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41화>
* * *
<류승우 님에게 귓말이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알파를 통해 류승우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승우 형이!?”
[호오? 그 양반 아직 살아 있나 보네요?]
<류승우 : 다운아, 무사히 잘 지내니?>
“오, 진짜 승우 형이다!”
정다운은 급히 반기며 귓말을 보냈다.
꿀꺽!
<정다운 : 형! 다들 무사해? 거긴 좀 어때? 주변에 뭐 있어? 바로 찾아갈게!>
<류승우 : 우린 아직 무사해. 조금 정신은 없지만. 여긴 완전히 난장판이야.>
“난장판?”
묘한 표현에 정다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류승우 : 일단 시간이 없으니 현재 제4 던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줄게. 식량도 아껴야 해서…….>
<정다운 : 그래, 그래.>
류승우는 말을 아꼈다.
귓말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소량의 생명 에너지.
즉, 식량을 먹고 제물을 바쳐야 귓말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정다운이 식량을 미리 한가득 챙겨 주긴 했지만, 앞으로 그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 귓말로 긴 수다를 낭비하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류승우 : 음,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이곳에 갑자기 스테이지-2를 관리하던 도우미 바분이 나타났었어.>
“으잉? 바분이?”
[바분이라고요?]
전혀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정다운과 토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니, 갑자기 바분이 거기서 왜 나와?”
[아! 그 자식이 설마!?]
토끼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스테이지-4에 바분이 나타났다면, 그 이유는 뭘까?
물어보나마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류승우 : 이유는 우리도 정확히는 몰라. 다만, 바분의 손에 어떤 주먹만 한 큐브가 들려 있었어. 그리고 그는 그걸 이용해 제4 던전을 자기 멋대로 주무르기 시작했어. 직접 괴물들을 부린다든가.>
“주먹만 한 큐브? 그건 또 뭐야? 도우미가 직접 괴물들을 부린다고?”
들을수록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토끼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앗, 그거 분명 제단일 거예요! 바분이 제4 던전의 제단을 손에 넣은 거라고요!]
“뭐? 제단이라고? 크기가 주먹만 하다는데?”
[마법으로 어떻게든 작게 만들었겠죠! 네모난 제단을 줄이면 큐브지 뭐야!]
고개를 갸웃하는 정다운에게 토끼가 오두방정을 떨며 다급히 설명했다.
[바분은 항상 다른 도우미들이 관리하는 던전을 탐냈어요. 그런데 이번에 어떤 식으로든 세르파가 죽었다는 걸 눈치채고 넘어온 게 분명해요!]
바분은 애초에 토끼의 스테이지-1을 호시탐탐 노리던 자였다.
결국엔 좋은 트집을 잡아 빼앗았고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있던 제단을 정다운이 홀랑 뜯어와 버렸고, 그 순간부터 스테이지-1은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제단이 없으니 생명 에너지도 모을 수 없었고, 바분의 격도 오르지 않았다.
얻는 것 하나 없이 일만 잔뜩 늘어나 버린 셈.
한데 그런 그가 이번엔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스테이지-4에 넘어왔다는 것이다.
[와, 이 똥멍청이! 나는 왜 이 당연한 걸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거지?]
토끼는 자신의 머리를 꽁꽁 때리며 자책했다.
바분이 스테이지-1에 보이지 않았을 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안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정다운이 물었다.
“그런데 어차피 나머지 제단들은 전부 나한테 있잖아? 마녀의 집이야 처음부터 제단이 없는 곳이고.”
[거기부터 먼저 도착한 건지, 아니면 먼저 이쪽에서 허탕 치고 거기로 넘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제4 던전 하나는 확실히 빼앗긴 거예요.]
<흠……. 제단을 아예 들고 다닌다니까 이번엔 훔쳐 오기도 힘들겠군요.>
대화를 다 듣고 있던 알파가 단호히 말했다.
<별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죽여서 빼앗아야겠습니다.>
“어우, 넌 또 왜 이렇게 호전적이야?”
<모든 것은 에르테아를 위하여! 우리 앞에 있는 적들은 기회가 있을 때 무참히 밟아 죽여야 합니다.>
알파의 글자 하나하나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토끼가 순간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바분이 제단을 들고 다닌다면서요? 그 말은 아직 그가 그 던전을 관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에요.]
“관리할 생각이 없다고?”
[네, 원래 도우미 따위에게 던전을 자기 마음대로 건드릴 권한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던전이라면 괜찮아요. 무슨 깽판을 쳐도 허용된다고요.]
“깽판?”
[네, 진짜 깽판요. 괴물 배치 마음대로 바꾸고, 함정들 막 발동시키고.]
바분의 속셈을 눈치챈 토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분은 던전을 완전히 접수하기 전에 그동안 자기가 입은 모든 손실부터 전부 보상받을 생각인 게 분명해요. 거기 있는 모든 참가자들을 죽여서 생명 에너지를 싹!]
“헐? 죽인다고?”
<류승우 : 저기……. 흠흠, 이제 내가 말 좀 해도 될까?>
알파를 통해 이곳의 모든 대화를 전해 듣고 있던 류승우가 조심히 끼어들었다.
<류승우 : 아무튼, 바분은 도망쳤어.>
……네?
순간 정다운과 토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쳤다고?”
[도망을요? 왜요?]
<류승우 : 조금 전에 우리한테 잡혀서 몇 대 맞았거든.>
“……네?”
[……맞았?]
