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22화>
“오, 그림자를 다룬다고? 이 목걸이가?”
정다운은 솔깃한 표정이 되어 세르파의 목걸이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에 알파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마녀들이 연구하던 금단의 마법 중에는 그림자에 관련된 비술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어떤 비술이었는데?”
[그림자에 ‘기억’을 심어 실체화를 시키는 비술이었나이다.]
대답은 바하무트에게서 나왔다.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라……. 그래서 그림자 고양이들이 계속 우리 기억 속에서 환상들을 끄집어냈구나.”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악몽을 꾸게 하는 그림자 고양이.
그게 겨우 한 마리일 때는 기분이 우울해지거나 꿈에서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놈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 기억이 결국 실체를 가지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하무트는 조금 억울한 기색이었다.
[원래 마녀님의 연구는 그런 용도가 아니었나이다.]
“원래는 뭐였는데?”
[과거의 중요한 기억이나 행복했던 추억을 다시 되새길 수 있게 해 주는 용도였나이다.]
“오, 의외로 처음엔 좋은 마음에서 시작된 연구였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자 정다운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토끼는 혀를 차며 빈정거렸다.
[원래 모든 일의 시작은 다들 좋은 목적에서 시작해요. 그런데 행복했던 기억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자신을 죽이려고 하면, 우리는 그걸 가리켜 ‘악몽’이라고 부르는 거임.]
“너, 좀 가차 없네…….”
[훗, 제가 좀 가차 없죠.]
아무튼 정다운이 궁금한 건 이제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이 목걸이를 내가 사용할 수 있긴 한 거야? 아까부터 아무리 시도해 봐도 아이템 정보창이 안 뜨는데?”
딸랑-
특별한 능력이 붙어 있는 아이템은 보통 정보창이 꼬리표처럼 달려 있었다.
그런데 세르파의 목걸이에는 그게 없었다.
“옵션이든 특수 옵션이든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딸랑딸랑-
니야앙?
목걸이가 흔들리는 소리에 그림자 고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이걸 보면 완전히 맹탕이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목에 한번 걸어 보면 어때요?]
토끼의 말에 정다운이 그 즉시 목걸이를 목에 둘러보다가 목이 졸려서 관뒀다.
“너무 작아! 내 목이 두꺼워서 사이즈가 안 맞네.”
[하여튼 이 돼지가. 그러게 작작 좀 먹으라니까.]
“야, 솔직히 세르파보단 목 안 두껍거든? 생각해 보면 걔도 목에 걸고 다닌 건 아니잖아.”
[농담이에요. 아마 그거 사연이 담겨 있는 물건이라 그럴 거임. 조건부 봉인에 걸린 아이템이라 봐야죠.]
“조건부 봉인? 그건 어떻게 풀어? 정화로?”
[무슨 만능 정화주의임? 이 세상이 온통 저주투성이로 이루어진 줄 알아요? 그보단 조건을 만족시킬 생각을 하라고요.]
“조건이 뭔데?”
[뻔하죠. 주인에게 받은 물건이니까, 똑같이 주인에게 받아야죠.]
토끼의 말에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인? 세르파는 이미 죽었잖아.”
[걔 말고요. 진짜 주인.]
“마녀?”
[네.]
“마녀도 죽은 거 아냐?”
[그렇죠. 음, 그런데 어디까지나 세르파의 사연이니까. 세르파의 입장에서 조건을 만족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
알쏭달쏭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뭘 알고 있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토끼의 표정을 보니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녀고 뭐고, 토끼는 잘 모르는 얘기들 투성이었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던전에 관한 것이라면 또 달랐다.
절대적인 법칙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정답이 없는 질문 따위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다운은 금방 정답을 찾아냈다.
“……아! 설마 여신상?”
[네. 정답.]
토끼가 히죽 웃었다.
[마녀의 조각상 앞에 가면 무슨 방법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럼 저기를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군.”
정다운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검은 마녀의 성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마녀의 조각상이 있는 보스룸에는 어차피 한 번은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
“올라간 김에 제단이나 챙겨야겠다.”
<듣던 중 반가운 말씀입니다.>
알파가 기뻐했다.
* * *
다시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계단으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문어 골렘을 타고 꼭대기층에 바로 올라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중간중간 극성맞게 덤벼드는 심연어들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것도 이번엔 어렵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사람들과 다 같이 올라가 본 길이라, 온 사방에 태양석이 박힌 부유석을 가로등처럼 밝혀 놨던 것이다.
그 빛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마치 심야의 고속도로처럼 성 꼭대기까지 가는 길이 환하게 쭉쭉 뻗어 있었다.
그 덕분에 심연어들은 어둠 속에서 문어 골렘이 야금야금 성 위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셔야 했다.
척.
도착했다.
“자, 이제 지붕을 뚫어 보실까?”
정다운은 마치 류승우처럼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성벽에 개미의 침을 살살 발라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류승우 님에 비해 조금 초라하네요.]
“시끄러. 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고! 결론은 같아!”
[그런데 귀는 왜 빨개지셨음?]
“…….”
정다운은 조금 민망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얼마 후에 문어 골렘이 통과할 정도의 큰 구멍이 뚫리긴 했다.
정다운은 손을 탁탁 털며 쿨한 표정으로 어깨를 우쭐거렸다.
“휴, 됐다. 별거 아니네.”
[다만 중간에 개미침이 모자라서 개미굴 한번 다녀와야 했던 건 안 비밀.]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정다운은 조금 더 민망했다.
“아무튼 이제 슬슬 내려가 보실까?”
문어 골렘의 고도가 점차 내려가며 보스룸 안에 진입했다.
[오류! 던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입장했습니다!]
“오냐. 나도 반갑다.”
류승우 때와 조금 다른 메시지가 정다운을 반겨 주고 있었다.
