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27화>
한편, 정다운과 토끼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바하무트는 대신전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눈사람이라 태양빛에 닿으면 녹아 버리기 때문에 야외 활동에는 가급적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번 문어 골렘을 타고 이동하기에는 문어 골렘의 속도가 너무 느렸다.
심지어 문어는 부피도 커서 하늘 높이 날 게 아니면 괜한 이목을 끌어, 지나가던 괴물들이 덤벼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걸 일일이 상대하며 다니다 보면, 또 그만큼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수가……!]
할 일이 없어 대신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바하무트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 더럽고 누추한 신전이 존재할 줄이야…….]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일생을 마녀의 집만 청소하며 지냈던 바하무트가 보기에 대신전은 아주 거지 소굴이 따로 없었다.
어딜 둘러봐도 먼지투성이에 벽에는 거미줄.
바닥엔 꼬질꼬질한 찌든 때가 가득했다.
그뿐이랴.
복도에는 알 수 없는 괴물들의 뼈가 굴러다니고.
오독오독?
“뽀뀨?”
쥐도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녔다.
아아, 얼마나 쥐가 살기 좋은 환경이면 저렇게 살이 토실토실 쪘단 말인가!
함정들은 또 어떤가?
세월의 풍파에 제대로 직격당해 전부 녹슬고 헐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이제 보니 우리 주인님은 꾸미는 건 잘하시지만, 청소에는 조금 뒷전이시구나…….]
본의 아니게 주인님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해 버린 듯한 기분에 바하무트는 마치 금단의 상자를 열어 본 것처럼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도저히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더럽다. 너무나도 더럽고 누추한 곳이구나. 내가 앞으로 이런 곳을 섬겨야 하다니.]
그래, 틈새 지역의 지하 신전까지는 어떻게 이해해 보려고 했다.
애초에 거긴 땅을 파서 만든 곳이라서 흙먼지가 많은 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여기는 딱 봐도 엄청 심혈을 기울여 만든 흔적이 가득하지 않은가!
[잘만 다듬고 관리했다면 분명 엄청나게 아름다운 신전이었을 텐데!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니……! 안타깝도다! 원통하도다!]
그렇게 한탄하던 바하무트는 갑자기 큰 사명감을 느꼈다.
이런 주인님을 모시게 된 것도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아아, 그렇구나. 나는 비로소 내게 주어진 사명을 깨달았도다.]
바하무트는 대신전을 청소하기로 결심했다.
열심히 쓸고 닦아 자신의 손으로 이 누추한 대신전을 반드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말리라.
얼마나 오래 걸리더라도!
마침 자신은 영생을 누리는 불사의 리치 아닌가.
‘오래’ 걸리는 일이라면 어려울 게 하나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바닥부터 쓸겠노라.]
쓱쓱 싹싹!
바하무트는 주인님이 친히 만들어 주신 싸리 빗자루를 들고 대신전의 모든 복도를 전투적으로 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럴 땐 또 자신이 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게 엄청난 장점이었다.
이동하기만 해도 바닥에 물기가 남아 물청소하기 딱 좋았으니까.
바하무트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번뜩였다.
[크크크, 아무리 쓸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구나! 역시 나는 이곳을 청소하기 위한 운명이었던가.]
또 한 번 하늘의 계시를 크게 깨닫고 감동하는 바하무트였다.
물기는 바람 마법을 솔솔 불게 하면 금방 보송보송해졌다.
[호오, 이거 제법?]
청소를 시작한 바하무트는 곧 의외의 사실을 깨닫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상당히…… 청소하는 보람이 있는 곳이었구나.]
처음에는 너무 더러워서 욕했지만, 이게 또 막상 청소를 시작하니까 느껴지는 보람이 장난 아니었다.
청소하기 전과 청소한 후가 너무 극명하게 차이 나니까 빗자루질 한 번 한 번에 몹시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이다.
[크으, 좋구나! 그럼 이 기세로 천장의 저 거슬리는 거미줄도 싹 제거해야겠다. 미니 블리자드!]
