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37화>
* * *
‘끄응, 진짜 미쳐 버리겠네!’
석정호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림자 고양이들을 꼬여 내는 건 생각보다 엄청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이 영악한 놈들이 화염충이 너무 멀어지면 금방 관심을 잃고 딴청을 피웠고, 또 너무 가까우면 쏜살같이 덤벼들어 불씨를 꺼뜨렸다.
때문에 석정호는 그 간격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기 위해 화염충의 뒤를 일일이 따라다니며 컨트롤해야 했다.
문제는 실체를 가지고 덤벼드는 환상들이었다.
괜히 반격하겠다고 환상을 한 대라도 때렸다간, 그림자 고양이들이 깜짝 놀라 도망가 버렸다.
결국 공격이 들어오면 막거나 피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야말로 동네북이 따로 없었다.
“크허억……!”
털퍼덕!
석정호는 결국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한계였다.
그 고생을 했는데도, 하늘 신전 지하에 모여든 그림자 고양이는 고작 7마리.
‘크윽. 더는 움직일 힘이 없다……. 이렇게 죽는 건가…….’
완전히 기진맥진해 하늘 신전으로 돌아와 걸레짝처럼 누워있는 석정호를 보며 토끼가 장성한 자녀를 보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이 와중에 치명상은 하나도 없는 거 봐. 석정호 님 많이 컸네요? 옛날엔 빌빌거렸는데.]
“차, 차라리 나를 그냥 죽여라. 이 씨부랄 것들아!”
석정호가 쥐어짜는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질렀다.
치명상은 없지만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이 몽롱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자, 고생 많았어요. 정성껏 끓인 미역국이에요. 부족한 피를 보충해 줄 거예요.”
정다운이 심연의 미역국을 들고 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미역국을 석정호의 입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어푸! 어풉!”
“자, 자, 쭈욱 들이켜요. 뜨거울까 봐 미리 식혀 왔어요. 옳지, 잘 먹네.”
벌컥 벌컥!
“……!”
석정호가 눈을 부릅뜨고 미역국을 꾸역꾸역 삼켰다.
미역국은 식어도 맛있다.
건더기도 흐물거려서 힘이 없어도 술술 마시기 편했다.
심연의 미역국이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던 그의 정신을 멱살 잡고 강제로 끌고 왔다.
부족한 피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심연의 미역국에 상처를 치료하는 기능 따위는 없었다.
“자잘한 상처가 많네요? 조금만 참아요. 나중에 여기 공략하면 한꺼번에 치료될 거니까.”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고!’
정다운의 말에 속으로 울컥한 석정호.
하지만 그걸 소리 내어 말할 힘도 없었다.
반면 정다운은 말할 힘이 많았다.
“그래도 전투직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이런 힘든 일도 전투직한텐 별로 안 힘들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휴, 나도 언제쯤 어엿한 전투직이 될 수 있으려나…….”
정다운은 진심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전투직에 대한 기준은 어디까지나 류승우와 구호열이었다.
심연어의 척추를 뽑아 휘두르고 철갑조개를 산산조각 내는 괴물들…….
석정호도 한 무리의 대장쯤이나 되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 정도로 터프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다운은 석정호의 상처들을 정화된 천으로 대충 동동 감아주고, 그를 다시 검은 여왕의 성으로 내몰았다.
“자! 이제 괜찮죠? 다 쉬었으면 2라운드 시작해 볼까요?”
“…….”
석정호는 서러운 감정이 몰려와 눈물을 들이켰다.
바하무트의 말대로 그는 정말 가혹한 주인이었다.
“어?”
그런데 그 와중에 그가 주섬주섬 소지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모습이 정다운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것은 붉은색 연고였는데, 상처에 바르자 피가 부글부글 끓더니 점점 멎기 시작했다.
“커흑!”
생살을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에 석정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정다운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 아저씨, 그 연고는 뭐에요?”
화들짝!
“그, 그게…… 생산직들이 약초 스킬로 만들어 낸 지혈제인데, 피를 멎게 해 줍니다.”
