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28화>
“멸치는 역시 자연 건조를 해야지.”
이젠 대놓고 심연어를 멸치라 부르는 정다운이었다.
자연 건조라 함은 무릇 태양광과 솔솔 부는 바람을 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썰렁한 산꼭대기에서 그런 조건을 맞추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부유석에 태양석을 박아서 인공햇볕을 만들고, 넓적한 대리석을 하나 골렘의 손에 들려 주며 말했다.
“자, 이걸로 천천히 부채질을 해 봐. 바람이 솔솔 불게.”
“크워?”
고릴라 골렘은 정다운이 시키는 대로, 영문 모를 표정으로 대리석을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리쳤다.
후우웅!
“…….”
[풉.]
엄청난 강풍과 함께 생선이 다 날아가 버렸다.
“크워?”
이렇게 하면 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릴라 골렘.
정다운은 한숨을 내쉬며 심연어들을 주섬주섬 주워 왔다.
크기가 상어만 한 놈들이었지만 외뿔 멧돼지의 기운을 쓰면 혼자서도 거뜬히 옮길 수 있었다.
“이게 아냐. 지금보다 훨씬 더 약하게, 더 천천히!”
“크워?”
약하게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골렘.
토끼가 혀를 찼다.
[약하게라는 말을 골렘이 퍽이나 이해하겠네요.]
“연습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뽀뀨도 손 달라면 손 주는 세상인데. 그치?”
“뽀뀨!”
그 말에 뽀뀨가 쪼르르 정다운의 손바닥 위로 올라와 궁둥이를 씰룩거렸다.
왠지 칭찬해 달라는 것 같아서 손가락 끝으로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주자 뽀뀨가 좋아서 발라당 뒤집어져 뒹굴거렸다.
요즘 들어 할 일이 없는 뽀뀨는 애교만 늘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정다운의 그림자를 힐끔거리며 풍성한 꼬리를 바닥에 탁탁거렸다.
냄새도 기척도 안 나지만 묘한 경계심이 느껴지는 그림자였다.
니야앙?
“뽀잇!?”
화들짝!
그림자 고양이의 한 마디에 후다닥 정다운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뽀뀨였다.
“휴, 됐다.”
정다운은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골렘 선풍기’에게 약풍을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넌 선풍기 담당이다. 여기서 계속 약풍 유지하고 있어.”
“크워어…….”
힘이 조금이라도 강해질까 봐 대답 소리도 덩달아 소심해진 골렘이었다.
[그런데 건조를 왜 해요? 어차피 물에서 잡은 것도 아니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애들이잖아요.]
“그래도 몸 안에는 수분이 있잖아. 바짝 말려서 가루로 빻을 거야. 그게 또 국물 우릴 때 쓰면 엄청 깊은 맛을 내거든.”
[흐음. 그렇군? 나머진 그냥 요리해서 먹고요?]
“응.”
꼴깍.
말하다 보니 토끼의 입에서 괜히 군침이 흘렀다.
이젠 토끼도 알고 있었다.
생선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맛이 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심연어의 맛은 사자상 연못에서 양식하고 있는 은색 물고기들과는 또 다른 풍미가 있었다.
게다가 심연어들이 전부 다 같은 종류의 생선도 아니었다.
심연의 바다는 이름 그대로 바다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종류의 생선들이 살고 있는 바다 말이다.
따라서 잡히는 어종도 천차만별.
어떤 건 멸치처럼 생겼고, 어떤 건 고등어처럼 생겨 있었다.
크기가 커서 무서울 뿐이지.
심연의 바다를 잘 한번 찾아다녀 보면 어딘가에 문어나 오징어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정다운이었다.
그러다 퍼뜩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아, 그래! 공중 신전에 낚시터도 만들까? 언제 날 잡아서 낚시라도 해야겠다.”
[호오?]
토끼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 것도 가능함? 심연어를 어떻게 낚시하게요?]
“방법은 그때 가서 고민해 봐야지. 와, 생각해 보니 나 할 일이 태산이구나?”
요즘 워낙 특별한 사건들이 많았다 보니, 정다운에겐 할 일이 엄청 쌓여 있었다.
