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29화>
[오오오!]
휘오오!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그 가운데 바하무트의 새하얀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뭐지? 이대로 승천이라도 할 기세인데?”
[비슷한 거죠. 격의 상승이란 결국 정해진 운명을 초월하는 거니까요. 그야말로 신선이 되는 거임.]
[후우우…….]
이윽고 바하무트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은 여전히 동그란 눈사람에 불과했지만, 정다운은 어쩐지 그 모습이 마치 새로운 생명을 피워 내는 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거의 맞았다.
쩌적.
바하무트의 얼굴이 갑자기 갈라지며 길고 깊은 홈이 파이기 시작했다.
그 홈을 따라 어두운 그림자가 맺히며 단순하지만 표정 비슷한 게 생겨났다.
알파가 물었다.
<얼굴에 그 ‘ㅇ_ㅇ’라고 음각된 문양은 무슨 의미입니까?>
바하무트가 입을 열었다.
[복합적인 의미입니다. 지금은…… 그렇군요. 이 감정은 ‘그리움’입니다.]
바하무트의 표정처럼 그의 말투도 묘하게 차분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말투는…… 어딘가 ‘알파’를 닮아 있었다.
그는 지금 검은 고양이 세르파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게 바로…… 세르파가 경험했던 감각이었군요. 이런 고양감과 우월감이라면 힘에 취해 변해 버렸던 것도 충분히 이해 갑니다.]
어딘가 들뜨면서도 묘하게 차분해지는 감각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격이 올랐다 해서, 딱히 마법의 클래스가 올라갔다거나 힘이 대단하게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분명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천천히 알아 가면 되리라.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하무트는 더 이상 언데드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마녀의 실험실에서 태어난 키메라 아이스 그렘린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 모든 걸 뛰어넘어서…….
[저는 ‘눈의 정령’이라도 된 기분입니다.]
[흥. 정령은 개뿔. 그냥 눈사람이겠지.]
[…….]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바하무트는 토끼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손을 들어 주변의 찬 공기를 만져 봤다.
휘오오.
하얀 눈발이 손짓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 눈송이들이 서로 뭉쳐지며, 마치 정다운이 흙덩이를 만지작거리듯 형태가 자유자재로 변화했다.
이것은 마법도 아니고 스킬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마녀가 억지로 주입시킨 아이스 마법을 통해 눈을 조종했다면, 지금은 그냥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눈과 하나가 된 기분이랄까…….
[뭔가 이 세계의 비밀을 엿본 기분입니다. 주인님, 저는 눈 그 자체가 되었나이다.]
바하무트는 정다운의 앞에 내려서 비장하게 엎드려 절했다.
하지만 정다운은 대체 뭐가 달라진 건지 알쏭달쏭했다.
“흠. 다른 건 모르겠고, 묘하게 알파와 느낌이 비슷해진 것 같은데?”
그에 알파가 대꾸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바하무트는 이제 저와 비슷한 개념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비슷한 개념이라니?”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용 에르테아 님께 모든 걸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걸?”
정다운이 바하무트의 영혼이 담겨 있던 라이프 베슬을 에르테아에게 제물로 바쳐 버리면서 그의 운명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는 저주받은 언데드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존재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상태창이었다.
<상태 창>
이름 : 바하무트
칭호 : 하급 관리자
체력 : 100/100 (%)
포만감 : 20/100 (%)
[히히. 하급이래요! 나는 중급인데!]
토끼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는 하늘을 깡충깡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혹시나 바하무트가 자신보다 격이 높아질까 봐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시 마음 놓고 까불어도 될 것 같았다.
상태창을 확인한 정다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포만감? 눈사람이 이젠 밥도 먹어?”
[포만감은 저에게 할당된 생명 에너지를 뜻합니다. 그리고 체력 수치는 눈이 녹은 정도를 뜻하는 것 같나이다.]
결국 저 ‘포만감 20퍼센트’라는 말은 알파가 그에게 허락한 월급의 양이라는 의미였다.
격이 올라갔어도, 현실은 예전의 5분의 1밖에는 힘을 못 쓴다는 말이었다.
조금 가엾은 일이었지만, 그는 이제 마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힘 따위에 집착하던 과거의 저는 이미 죽고 없습니다. 저의 힘과 영혼은 모두 에르테아를 위하여!]
<드디어 아주 바람직한 마음씨의 관리자가 들어왔군요. 앞으로도 힘내 주시길 바랍니다.>
알파는 흐뭇해하며 생명 에너지를 조금 더 보내 주었다.
포만감 : 23/100 (%)
진짜 조금이었지만, 그게 어디인가.
* * *
한편.
“휴, 정말 끔찍한 곳이구나.”
“여긴 진짜 지옥이야…….”
심연의 바다에는 어느덧 새로운 참가자들이 들어와 있었다.
도우미 세르파가 사라진 던전이지만, 그가 만들고 간 자동화 시스템이 참가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키야악!
참가자들은 심연어들에게 쫓기랴 새까만 흑안개를 물리치랴 너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길을 걷다가 가끔씩 발견되는 네모난 인공 태양 아래에선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만나는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그게 참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궁금했다.
“저 네모난 돌은 왜 떠 있는 걸까요?”
“그러게. 원리를 통 모르겠네. 원래 이상한 세상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저 가로등까지는 그림자 고양이들이 못 올라가니까 다행이에요.”
괴물들에게 둘러싸일까 봐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건 위험했지만, 이렇게라도 잠시 쉬어 갈 수 있다는 건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 있는 부유석들 사이에 정다운이 만든 황금빛 게이트가 버젓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건 대체 무슨 게이트일까요?”
