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17화>
[뭐지? 저 인간은?]
정다운을 발견한 세르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별로 활약을 하지 않았던 참가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제부턴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스테이지 전체에 걸었던 자신의 검은 각인이 그에게만 걸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내 저주를 풀어낸 참가자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좀 더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서 세르파가 정다운의 앞으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굽히던 찰나였다.
류승우를 향해 귓말이 도착했다.
꿀꺽!
<정다운 : 승우 형! 거기서 잠깐 시간 좀 끌어 줄 수 있어? 내가 뭘 좀 하려는데, 도우미가 또 방해하지 못하게 최대한 시선을 끌어야 되거든.>
<류승우 : 알았다. 그런데 뭐 하려고?>
<정다운 : 비밀이야. 실패하면 쪽팔리니까.>
“……?”
류승우는 어리둥절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문어 골렘 위에서 정다운이 씨익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류승우는 표정을 굳히며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맡겨 둬.”
그는 믿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의 정다운은 반드시 무슨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그게 뭔지는 몰라도…… 일단 시키는 대로 하면, 밥이든 떡이든 나오게 되어 있었다.
“시선 끄는 거라면 자신 있지.”
파지직!
그 순간 그의 전신이 시퍼런 뇌전에 휘감겼다.
도우미의 시선을 끄는 방법?
그야 간단하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하면 된다.
녀석의 취향이 뭔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 제일 신경 쓰는 게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담아 결계에 부딪쳤다.
“이깟 결계 따위!”
콰르릉!
심연의 바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소라 껍데기로 천둥 벼락이 내리꽂혔다.
[경고! 던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입장할 수 없습니다!]
콰앙!
“큭!”
엄청난 반발력에 의해 그의 몸이 뒤로 튕겨 나왔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보단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그는 계속해서 결계를 향해 스킬을 퍼붓기 시작했다.
“힘으로 박살 내 주마!”
콰르릉!
극도로 집중된 뇌전에 결계가 거칠게 흔들렸다.
[경고! 던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입장할 수 없습니다!]
[무, 무슨!?]
류승우의 돌발 행동에 정다운을 향해 내려가려던 세르파의 시선이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미친 것인가! 참가자 따위가 던전의 결계를 뚫으려 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 말대로였다.
결계와 격돌할 때마다 류승우의 체력은 팍팍 깎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불굴의 투지 스킬은 언제나 위기 상황에서 한계 이상으로 힘을 쥐어짜게 해 주었다.
고통이 느껴질수록 류승우의 눈도 점점 격렬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결계 따위로 그동안 우리를 가두고 있었단 말인가!’
처음엔 시선만 끌 생각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내 힘으로 이 벽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던전을 탈출하는 것도 절대 꿈은 아니다!
번쩍!
그의 두 눈에서 도깨비불 같은 시퍼런 안광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한 줄기 벼락이 되었다.
콰르릉!
“뇌전!”
콰쾅!
[……!]
그가 갑자기 미쳐 날뛰자 세르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류승우 같은 강자를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잃는 건 손해가 막심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노옴! 헛된 생각이다! 썩 멈추지 못할까! 진짜 죽는단 말이다!]
“절대 멈추지 않겠다! 이깟 결계 따위! 힘으로 찢어 버리면 그만이다!”
콰르릉! 쾅쾅!
[아니! 그러니까 그게 불가능하단 말이다! 네놈 진정으로 당장 죽고 싶은 게냐!]
그런데 그때.
류승우의 몸이 우뚝 멈추더니, 세르파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당장 죽인다고?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긴 한가?”
[뭣이!?]
그 말에 세르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은 류승우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다른 도우미에게 들었는데 말이지. 너희 도우미들에겐 참가자들의 생사여탈권이 없다던데?”
[누, 누가 그런 망발을! 다른 도우미라니? 대체 어떤 도우미가 그딴 헛소리를 했다는 말인가!]
돌아가는 상황이 워낙 혼란스럽다 보니 세르파는 평소에 고수하던 포커페이스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야 알 거 없고. 도우미가 던전에 있는 생명을 죽일 권한을 얻기 위해선 합당한 이유와 조건들이 필요하다던데? 너는 어떤 조건이지? 혹시 이 숫자가 0이 된 사람들만 죽일 수 있나?”
류승우가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그를 도발하자, 세르파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네놈, 진정으로 죽고 싶은가?]
쿠르릉!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살기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백수의 왕 사자 세르파.
그에게서 터져 나오는 압도적인 포효가 보는 이의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류승우의 심기를 자극했다.
“죽일 테면, 죽여 봐.”
류승우의 전신에서도 천둥 벼락이 격렬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 * *
콰르릉!
[……뭐지? 류승우 님 저분, 왜 갑자기 혼자 폭주한데요? 다혈질이시네.]
문어 골렘에선 토끼가 황당한 표정으로 류승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다운도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뭐야? 저렇게까지 해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시선만 끌라니까 왜 목숨까지 걸지? 우리도 빨리 서둘러야겠다. 바하무트?”
[넵. 소신 바하무트, 여기 대령했나이다!]
정다운의 부름에 바하무트가 그 옆에 즉각 나타났다.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방향 잡아.”