휘오오오!
바하무트는 냉기 바람을 교묘하게 컨트롤하여 천장 구석에 진득하게 낀 거미줄을 싹 긁어내렸다.
그렇게 천장만 보며 대신전을 한 바퀴 돌자 천장이 세상 깨끗해졌다.
[개운하군!]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크크크, 역시 이 맛에 청소를 하는 거지. 이제 본격적으로 찌든 때를 공략해 보실까.]
바하무트는 계속 음산하게 웃으며 대신전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그런데…… 아주 큰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쩍!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며 정다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다녀왔…… 어? 여기 왜 이렇게 깨끗해졌지?”
눈부시게 변한 대신전의 모습에 정다운이 크게 감탄했다.
평소에 얼마나 지저분했는지, 조금만 청소해도 엄청나게 깨끗해 보이는 것이다.
<맙소사. 매우 훌륭하군요.>
알파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글자가 파르르 흔들릴 정도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깜짝 파티였던 것이다.
[주인님! 제가 청소했나이다! 이 대신전을 제가 반드시 깨끗하게……. 헉!]
온갖 생색을 내며 정다운의 앞으로 쪼르르 다가오던 바하무트.
그는 때마침 정다운의 뒤로 우르르 따라 나오는 골렘들의 모습에 그 자리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쿵. 쿵. 쿵.
“크워어!”
“오옴!”
[저, 저런! 저긴 이미 물청소까지 끝난 곳인데!]
바하무트는 좌절을 맛봤다.
왜 이 녀석들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먼지, 먼지, 먼지!
저 빌어먹을 놈들이 움직이면서 흙먼지를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거대한 놈들이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말끔하게 청소한 바닥 위로 흙 발자국이 도장처럼 쩍쩍 찍히고 있었다!
[크흐흑! 이제 보니 적은 내부에 있었구나!]
이제 보니 흙 골렘들은 걸어 다니는 먼지 덩어리였다.
그런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정다운의 뒤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따라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어째 놈들의 숫자가 전보다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주, 주인님? 저 못 보던 놈은 또 무엇이나이까?]
“아, 얘? 신입이야.”
[……!]
착각이 아니었다.
정다운이 상큼하게 웃으며 새롭게 잡아 온 흙 골렘을 그에게 소개해 주자, 바하무트는 힘없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하. 그러고 보니 이 눈사람에겐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토끼가 우쭐한 표정으로 바하무트에게 그간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길다면 긴 이야기.
하지만 짧게 말하려면 1줄로도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바하무트에게는 그 1줄 요약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그러니까……. 이 흙먼지들, 아니, 흙 골렘들이 매달 하나씩 추가된다는 말입니까?]
[너 당황하면 꼭 말투가 정상이 되더라?]
[이럴 수가…….]
바하무트는 좌절했다.
이래선 도저히 청소가 불가능했다.
집안에 먼지 발생기가 매달 하나씩 늘어난다는데 어떻게 청소를 하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속도 모르고 정다운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야수의 숲에서 곧바로 11번째 골렘을 가지러 스테이지-1에 다녀온 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바분이 보이지 않아서 아무런 방해도 없이 순식간에 골렘을 챙겨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줄지어 세워 놓으니까 프라모델 진열장을 보는 것 같네. 모두 차렷!”
처처처척.
조금 느릿느릿하지만 정다운의 명령에 따라 멀뚱히 차렷하고 서서 대기하는 골렘들이었다.
“오구, 말도 잘 듣네.”
녀석들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아빠 미소가 맺혔다.
오늘부로 이제 그의 골렘은 총 11기나 되었다.
명단은 이러했다.
철갑 고릴라 골렘 4기.
철갑 켄타우로스 골렘 4기.
타조 골렘 1기.
문어 골렘 1기.
그리고 여기에 이번에 골렘 1기가 더 추가된 것이었다.
토끼가 혀를 찼다.