그는 아예 체크 리스트를 작성해 보기로 했다.
“이럴 땐 또 종이가 최고지.”
그는 마녀의 실험실 서재에서 몇 권 챙겨 온 백지 마법서를 꺼내 펼쳤다.
새하얀 종이. 여기에 펜만 있으면 딱이었다.
그는 목탄을 꺼내 끝을 뾰족하게 갈아서 연필을 만들었다.
그리곤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 같은 표정으로 도도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흠. 어디 보자. 헷갈리지 않게 장소별로 정리해 볼까?”
<체크리스트>
1) 심연의 바다에서 할 일
- 모든 골렘들한테 철갑을 씌우려면 ‘철갑조개’를 많이 잡아와야 함. (‘그림자 고양이’ 모으기는 일단 나중으로 미루자.)
2) 마녀의 집에서 할 일
- ‘망령석’이 떨어졌으니, 망령을 잔뜩 정화해야 함.
3) 개미굴에서 할 일
- 철갑조개를 녹이려면 ‘개미의 침액’이 필요함. 잠깐 들러서 병정개미를 잡아야 함.
4) 하늘 신전 만들기
- 재료 : 흙, 돌, 부유석
5) 대신전 청소
- 청소도 기왕 시작한 김에 제대로 마무리 짓고 싶은데…….
“뭐야? 이렇게 정리해 보니까 진짜 할 일 많네?”
일복이 터져 버렸다.
“흠, 부려 먹을 애들도 많아졌는데, 일을 좀 분배해 봐야겠다.”
다행히 요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매일 일하기 싫어서 꾀나 부리는 토끼는 빼더라도, 충실한 일꾼 바하무트도 있고 이제는 그림자 하인도 있지 않은가.
“흠, 일단 망령석은 정화 스킬로만 만들 수 있으니까, 마녀의 집은 내가 직접 가고. 가는 김에 개미굴도 잠깐 들르면 되겠다.”
정다운은 2번과 3번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물론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니, 동료를 좀 데려가고 싶었다.
원래라면 골렘이 딱이겠지만, 마녀의 집은 골렘이 들어가기에 복도와 천장이 너무 좁은 게 문제였다.
게다가 망령들은 골렘들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리니까 전투가 애초에 불가능하기도 했다.
“아, 바하무트. 혹시 그림자 하인이 망령과도 싸울 수 있을까?”
[당연히 가능하나이다.]
망령에게서 망령의 가루를 얻기 위해 정화 스킬이 필요한 것이지, 그냥 상대하는 건 마법이나 다른 스킬들로도 충분했다.
따라서 그림자 하인으로도 충분히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 그럼 이번 기회에 전투하는 법을 좀 기억시켜야겠구나.”
[푸히히. 누가 뭘 가르친다고요? 전투하는 법을? 아얏.]
정다운은 낄낄대는 토끼에게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었다.
“그래도 개미굴도 있으니, 골렘들을 데리고 가긴 해야겠지? 그래, 이번에 추가된 11번째 골렘을 조금 작게 만들면 되겠네.”
그렇게 2번과 3번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정다운은 1번 체크리스트 심연의 바다 옆에 ‘토끼와 골렘들’을 적어 넣으면서 토끼를 쳐다봤다.
“조개껍데기는 토끼가 골렘들 데리고 가서 잡아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나 바쁜데요?]
“갑자기? 매일 놀고먹는 네가 바쁠 게 뭐 있어?”
정다운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토끼는 오랜만에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임. 난 아무래도 바분이 뭐 하고 있는지 한번 따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바분을? 왜?”
[이건 순전히 내 감인데, 아무래도 바분 그 욕심쟁이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음.]
오랫동안 바분의 등쌀에 시달려 왔던 토끼는 누구보다 바분의 성질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내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당분간 스테이지-1에 좀 다녀올게요. 걱정은 하지 마셈. 거기가 지금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만 얌전히 보고 올 거니까요.]
토끼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갈 채비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턱시도 맵시를 다듬고,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챙기는 것뿐이었지만.
“너 솔직히 말해 봐.”
[뭘요?]
“그냥 일하기 싫어서 심각한 척하는 거지?”