“그러게요. 도우미가 사용하는 문 아닐까요? 어차피 우리는 도우미 허락 없이는 게이트를 통과할 수 없으니…….”
그런데 그때였다.
번쩍!
게이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문어 골렘도 잔뜩 도배된 태양석 덕분에 그 존재감이 엄청났다.
“헉!?”
“새로운 괴물이다!”
사람들은 기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 뒤로 줄줄이 따라 내려오는 골렘들의 존재감도 엄청났다.
“크워어!”
“오오옴!”
쿠웅! 쿵쿵!
“고, 골렘이라고!?”
아니, 저걸 애초에 골렘이라고 봐야 할까?
전신에 철갑을 두른 거인들의 출현에 참가자들은 잔뜩 긴장하며 전신에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이놈들이 별로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개를 캐라!]
문어 골렘의 선장이 된 바하무트는 근엄하게 골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녀석들이 곧바로 철갑조개를 잡기 위해 근처에 있는 땅을 열심히 파기 시작했다.
[크크, 예전엔 더럽게 말도 안 듣던 놈들이 이제는 말도 잘 듣는구나. 이게 바로 격이란 말인가? 크하하!]
힘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나, 이제는 권력에 맛이 들린 바하무트였다.
바하무트는 문어 골렘 위에 올라서서 골렘들을 다그쳤다.
[이놈들아, 어서 땅을 파라! 주인님이 주신 사명을 속전속결로 끝내서 한층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여 주겠노라!]
“저 눈사람은 또 뭐지?”
“최종 보스인가?”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니, 보스는 아닌 것 같은데.”
어리둥절한 참가자들이었다.
바하무트는 그들을 발견하곤 혀를 찼다.
[쯧. 버러지들……. 아, 아니지. 주인님과 같은 종족이니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게 좋겠구나.]
바하무트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새하얀 눈송이들이 서로 뭉쳐지며 주먹만 한 눈덩이가 생겨났다.
그 순간 그의 상태창이 변했다.
포만감 : 23/100 (%)
포만감 : 22/100 (%)
바하무트는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조금 떼어 내 눈덩이에 담고는 참가자들의 발 앞에 휙 던졌다.
그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참가자들.
“헉, 공격인가!?”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눈덩이는 스스로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작은 눈사람으로 변해 참가자들을 향해 아장아장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호우!]
“뭐, 뭐지!?”
이건 대체 뭔 일인가!
어쩌라는 걸까?
차라리 공격이나 할 것이지, 난데없이 주먹만 한 눈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에게 인사를 해 오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참가자들을 향해 바하무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것의 이름은…… 흠, 미니 바하무트라고 한다. 그것을 따라가거라. 너희를 유적지까지 안내해 줄 것이다.]
[호우!]
“……!”
그 말에 순간 술렁거리는 참가자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들이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눈사람의 말을 순순히 믿기엔 그들은 너무나 많은 고생을 겪었다.
하지만 바하무트도 많은 세월을 살아온 건 마찬가지였다.
이럴 땐 설득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흠, 믿기 싫다면 그뿐이다. 하지만 공짜는 아니다. 이것은 거래다.]
“거, 거래라니?”
[그렇다. 거래다. 나는 길을 알려 줄 테니, 너희는 가는 길에 철갑조개를 발견한다면 내가 알아볼 수 있게 표시를 좀 해 주면 좋겠다.]
“철갑조개를 말인가?”
[그렇다. 물론 발견하면 죽여도 좋다. 위치만 알려 주면 된다. 나르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바하무트는 씨익 웃었다.
참가자들은 고민했지만 결국 그 거래를 받아들였고, 심연의 바다에서 가장 어려운 길을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대신전 뒤뜰에 철갑조개 양식장이 생긴 것은.
찾는 게 가장 어렵지, 골렘들이 이렇게 많으니 들어서 옮기는 건 너무나 쉬운 일.
정다운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철갑조개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기 시작했다.
[크크, 이게 바로 격이다.]
좋은 잔머리였다.
바하무트는 미니 바하무트를 하나 더 만들어서 문어 골렘 운전을 맡겼다.
마력만 더 투자하면 미니 블리자드 정도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 * *
정다운도 속전속결로 일을 해내고 있었다.
다만 바하무트보다 준비 과정이 더 필요했다.
일단 11번째 골렘을 개미굴과 마녀의 집을 돌아다닐 수 있게 사람 크기로 만들기 시작했다.
형태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팔과 다리만 굵직하게 만들었더니, 언뜻 보면 실루엣이 구호열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이번에 공수해 온 트윈헤드 오거의 가죽을 가위로 열심히 재단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건지 여쭤도 됩니까?>
알파가 결국 못 참고 물어보자, 그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망령들은 벽을 막 통과하잖아? 그러면 골렘들도 위험하단 말이지.”
<그런 그렇습니다. 흙으로 된 몸이니 얼마든지 안으로 들어와 핵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테니 말입니다.>
“맞아, 그래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트윈헤드 오거는 마법 방어력이 있어서 마법과 스킬에도 거뜬하다는 말을.
게이트 스킬까지 주먹으로 때려 부쉈을 정도니 말 다한 것이다.
알파는 불안해졌다.
<그럼 설마…….>
“그래서 골렘한테 이 가죽을 두를 거야. 그러면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겠지?”
너무나 놀랍고 꺼림칙한 아이디어에 알파는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 불길한 일만 골라 하시는군요. 이쯤 되면 거의 네크로멘서 아닙니까?>
그렇게 트윈헤드 오거 가죽을 입은 골렘이 탄생했다.
망령을 힘으로 때려잡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