혹시라도 약을 뺏길까 두려워 석정호의 태도는 엄청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정다운도 악마는 아니라서 약을 뺏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피를 멎게 해 준다고요? 그런 스킬도 있어요?”
“아니, 상처까지 낫게 해 주는 건 아닙니다. 기껏해야 피만 멎게 해 주는 반쪽짜리 효과라서…….”
“반쪽짜리라니! 이렇게 완벽한 약을 두고 무슨 소리예요! 이거 만드신 분이 누군데요?”
정다운은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지혈제라니!?
피를 회복시켜 주는 심연의 미역국과 병행하면 완전 찰떡궁합이 아닌가!
토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님, 약초 제작 스킬 몰라요? 생산직들한테는 꽤 평범한 스킬이잖아요.]
“우리 팀에는 없었다고! 지혈제만 있었어도 동료 두 명은 더 살릴 수 있었어!”
스테이지-1에서 정다운이 속해 있던 류승우 일행에겐 안타깝게도 약초 스킬을 가진 이가 없었다.
기껏해야 적당한 약초를 짓이겨 소독한 붕대와 함께 응급조치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당장 어떻게 만드는 지 물어봐야겠다! 나 잠시 마을에 다녀올게!”
정다운은 석정호의 생산직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다.
“아, 맞다! 아저씨는 여기서 계속 고양이들 모으고 있어요. 그림자 하인은 여기 남아서 미역국 끓이고 있고.”
“니야앙.”
어느새 미역국을 끓이는 법도 배우게 된 그림자 하인이었다.
“아저씨 위험할 것 같으면 바하무트가 여기 남아서 도와주고.”
[흐흐흐. 그 명, 충실히 이행하겠나이다.]
“헉…….”
옆에서 희번뜩 눈을 빛내는 바하무트를 보며 석정호는 울상을 지었다.
* * *
“지혈제를 어떻게 만들었냐고요? 그야 당연히 스킬로…….”
정다운이 찾아와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석정호의 생산직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숲에서 찾아낸 약초를 갈아서 만든 겁니다. 마침 저한테 약초 채집 스킬이 있거든요.”
대답한 이는 50후반 나이의 깡마른 인상의 생산직이었다.
그는 석정호의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정다운의 얼굴이 밝아졌다.
“약초 채집 스킬이요? 그럼 순수하게 스킬로만 만든 약은 아니라는 거네요?”
“네. 약초만 있다면 누구나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약초 채집 스킬은 한번 먹어본 약초가 주변에 있으면 바로 알 수 있는 스킬이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지고 위치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약초입니다.”
“……!”
그가 꺼낸 약초의 모습을 확인한 정다운은 경악했다.
맙소사! 고추였다!
크고 기다랗고 빨간 고추가 그의 소지품도 아니고 바지 주머니에서 주르륵 딸려 나온 것이다!
“이, 이거…… 고추 아닌가요? 고추 맞죠?”
“네, 던전 고추 처음 보십니까? 생산직이라면 누구나 바지 주머니에 고추 하나씩은 넣고 다니잖아요?”
“……!”
그, 그럴 수가!
정다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까지 덜덜 떨며 그에게서 빨간 고추를 건네받았다.
크고 실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추가 이런 곳에서 튀어나올 줄이야!
생산직 아저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던전 고추에는 지혈 작용이 있어서 다쳤을 때 바로바로 짓이겨서 상처에 바르면 피가 딱딱하게 굳습니다. 하지만 너무 독성이 강해서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헐, 고추에 그런 효능이 있었다니……!”
“물론 우리 세상에서의 고추에는 그런 효과가 없었죠. 이건 엄밀히 말하면 독초의 일종입니다. 그냥 씹어 먹으면 바로 배탈이 나요.”
“마, 맛은요? 고추 맛은 똑같이 맵나요?”
“네. 맵습니다. 던전 고추는 크기가 클수록 점점 매워져요. 독성이 강해지기 때문이지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은 던전에서는 정반대로 적용이 되었다.
게다가 너무 독성이 강해서 식량으로 쓰기에도 조금 애매했다.
매운맛은 느껴지는데, 먹으면 배탈이 나는 고추를 누가 먹겠냐는 말이다.
