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18화>
쿠웅-!
심연의 바다 한복판.
참가자들의 고통과 절망을 먹고 자라던 거대한 소라 껍데기가 뒤집어지자, 안에선 난리가 났다.
우당탕탕!
키야악!?
천재지변이 따로 없었다.
벽과 천장이 기울어지고, 돌로 된 계단들이 제 무게를 못 견디고 무너지며, 성 안에 있던 환상들을 덮쳤다.
이럴 땐 실체를 가지게 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환상들은 이리저리 떠밀리다 서로의 무게에 깔려 죽어 갔고, 그럴 때마다 정다운에게는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왔다.
[<공중 계단> 스킬이 2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 작업 속도 2.2배 상승
[<공중 계단> 스킬이 3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 작업 속도 2.4배 상승
“대박! 이거 대박이네! 자꾸 저절로 레벨 업을 하잖아!?”
[헐? 미친다! 안에서 자기들끼리 저절로 죽나 본데요!?]
정다운과 토끼는 거의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레벨 업이 풍년이었다!
토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이 계획이 진짜로 통할 줄이야!]
“푸하하! 나도 이건 몰랐다. 공중 계단 스킬로 사냥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공중 계단 스킬을 올리려면 무조건 노가다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의 상황에서 대박이 터지고 만 것이다.
저렇게 큰 건물이 모로 넘어지는데 사상자가 안 나올 리가!
하지만 좋은 소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검은 여왕의 성이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최상층에 세워져 있던 여신상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와장창 산산조각이 나 버린 여신상!
그러자 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검은 여왕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며 울부짖었다.
고오오오-!
고통에 찬 귀곡성과 함께 그림자는 산산조각 난 여신상을 따라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 앞에 업적 창이 떠올랐다.
[업적 달성!]
“던전 공략 성공!”
제3 던전 ‘검은 여왕의 성’을 공략했습니다!
당신들의 업적에 던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보상 : 생존자 전체 회복
그에 참가자들은 모두 멍해졌다.
“맙소사…….”
“던전이 공략됐어.”
“유적지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던전은 분명히 공략되었고, 이제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보상의 시간이 다가왔다.
[생존자 전체 회복!]
번쩍!
“아아……!”
참가자들은 허공에서 흩날리는 은빛 가루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심연의 바다를 헤매다가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1>
바로 이마에 찍혀 있던 검은 각인들이 불에 탄 잿가루처럼 파스스 흩어져 버렸다.
세르파의 저주가 풀린 것이다.
“사, 살았다!”
“만세! 살았다!”
“해냈어!”
그 뒤로도 보상 행진은 계속되었다.
참가자들의 앞에 각자 자신들이 기여한 업적만큼 레벨 업했다는 메시지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보상은 검은 여왕을 거의 혼자서 잡은 셈인 정다운에게로 몰려들었다.
[<공중 계단> 스킬이 4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작업 속도 2.6배 상승
[<공중 계단> 스킬이 5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작업 속도 2.8배 상승
-에너지 효율 2배 상승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이 9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신체 능력 3.6배 증폭
- 지속 시간 1분, 재사용 시간 20초
“헉, 대박! 이거 대박이네! 진짜 잭팟 터졌다!”
덩달아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까지 레벨 업을 하자 정다운은 너무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상 밖의 호재!
철갑 골렘들을 만들 때 중간중간 외뿔 멧돼지의 스킬을 써 가며 조개껍질 모서리를 가위질한 것들이 모조리 다 반영된 것이다!
게다가 공중 계단 스킬이 5레벨이 되면서 새로운 옵션도 추가되었는데, 이게 또 대박이었다.
<스킬>
공중 계단 (5레벨)
- 공중 계단을 더 잘 만들 수 있다.
- 작업 속도 2.8배 상승
- 에너지 효율 2배 상승
“에너지 효율 상승?”
정다운의 눈이 반짝였다.
저 말은 앞으로 생명 에너지를 절반만 써도 부유석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예컨대, 문어 골렘을 만드는 데 부유석이 30개 정도 필요했다면, 이제 15개면 충분하다는 뜻!
“이러다 나중엔 망령석 하나만 써도 아주 훨훨 날아다니겠구나! 좋았어!”
앞으로 천하의 구두쇠 알파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정다운은 기뻐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겨우 소라 껍데기 하나 옆으로 넘어뜨린 것치고는 너무 엄청난 선물 폭탄을 받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크흐흐흐…….]
“……?”
위에서 계속 당황한 모습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던 세르파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작게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리곤 갑자기 허리까지 뒤로 젖히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큭큭큭! 푸하하하! 이거 정말 장관이로구나!]
“뭐, 뭐지……?”
갑자기 어리둥절한 상황에 사람들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크하하하! 내가 설마 살면서 이런 미친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광기마저도 느껴지는 웃음소리가 심연의 바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세르파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웃겨 죽을 것 같았다.
본래 도우미의 인생이란 참으로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항상 같은 말, 뻔한 패턴.
매번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들을 안내하고 설명을 해 주는 건 정말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독한 무기력증에 빠진 자신의 앞에 이렇게 자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줄이야!
[후으으, 이렇게 웃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그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며, 그의 시선이 참가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곤 그들 중에서 정확히 정다운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기타 누락자여.]
“……!?”