<류승우 : 하하, 용의 사도라는 거 엄청 좋더라. 꼴 보기 싫은 도우미 마음껏 때려 줄 수 있고.>
“…….”
[…….]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생각해 보니 감히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그는 류승우였다.
토끼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류승우 님은 그 무서운 세르파조차 힘으로 묵사발을 냈었죠? 그깟 바분 따위…….]
‘그깟 바분 따위’라는 말에 류승우는 소탈하게 웃으며 진실을 말했다.
<류승우 : 아냐. 사실은 진짜 죽을 뻔했어. 모두가 힘을 합쳤는데도 간신히 쫓아내는 게 한계였으니까. 그 전투의 여파로 지금 제4 던전은 거의 붕괴 직전이야.>
“그렇게나!? 붕괴 직전이라고?”
[헐, 던전이 파괴되었다고요? 바분 진짜 미쳤네. 얼마나 난동을 부렸길래!]
<류승우 : 아무튼 그래서. 우린 지금 전투가 아니라 붕괴되고 있는 던전에서 살아남는 게 급선무야. 그럼 또 연락할게!>
또 급한 일이 생겼는지, 다짜고짜 연락을 끊는 류승우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남기는 건 잊지 않았다.
<류승우 : 그러니까 다운이 너도 조심하라고. 혹시라도 바분과 마주치게 되면, 큐브를 조심해. 아직 놈에게 있으니까.>
사리사욕을 위해 제단을 사용하는 도우미의 힘은 굉장히 위험했다.
* * *
[크허억!]
털썩!
한편, 도망친 바분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평소에 그렇게 멋을 중시하던 개코원숭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몰골이 말도 아니었다.
어디서 번개라도 맞았는지 새까맣게 그을린 흔적들.
검에 무참히 썰린 상처들.
부러진 한쪽 팔은 넝마처럼 너덜거렸다.
[크아악! 감히! 그깟 놈들이 나를 이런 꼴로 만들다니!]
후드드득!
수치심와 분노로 가득 찬 바분의 포효에 주변에 있던 괴물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떨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항상 무시만 해 오던 인간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날이 올 줄이야.
[크윽! 두고 보자! 내 그놈들을 모두 뼈까지 산 채로 씹어 삼켜 주마!]
이번엔 완전히 방심하고 있어서 당한 게 분명했다!
원래 참가자들의 공격은 도우미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게 바로 격의 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공격이 훅! 하고 들어오니까, 엉겁결에 모든 공격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설마하니 참가자들 중에 격이 높은 인간들이 섞여 있었을 줄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바분으로서는 정말 그 이유가 궁금했다.
시작부터 고등 생물인 인간이 격이 오르는 건, 토끼 따위가 격이 오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바분은 힘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야수의 숲이군.]
워낙 경황 중에 게이트를 열었더니, 바로 직전에 방문했던 곳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그는 처음에 관리자가 없어진 스테이지-4를 순서대로 접수하기 위해 제1 던전 야수의 숲부터 방문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곳의 제단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제단 없는 던전은 스테이지-1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행여나 다른 도우미들도 소식이 들어가게 되면, 괜히 경쟁자만 늘어날 테니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 아예 이번엔 다 건너뛰고 역순으로 제4 던전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제단부터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거기까진 딱 좋았는데……. 크으윽!]
그렇다. 제단을 얻은 기쁨에 주변 인간들을 공격했다가 류승우에게 반격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모든 게 완벽했을 것이다.
[반드시 복수하고 만다. 두고 보자, 그놈들!]
바분의 두 눈에 잔혹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이 너덜거리는 몸부터 회복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부러진 팔을 붙잡고 강제로 어깨뼈를 맞췄다.
뚜득!
[크아악!]
엄청난 고통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의 긴 팔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 팔을 옆으로 채찍처럼 휘둘렀다.
콰앙-!
그 한 방에 옆에 나란히 서 있던 거목들이 파괴되며 옆으로 넘어졌다.
깜짝!
그러자 그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작은 괴물들 몇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오너라.]
화악!
그의 손이 놈들을 향해 뻗어지며 압도적인 힘으로 괴물의 목줄기를 잡아 뜯었다.
콰직!
“키힉!”
괴물은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단번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그 몸에서 도우미에게만 보이는 죽음의 마력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으으……! 역시 좋구나.]
바분은 죽음의 마력을 한껏 음미하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체력이 돌아온 것이다.
바분은 정신없이 도망치던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챙긴 제단을 들어 보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흐흐, 그래. 고생은 조금 했어도 이것만 있으면 됐지.]
물론 그 과정에서 힘을 다 소모해서 더 이상 돌아갈 게이트 하나 열 힘도 없지만…….
어차피 마력이라는 건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게다가 도우미라는 존재는 어떤 상처도 금방 낫는다.
제단과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명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겐 그 두 가지가 다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버려진 던전 아니던가.
누굴 죽여도, 무엇을 파괴해도 아무도 정죄하지 않으리라!
[크흐흐! 그래! 더, 더 죽어라! 모두 죽어서 전부 나를 위한 제물이 되거라!]
그렇다! 죽이는 것이다. 죽이고 또 죽일 것이다!
“키힉!”
“캬아악!”
콰직!
콰아앙!
[크하하! 관리자가 없는 던전은 정말 최고구나!]
바분은 계속해서 야수의 숲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든 괴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살육을 거듭할수록 끔찍했던 그의 상처들이 점점 치유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묘한 광경이 들어왔다.
[……저건?]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