게다가 고추로 배를 채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정다운에게 독성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정화!”
파아앗!
“헛, 정화 스킬이 있으셨구나.”
정다운이 고추에 정화를 걸자 생산직들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정화 스킬이 있다면 독초라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와그작!
정화한 고추를 한입 베어 문 정다운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매운맛이 혀를 자극하며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와, 이거 진짜네. 진짜 고추를 발견해 버렸어! 이거 대체 어디서 찾으셨어요? 숲에 있던가요?”
“어, 그게 음……. 스테이지 2에 엄청 많았습니다. 이곳에 와선 아직 발견 못 했고요.”
스테이지-2라니!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했다!
스테이지-1에서 연습 게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피 튀기는 고생이 시작되는 스테이지-2에 ‘지혈초’가 잔뜩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 지혈초, 이제는 별로 없으시겠네요?”
“아직 조금 남긴 했는데, 또 발견할 때까지는 당분간 아껴 쓰려는 중입니다. 필요하시면 몇 개 드릴까요?”
“고, 고맙습니다……!”
옹골차게 자란 고추 안에는 고추씨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거 하나만 있어도 얼마든지 고추 농사가 가능했다!
크게 감격한 정다운은 생산직들에게 자신의 소지품을 한껏 개방했다.
“혹시 뭐 필요하신 거 있나요? 숫돌? 횃불? 식칼? 도마? 그릇? 아니면 감자나 고기라도?”
와르르!
“……!”
“헉?”
정다운에게서 어마어마한 물량의 물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자, 생산직들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참가자들까지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저렇게 잡다한 걸 많이 들고 다니지!?’
괴물의 뼈를 갈아 만든 숟가락이나 젓가락 정도는 자신들도 하나씩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포크는 또 어떻게 만들었단 말인가!
“자, 이런 건 어때요? 이런 흉흉한 세상에 생산직들이라도 제대로 된 갑옷 정도는 입고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
정다운이 급기야 갑옷까지 꺼내 들자, 생산직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 아니. 저희는 고작해야 고추 하나 드렸는데, 이런 걸 받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고작이라니요! 아저씨들이 저한테 준 건 고추가 아니라고요. 이것만 있으면 제육볶음이 가능하다고요!”
매운 고추 냄새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정다운의 머릿속에는 이미 하늘 신전 위에 주렁주렁 열매를 맺은 고추밭이 보였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만들게 될 앞으로의 수많은 음식들도 주렁주렁 떠다녔다.
“사양하지 마세요. 다 저한테 안 맞아서 들고만 다니는 거니까요. 내구력은 제법 괜찮아요.”
아무렇게나 덧대 입는 갑옷들이라도 나름 사이즈라는 게 있었다.
사이즈가 큰 건 고쳐 입으면 되는데, 너무 작은 건 사이즈가 맞는 다른 사람한테 물려주는 게 제일 좋은 일이었다.
[그냥 쉽게, 살쪄서 안 맞는다고 하셈.]
“시끄러.”
정다운은 옷을 동생들에게 물려주는 심정으로 황송해하는 생산직들에게 갑옷을 한 벌 한 벌 입혀 주었다.
그런데 그 갑옷이 그냥 갑옷이 아니었다.
“마, 맙소사! 이거 3강짜리 아닌가요?”
“뭐? 3강이라고?”
“겨우 고추 하나 줬을 뿐인데……!?”
생산직들의 모습이 점점 비까번쩍하게 변하자, 석정호의 전투직 부하들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나중에 내가 뺏어서 써야겠다. 돼지 목에 진주도 아니고, 생산직 주제에 무슨 저런 귀중한 물건을…….’
그런데 그때였다.
“아, 혹시 이 갑옷들 누가 뺏으려고 하면요.”
정다운은 생산직들에게 한 마디 더 보탰다.
“그냥 그날 식사에 독초를 풀어 버려요. 그딴 놈들은 밥값도 아까우니까. 죽으면 돌려주겠죠.”
“……!”
오싹!
어느샌가 정다운의 시선이 석정호의 부하들을 정확히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