최초 업적 달성!>
“돌리기의 달인!”
- 보상 : <돌리기> 스킬
급기야 업적까지 떴다.
“……어? 업적?”
[응?]
<……?>
하라는 창술은 안 배우고, 이상한 스킬이 생겨 버렸다.
“도, 돌리기?”
정다운도 이번만큼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돌리기 (1레벨) NEW
- 더 잘 돌릴 수 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욱 잘 돌리게 된다.
[이, 이딴 스킬도 있다고!?]
“도, 돌리긴 뭘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