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40화>
* * *
인생에서 항상 최고의 순간만 기억에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천 번의 셀카를 찍고, 그중에서 제일 잘 나온 단 한 장의 사진만 진짜 내 얼굴인 걸로 지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다운에게 ‘그림자 비술’은 바로 그런 용도였다.
원래는 그러라고 만든 비술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그는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자세 한 번을 위해 수천 장의 흑역사를 찍어 내는 노력.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창피함과 수치심, 자기혐오 같은 감정은 전적으로 본인이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공장처럼 찍어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왜 자꾸 엉덩이를 뒤로 빼요?”
“왜 자꾸 오리처럼 뒤뚱거리냐고요!”
아까보다 더 많이 혼나는 정다운.
지서연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정다운은 실수를 반복했다.
창술은 궁술보다 훨씬 어려웠다.
‘과녁’을 보는 능력 덕분에 활 쏘는 건 진짜 자세만 딱 배우면 끝이었다.
하지만 창술은 달랐다.
무슨 게임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똑같은 자세만 반복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같은 찌르기라도, 상황이나 표적의 위치에 따라 자세가 계속 달라져요. 그걸 변초라고 해요.”
“그건 또 뭔가요…….”
[패턴이 상황에 따라 동작이 여러 가지라는 거죠, 이 몸치야.]
토끼가 낄낄거렸다.
[와, ‘제국창술’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거였음?]
<아닙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군인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제국창술이었습니다.>
알파는 오랜 옛날 제국민들이 사용하던 제국창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개나 소나 배우는 기본 무술이라는 거네요?]
<무슨 소리죠? 개나 소가 어떻게 창술을 배웁니까?>
[…….]
농담을 이해 못 하는 알파였다.
<아마 정다운 님도 사람이라면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 가차 없었다.
“아, 너네 그만 좀 떠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괜히 우리한테 성질내는 거 봐!]
“자,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릴게요.”
지서연은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자, 보세요. 이렇게 두 다리는 땅을 받치고, 시선은 정면. 몸과 창이 따로 놀지 않게. 일직선으로 쭉. 이것이 바로.”
점점 자세가 갖춰지며 지서연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리고.
“합!”
그녀의 창이 찰나의 빛줄기가 되어 대포처럼 공간을 찢어발겼다.
콰앙!
“……!”
급기야 저만치 앞에 있던 거대한 바위가 박살이 나 버렸다.
정다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이걸 나보고 따라하라고요?”
“저는 중급 스킬이라서 오러가 맺히는 거예요. 저도 이렇게 되기까지 엄청 수련했어요. 괴물이 없어도 허공에 창질을 주구장창…….”
결국 레벨 업을 위해선 반복 노가다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이번엔 오러 빼고 갈게요.”
지서연은 살포시 웃으면서 힘을 빼고 다시 한번 시범을 보여 줬다.
팡!
“자, 자세만 보면 쉽죠?”
쉽기는 개뿔.
그걸 따라 하는 정다운의 엉덩이는 또 오리궁둥이처럼 뒤로 빼꼼 나와 있었다.
지서연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여태까진 어떻게 괴물들과 싸우신 거예요? 주무기가 쇠꼬챙이였다면서요.”
“그냥 뭐 있나요. 이렇게 막 찌르고 휘두르고…….”
정다운이 보여 주는 마구잡이 창술(?)에 그녀는 놀라워했다.
“이런 자세로 계속 싸웠다고요? 당장 스테이지-2의 레드아이만 해도 창을 바로 낚아채 가 버렸을 텐데.”
‘그러니까 레드아이가 대체 뭔데요…….’
지금까지 정다운이 직접 싸워 온 괴물들이라고 해 봐야 대부분 늑대나 쥐, 개미 같은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괴물들이었다.
오히려 스테이지-2에 사는 조무래기들은 전혀 만나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기본자세는 정말 중요해요.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겠지만, 공격과 동시에 방어와 회피로 이어지는 자세거든요.”
지서연은 무수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제국창술’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훌륭한 무술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정다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물론 이런다고 스킬이 생길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기본자세만 제대로 익혀 놓는다면, 유사시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지서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정다운에게 조언했다.
“현재 정다운 씨의 능력은 게임으로 치면 소환사에 가까워요. 골렘들과 그림자 하인들이 전투의 핵심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막상 본인이 약하면 한 방에 죽는다고요.”
“넵,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죽지 마세요. 진짜.”
지서연은 누가 죽는 것에 유독 민감했다.
그 모습에 정다운은 왜 지서연의 일행들이 그녀에게 충성하며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류승우 님 같죠?]
……끄덕.
토끼의 귓말에 정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참가자들 중에 가끔 이런 분들이 툭툭 나와 주니까, 도우미 일도 참 보람 있는 직업이었죠.]
토끼는 아련한 표정으로 과거를 추억하며, 둘에게 제안을 했다.
[아, 이러지 말고 차라리 실전을 해 보는 건 어떠심?]
“실전이요?”
“실전?”
[네, 원래 이 인간은 몸으로 직접 굴러야 늘어요.]
“그 말도 확실히 일리가 있네요. 일단 머리로는 다 배웠으니까요.”
그 말에 지서연이 눈을 빛내며 정다운을 쳐다봤다.
정다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흠……. 진짜 그럴까? 그러고 보니 마침 딱 좋은 곳이 있긴 한데.”
[좋은 곳이요? 그냥 해골 병사 하나 잡아 와서 싸우면 되지 않음?]
“그것도 괜찮지만, 어차피 고생하는 거 창술 연습 제대로 해 보자고.”
[……?]
“……?”
정다운이 씨익 웃는 모습에 토끼와 지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심연의 바다, 검은 여왕의 성.