뜨끔?
토끼는 맹렬하게 부정했다.
[아, 아니거든요! 진짜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바분한텐 님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니까요? 바분이야말로 님의 앞으로의 행보에 가장 큰 숙적이자 라이벌인 거임!]
“갑자기 라이벌 구도? 내 행보가 뭔데?”
[…….]
토끼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늘 태평하게 놀고먹는 오류종자에게 그런 대단한 게 있을 리가…….
그런데 때마침 알파가 반응을 보였다.
<에르테아 님의 부활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오, 옳거니! 바로 그거임!]
그 말을 토끼가 넙죽 받아먹었다.
“흐음?”
[……흠흠.]
게슴츠레 쳐다보는 정다운의 시선을 피하는 토끼였다.
조금 미심쩍었지만, 정다운도 어차피 토끼에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냥 속아 주기로 했다.
“그래, 다녀와. 귓말로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아싸뵹! 아니, 흠흠. 잘 다녀올게요.]
정다운은 바하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심연의 바다는 바하무트가 골렘들 몇 마리 끌고 다녀와. 거긴 어두우니까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지?”
[그렇나이다. 다만 저에게 주시는 생명 에너지를 조금만 더 할당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나이다.]
바하무트가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자, 회계를 담당하는 알파 경리의 허가가 떨어졌다.
<허락하겠습니다.>
[가, 감사하나이다! 오오오!]
휘오오!
그 순간 바하무트에게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마력, 아니 생명 에너지가 흘러 들어왔다.
그러자 차가운 냉기가 그의 몸을 휘돌며 눈사람의 크기가 2배로 커졌다.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힘이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에 얻은 2개의 제단에서 획득한 생명 에너지가 제법 풍족하다 보니 저 깐깐한 알파도 많이 배포가 커진 것이다.
“그럼 심연의 바다는 그렇게 하면 되겠고. 흐음, 남은 건 청소인데…….”
[제가 어느 정도는 거의 다 했나이다. 다만, 군데군데 있는 큰 쓰레기들을 치우는 게 남았으나 저에겐 무리였나이다.]
바하무트의 눈으로 된 손으로는 무거운 물건을 들기가 힘들었다.
그가 말하는 큰 쓰레기들은 바로 복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괴물 뼈들이었다.
오래전 대신전을 지키던 가디언들 말이다.
사실상 여기가 이렇게 지저분해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거야말로 골렘들에게 맡기자.”
정다운은 즉석에서 고릴라 골렘 한 녀석에게 다가가 투박하던 손을 잘라 내고, 섬세하고 길쭉한 손가락을 새로 만들어 붙여 주었다.
“크워어?”
[히익? 징그러!]
“어디까지나 임시야, 임시! 싸울 때는 원래대로 돌려 놓을 거니까.”
정다운도 좀 보기 안 좋았지만, 이런 손가락이 있어야 물건을 잘 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는 여기 혼자 남아서 보이는 뼈를 전부 한곳으로 옮겨놔.”
“크워어!”
그 말에 녀석은 기세 좋게 몸을 돌려 에르테아의 유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안에서 가장 큰 뼈였다.
<안 돼!>
“거, 거기 말고!”
“크워.”
녀석은 걸음을 멈추고 바닥의 뼈들을 얌전히 줍기 시작했다.
“휴.”
<휴.>
잠깐 사고 날 뻔했지만, 대충 정리가 되었다.
“자! 그럼 이제 모두 해산! 각자 할 일들 하자고. 서로 가끔 귓말 보내는 거 잊지 말고.”
박수를 짝짝 치며 말하는 그에게 바하무트가 손을 들었다.
[송구하게도 저에겐 귓말 권한이 없나이다.]
“아, 맞다.”
정다운은 새로운 제단도 얻은 김에 바하무트를 새로운 관리자로 등록시켜 주었다.
용의 사도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관리자 임명.”
<관리자를 임명합니다.>
번쩍!
[오오오! 이럴 수가! 이런 놀라운 힘이라니!]
황금빛이 번쩍이며 바하무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최종 보스에 불과했던 불사의 리치 바하무트.
그의 격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