[뭔 동물 농장도 아니고 동물만 주렁주렁이네요. 그래서 이번엔 또 뭘 만드실 거임? 사슴? 사자?]
“그러게.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으니까, 일단은 먼저 청소부터 하고 생각할까?”
[……!]
정다운의 말에 바하무트가 크게 감동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 한번 청소할 생각이었거든.”
<그런 올바른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바람직합니다.>
정다운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청소를 하고 있던 바하무트의 행동이 몹시 반가웠다.
사실 청소라는 게 시작이 참 어렵다.
특히나 이렇게 넓은 곳은 더더욱.
하지만 먼저 이렇게 누가 시작을 해 주면, 옆에서 거드는 건 또 마음먹기가 쉬웠다.
마음먹은 김에 그가 두 팔을 걷어붙이며 그동안 지내면서 점점 쌓여 간 잡동사니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 기회에 대청소를 해 볼까?”
[제가 앞장서겠나이다!]
바하무트가 투지를 불태우며 싸리 빗자루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토끼는 하품을 했다.
[흐아암, 청소에 무슨 목숨이라도 걸 기세네요. 파이팅들하셈.]
“너도 도와, 인마.”
[저는 님의 반려동물들을 돌보고 있을게요. 이것도 엄청 중요한 일임.]
토끼는 그 말과 함께 옆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던 뽀뀨와 쌀알을 옮기고 있던 키메라 개미를 양손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 둥실 날아올라 구석에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가 바로 곯아떨어졌다.
토끼는 엄청나게 피곤해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 바로 조금 전까지도 토끼는 목숨을 걸고 있었다.
이번에 바분을 만나면 그와 싸울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항상 자신을 괄시하던 바분과 맞서 싸우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곳에 바분은 없었다.
‘아니, 스테이지-1 전체에 바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
토끼는 침대 위에 눈을 꼭 감은 채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을 되새겼다.
스테이지-1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아는 이가 또 있을까?
토끼는 전직 도우미의 감각으로 바분이 스테이지-1을 비워 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스테이지-2도 관리하는 도우미니까, 그곳에 잠시 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 참가자들이 유적지로 들어오는 타이밍이었는데도, 자리를 비운다고? 그게 말이 돼?’
아무래도…… 그가 무슨 일을 꾸미는 건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일을 꾸며 봤자, 도우미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그 음흉하고 욕심투성이 바분이라면 대체…….
[쿠울…….]
심각하게 고민하다 그만 잠들어 버린 토끼였다.
그 모습을 머리맡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는 정다운은 말없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빡!
[끄앙!?]
“어딜 꾀를 부려! 일어나 일해!”
결국 토끼는 투덜대며 청소를 시작했다.
* * *
청소의 시작은 일단 버리는 것부터였다.
[주인님. 저 흙먼지, 아니, 흙 골렘들부터 밖에 버리시면 어떠신지요?]
“안 돼. 괜히 밖에 놔뒀다가 어디론가 가 버리면 어떡해?”
[끄응, 그렇다면 작은 방 하나에 몰아넣으시는 건 어떠신지…….]
“그건 좋네. 그런데 작은 방이라고?”
[…….]
골렘들이 워낙 커서 제일 큰 방을 할당해 주기로 했다.
바로 보스룸이다.
[이, 이러면 변한 게 없나이다!]
<동의합니다!>
“별수 없어. 그럼 여기는 포기하고 다른 데만 청소하든가.”
[……!]
<……!>
청소의 길은 험난했다.
정다운은 심지어 잘 청소된 보스룸 바닥 위에 이번에 잡은 심연어들을 줄지어 늘어놓았다.
“이거 햇볕에 말려서 멸치 국물 우려내면 진짜 맛있겠지?”
[새, 생선 비린내가!]
“아, 맞다. 철갑 조개도 좀 잡아 오자. 문어 골렘에도 철갑을 입히자고. 물론 그림자 하인이.”
<…….>
어째 보스룸이 전보다 더 어질러지고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