“헉헉,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석정호는 정다운과 토끼가 나타나자 반사적으로 고개부터 꾸벅 숙였다.
그러다 문득 그 뒤로 따라온 지서연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왜……?”
토끼가 고개를 갸웃하며 지서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왜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요? 전남친의 원수라도 됨?]
“그건 아닌데…….”
지서연은 말을 아꼈다.
[아니면 저 아저씨가 고백하다 차였나? 에이, 그건 좀 아닌가? 둘이 나이 차도 있는데…….]
움찔.
[음?]
그 순간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석정호의 모습을 토끼가 포착하고 말았다.
[호오오오? 이거 봐라?]
토끼의 입꼬리가 하늘 끝까지 승천하기 시작했다.
몹시 신나 버린 것이다.
[진짜 진짜임? 설마 진짜 고백했다 차인 거라고요? 아니면, 강제로 덮치려다 실패했거나?]
“그,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저 여자한테 창에 찔려 죽을 일 있습니까!?”
석정호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여자를 덮치다니!
던전에서 그런 위험한 짓거리를 했다간, 갑자기 스킬이나 칼이 날아올 수 있었다.
던전 참가자들이라면 누구나 소지품에 칼 하나쯤은 넣고 다니지 않는가!
[그럼 그거네? 차이고 나서 열등감이 폭발해서 사이가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다든가. 아유, 꼴불견.]
“크흠흠, 그나저나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이제 조금만 기다리시면 고양이 100마리 돌파 순간을 목격할 수 있으실 겁니다.”
석정호는 새빨개진 얼굴로 얼른 말을 돌렸다.
정다운이 눈을 반짝였다.
“헐, 100마리라고요? 벌써요?”
“넵, 앞으로 17마리만 더 모으면 됩니다!”
거두절미하고, 정다운은 여기에 온 본론부터 바로 꺼내 들었다.
“그럼 석정호 씨는 하던 대로 계속 그림자 고양이들 잡고 있으세요. 대신 그중에 그림자 환상들 한두 마리만 제 쪽으로 유인해 줄 수 있어요?”
“네? 실체를 가진 환상들 말씀이십니까?”
“네.”
“……?”
석정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환상들이야 여긴 넘쳐 났고, 오히려 한두 마리만 유인하는 게 더 까다로웠다.
* * *
“일단 한 마리 보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와, 이 아저씨 유인하는 거에 도가 터 버렸네?]
토끼가 감탄한 대로 정다운의 앞에 실체를 가진 환상 한 명이 다가왔다.
그 모습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는데, 석정호의 개인적인 기억이 악몽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다운과 가까워질수록 그 환상이 점점 무너져 내리며 스멀스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있던 정다운이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집중하자!’
그는 요즘 들어 가장 괴로웠던 기억을 강하게 떠올리며 그림자 방울을 딸랑거렸다.
‘집중! 나는 괴롭다. 힘들다. 으악, 사람 살려!’
딸랑 딸랑!
솔직히 이 방법이 될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동안 계속 그림자 하인들을 만들어 내면서 정다운에게도 나름의 요령(?)이라는 게 생겼다.
그림자 고양이가 배출하는 악몽은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기억부터 끄집어 내 실체화된다.
그런데 정다운에게 가장 최근에 끔찍하게 힘들었던 기억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오?]
구경하던 토끼가 탄성을 터뜨렸다.
스르륵…….
놀랍게도 환상은 지서연의 모습으로 똑같이 변해 버렸다!
그런데 그 손에는 당연히 창이 들려 있었고, 다짜고짜 정다운을 향해 창을 찔러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한 자세의 제국창술로!
“끼에엑!”
“으헉!?”
정다운은 황급히 뒤로 빠지며 서지연의 환상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오, 진짜 됐네요? 그림자 비술로 이런 것도 될 줄이야!]
토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반면에 진짜 지서연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니, 저한테 창술을 배우시는 게 저렇게까지 끔찍하셨다고요? 악몽일 정도로?”
“흠흠.”
정다운은 따가운 그녀의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체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과는 별도로 이 방법은 창술을 배우기에 최고로 좋은 방법이었다.
그가 불러낸 지서연의 환상은 모든 동작이 제국창술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다운의 악몽(?) 속에 있는 지서연의 이미지가 그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창술의 수준이라고 해 봐야 정다운을 가르치면서 보여 준 기본자세뿐.
속도도 정다운이 따라 하기 쉽게 아주 느린 속도에 맞춰져 있어서, 그가 맞서 싸우기에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와중에 주의할 건 딱 하나.
[헐? 위험해요!]
갑자기 지서연 환상의 창에서 검은 빛이 맺혔다.
그리고, 콰앙!
“……어우, 죽을 뻔했네.”
이 바위를 박살 내던 중급 찌르기만 잘 피할 수 있다면, 바로 앞에서 보고 따라 하기 딱 좋은 교과서와 창술을 겨룰 수 있었다.
게다가 환상이 아니라 진짜 선생님도 여전히 뒤에 버젓이 서 있었다.
“어허! 또 오리궁둥이 나온다! 또!”
“어윽, 넵.”
……갈 길이 멀었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 있던 또 다른 환상들까지도 그를 노리고 다가왔다.
그 모두가 지서연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끼에엑!”
“끼엑!”
“헐? 안 돼! 아직 둘 이상은 무리라고!”
정다운이 다급히 손짓하자, 그 뒤에 서 있던 그림자 하인들이 환상들의 가슴에 화살을 쐈다.
“윽, 괜히 제가 죽는 기분이네요.”
진짜 지서연은 마음이 괜히 불편했다.
“게다가 왜 하필 끼에엑이야? 내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