그 말에 정다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를 알아!?’
그가 당황하는 사이, 세르파의 거대한 몸이 천천히 정다운의 앞으로 내려섰다.
[바분에게 언젠가 들은 말이 생각났다. 스테이지-1에 기타 누락자가 나타났다고. 던전이 미쳐 돌아간다고.]
‘바분? 그 녀석이구나!’
갑자기 바분의 이름이 나오자 정다운은 전후 사정을 눈치챘다.
자신이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도 기타 누락자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소문 정도는 도우미들 사이에 얼마든지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네놈이 바로 그 기타 누락자라면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간다.]
“……!”
세르파의 위압적인 얼굴이 정다운 앞으로 훅 다가왔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매끄럽게 전신을 뒤덮은 검은 빛깔의 털.
검은 사자 세르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범독수리 이상이었다.
그가 험악한 인상을 구기며 미소 지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이상하다 여겼지. 정상적인 던전의 참가자라면 내 저주가 결코 비껴갈 리 없으니까.]
그의 저주는 던전 게임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때만 사용하는 도우미의 권능이었다.
따라서 종말의 용의 제물 신분에서 벗어난 정다운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얘는 직립 보행이 아니네? 도우미들마다 취향이 다른가?’
그런데 이 와중에 뜬금없이 딴생각이나 하고 있는 정다운이었다.
그는 엄마한테 꾸중을 듣고 서 있는 아이처럼 자꾸 눈알을 굴리며 의미 없이 세르파의 털 숫자를 하나씩 세고 있었다.
범독수리의 용맹 덕분인지 겁은 안 나고 점점 주의력만 산만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류승우와 구호열이 무기를 꼬나들고 정다운을 지키기 위해 세르파의 앞을 막아섰다.
척.
“여기까지다.”
“이 녀석을 해치려면 먼저 우리들부터 상대해야 할 거다.”
[호오? 용감한 친구들을 많이 뒀군? 설마 이 기타 누락자가 여기 실질적인 리더였나?]
“아니, 그건 아니고…….”
“맞다.”
“엥?”
세르파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던 정다운의 말을 잘라 먹고 들어오는 류승우였다.
그에 정다운이 황당하게 쳐다보자, 옆에 있던 구호열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원래 밥 주는 사람이 대장 아닌가?”
“……?”
엉겁결에 대장이 되어 버린 정다운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에 동조하는 자들은 겨우 둘뿐이 아니었다.
휘잉.
윤진수도 뒤쪽에서 무수히 많은 바람 화살을 장전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다른 참가자들도 슬금슬금 결연한 표정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다운은 그들 모두의 밥줄이었다.
목숨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그들의 기세에 세르파는 나른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서라. 용기는 가상하나 괜한 짓이다. 도우미가 괜히 도우미인 줄 아느냐. 너희들의 공격은 나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건 해 봐야 알지.”
파지직!
류승우가 양손에 뇌전을 장착했다.
세르파가 그를 노려봤다.
[네놈은 아까부터 계속 내 심기를 건드리는구나. 하지만 정말로 헛수고다. 그렇지 않느냐? 토끼여.]
깜짝?
[엄마야!?]
갑자기 세르파가 뒤에서 살금살금 도망가고 있던 토끼를 쳐다보자, 토끼는 화들짝 놀라 발라당 넘어졌다.
그리곤 비굴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그에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헤헤. 그렇습죠. 검은 사자 님. 앗? 이게 아니지! 그렇다! 이 깜둥아!]
생각해 보니 자신이 꿀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은 토끼가 용감하게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세르파의 콧잔등이 살짝 일그러지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호오?]
[앗, 아뇨. 그리 많이 붓지는 않았습니다요……. 헤헤.]
사자 상대로 토끼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였다.
황급히 정다운의 뒤로 돌아가 숨어 버리는 토끼를 보며, 세르파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오늘 재밌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되는구나. 설마하니 던전에서 쫓겨난 도우미가 아직도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고 있을 줄이야. 아니, 이젠 도우미도 아니니까 하찮은 ‘망령’이라 불러야 하나?]
“망령? 망령이라니?”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정다운이 토끼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망령이었어?”
[어, 음? 그게요……. 조금 비스무레한 정도랄까요……?]
“……?”
우물쭈물해하는 토끼의 반응에 세르파가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모르고 있었나? 마녀의 집에 다녀왔다면 망령들을 많이 접해 봤을 텐데? 비슷하다는 생각 안 해 봤나?]
“어,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다운은 의외로 토끼와 망령들이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을 맘대로 날아다닌다든가.
또 가끔씩 투명해지면서 물리력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지 않았던가.
“너, 원래 유령이었냐?”
[유령이라니! 너무하시네! 굳이 따지자면 정령에 가깝거든요?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함!?]
“당연히 중요하지! 그럼 이 호랑이도 결국 망령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니까.”
[사자다.]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세르파를 다시 쳐다봤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니 아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털로 번들거리는 놈의 몸이 중간중간 반투명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네가 만약 망령과 비슷한 존재라면, 혹시 이런 건 어때? 정화! 정화! 정화!”
파아앗!
그는 주저 없이 정화 구체들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호오? 계속해서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정화 능력자였나?]
그 모습에 검은 사자 세르파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 지긋지긋하던 던전이 점점 재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