이젠 하도 익숙해서 정겨운 오류 메시지였다.
보스룸에는 저번에 산산조각 났던 마녀의 조각상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득실거리는 그림자 환상들이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를 발견하고 와글와글 몰려들기 시작했다.
키야악!
“응, 나도 반갑지만 안 내려갈 거야.”
정다운은 문어 골렘의 고도를 그림자 환상들이 닿지 않는 정도에서 멈추게 했다.
그러자 그림자 환상들은 아무 것도 못하고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위를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히히. 이렇게 다시 보니까 좀 귀엽네요.]
“그러게. 여신상도 아름답고.”
둘은 문어 골렘 주둥이 끝에 나란히 앉아 보스룸의 경치를 감상했다.
저번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시 보니 정말 아름다운 조각상이었다.
“뭐 저렇게 잘 만들었지? 마녀가 아니라 정말 여신 같네.”
[아름다운 분이었나이다…….]
바하무트는 문어 골렘을 조종하던 것도 잠시 멈추고 전 주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 세르파도 분명…… 지금 저와 같은 심정으로 이 조각상을 바라봤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딸랑-
“응? 이거 왜 이래?”
마녀의 조각상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정다운이 들고 있던 고양이 목걸이의 방울이 저절로 흔들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그 후엔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데.
토끼가 비명을 질렀다.
[히익? 귀신 들린 목걸이다!]
“네가 왜 호들갑이야? 따지고 보면 너도 귀신 아니냐?”
[흥. 그러네요. 어쩐지 안 무섭더라. 아무튼 전직 도우미인 제 감이 말해 주는 건데, 마녀의 얼굴 앞으로 가 보셈.]
“뭔가 느껴져?”
[아뇨. 예뻐서요.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음.]
“…….”
이유가 빈약했지만, 정다운도 이번만큼은 토끼의 전직 도우미 경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잠시 후, 문어 골렘이 거대한 마녀의 조각상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히야. 진짜 잘 만들었네. 나도 나중에 이런 거 만들어 봐야지.”
[골렘을요? 이런 얼굴을 하고 괴물들을 마구 짓밟고 다니면 진짜 간지 나겠네요. 그런데 진짜 예쁘다. 나보단 아니지만.]
“너보단 훨씬 예쁘거든? 토끼 주제에 어디서.”
둘의 유치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슈우욱!
갑자기 마녀의 조각상의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엇! 위험!]
“아냐. 이 목걸이에 반응하고 있어. 조각상의 그림자가.”
딸랑 딸랑 딸랑-!
미친 듯이 흔들리는 방울 소리가 보스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다운은 침착하게 세르파의 목걸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 순간.
여신상의 그림자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목걸이의 방울 속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휘오오!
“……!”
멀리서 보면 거대한 어둠이 정다운의 손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아서, 토끼가 박수를 쳤다.
[헐, 쩐다! 님 지금 쫌 간지 남! 그림자의 군주 같음!]
“몰라, 무서워…….”
정작 정다운은 조금 쫄아 있었다.
휘아악-!
딸랑!
결국 조각상의 그림자에 깃들어 있던 ‘무언가’가 끝까지 전부 방울 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방울 소리도 멈췄다.
“끄, 끝났나? 정보.”
[마녀의 그림자 팔찌 +1]
- 내구력 : 77/100 (%)
- 특수 옵션 : 그림자 비술 (1레벨)
“됐다! 정보창이 떴어!”
정다운은 뛸 듯이 기뻐했다.
겨우 1레벨이라도 특수 옵션이 달려 있는 아이템을 얻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름도 조금 바뀌어 있었다.
“그림자 팔찌? 목걸이가 아니라? 아하, 원래부터 이런 쓰임새였나?”
[하긴 이 사이즈면 사람한테는 팔찌죠, 뭐. 목에 차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네요.]
정다운은 바로 그림자 팔찌를 손목에 착용해 봤다.
그런데 그 바람에 팔찌가 흔들렸는데도 더 이상 방울 소리가 나지 않는 게 특이했다.
“뭐지? 방울이 고장 났나?”
[아마 능력이 사용될 때만 울리는 거겠죠. 그런 아이템 많음.]
“응? 그런데 쟤네 봐.”
문득 정다운의 시야에 묘한 모습이 들어왔다.
그림자 팔찌를 착용한 순간부터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진 것이다.
아래서 자신이 내려오기만을 바라며 노려보고 있던 그림자 환상들의 눈빛이 변한 것이다.
“저 환상들이 이제 나한테 흥미가 떨어졌나 본데?”
[원래 그림자 팔찌로 태어난 애들이라 님을 공격대 상으로 생각 안 하는 듯요.]
“그럼 내려가 볼까?”
[겁도 없으시네.]
정다운은 문어 골렘을 아래로 내려가게 했다.
그러자 정말로 그림자 환상들이 정다운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아예 환상의 모습도 없애 버리고 그림자 고양이들로 돌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니야앙, 냐아앙!
“얘네 혹시 조종도 되나?”
[글쎄요. 해 보셈.]
“흠. 어떻게 쓰는 거지?”
[스킬처럼 쓰면 됨.]
세르파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정다운이 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림자 비술. 발동.”
딸랑-!
그 순간 방울이 울렸다.
그리고 앞에 있던 그림자 고양이들이 동시에 정다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씨익.
녀석들을 향해 정다운이 환하게 웃으며 멋지게 두 팔을 벌렸다.
“오너라, 그림자들이여.”
그러자 고양이들이 후다닥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응?”
니야악-!
[음? 1레벨밖에 안 돼서 그런가?]
“……밥이라도 주면서 꼬셔야겠네.”
정다운은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쳐다봤다.
그래도 아까부터 바하무트가 먹이를 먹여 키운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부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