[명을 받듭니다. 미니 블리자드!]
휘오오!
문어 골렘이 크게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거기에 정다운이 소지품에서 흙벽돌을 한가득 꺼내 내려놓자, 문어 골렘의 고도가 급격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어? 다시 아래로 내려갑니까?”
“1층부터 공략하시게요?”
어느새 문어 골렘 안으로 다 모여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이럴 거라면 류승우는 왜 저기서 혼자 힘을 빼고 있냐는 말이다.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정다운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구경이나 하시고, 강화 아이템들이나 하나씩 뱉으세요. 나 이번에 진짜 대출혈 서비스니까요.”
“……?”
어리둥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그의 손에선 황금빛 기운이 줄줄 새서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그 기운은 바로 알파가 내보내는 생명 에너지였다.
“……어?”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가 문어 골렘 밖을 쳐다보고 눈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어어어? 저, 저거 뭐야!?”
“뭐야?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창문 밖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엔 검은 여왕의 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대체 뭘 보고? ……음?”
“어?”
결국 그들도 보고 말았다.
그리고 똑같은 표정으로 눈이 휘둥그레 커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어어어?”
“……!?”
그곳에는 검은 여왕의 성이……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뭐, 뭐지?”
처음엔 다들 눈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확실히 성이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 * *
[……응?]
한편, 류승우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려던 세르파도 성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를 눈치채고 말았다.
처음엔 눈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구멍이 뻥 뚫린 검은 여왕의 성 꼭대기의 위치가 점점 옆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거? 성이 왜!?]
그는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당황한 모습으로 류승우를 돌아보며 고함을 쳤다.
[뭐, 뭐야!? 네놈들 대체 지금 무슨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아하? 이거였어?”
류승우는 정다운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그렇구나! 왜 시선을 끌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런 미친 짓거리를 도우미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지!”
[네놈들…… 진정 죽고 싶은 게냐!]
세르파의 입에서 사자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류승우는 세르파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네놈이 뭐라 하든, 이번엔 우리가 이겼다.”
성이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 * *
<에너지 낭비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동안 모았던 재산이 이번에 다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에너지야 또 모으면 되지 뭐. 다 이럴 때 쓰려고 모으는 거 아냐?”
<절대 아닙니다만.>
알파는 아까부터 계속 투덜대고 있었다.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생명의 용 에르테아를 위해 쓰여야 하는 생명 에너지가 겨우 ‘공중계단’에 소모되고 있다니!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조금씩 들리는 것 보니까 성공할 것 같지?”
<제 계산상은 그렇습니다. 무거워서 들기는 힘들어도, 기울여 넘어뜨리는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참가자들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다운 씨? 지금 뭐라고……?”
“뭘 넘어뜨린다고요?”
정다운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해맑게 대답했다.
“저 소라 껍데기요.”
“……네? 뭔 껍데기?”
“저 성이요. 사실 진짜 건축물도 아니니까 바닥에 붙어 있는 게 아닐 거잖아요? 그럼 들 수도 있지 않겠어요?”
“……뭘 들어요?”
정다운의 친절한 설명에도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자, 사람들은 두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지금 이 사람이 뭘 들어서 뭘 넘어뜨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설마…… 진심으로 저 검은 여왕의 성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자 정다운은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저 공중계단 보이시죠? 저거 내 스킬인데, 흙이 아니라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토끼가 정다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부유력이 아직 좀 부족한 것 같은데, 망령석 남은 거 있으면 더 줘 봐요. 붙이고 오게.]
“그럴래?”
무슨 일인지 아까부터 계속 바쁘게 문어 골렘 밖을 들락거리고 있던 토끼는 정다운이 건네준 망령석 보따리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정다운은 그 보따리를 향해 스킬을 걸었다.
“공중계단!”
번쩍!
그 순간 그의 손에서부터 생명 에너지가 망령석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게 위로 떠오르기 전에 토끼는 빠르게 날아서 검은 여왕의 성 입구 안으로 던져 넣었다.
“공중 계단! 공중 계단!”
거기에 대고 정다운은 계속 스킬을 걸었고, 성 내부에 닿은 망령석에 점점 부유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다운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 검은 여왕의 성을 통째로 공중 계단으로 만드는 중이에요.”
“……!?”
해맑게 웃는 정다운.
때마침 그의 등 뒤로 검은 여왕의 성이 점점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다운이 오창석 촌장에게 물었다.
“촌장님, 아까 그 여신상을 파괴하면 던전이 공략되는 거라고 하셨죠?”
“…….”
“건물이 넘어지면 같이 넘어지지 않겠어요? 보니까 돌인 것 같던데, 저 무거운 게 넘어지면 바로 부서지지 않을까요?”
“…….”
신나서 얘기 중인 그를 보며 오창석 촌장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이 아찔할 뿐이었다.
처음에 정다운을 보자마자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미친놈이라 피하고 싶었던 거였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놈이었던 거야.’
그리고 그때.
결국 던전의 유적지 검은 여왕의 성이…… 진짜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끼얏호! 성 넘어가유!]
“지금이야! 승우 형! 계단 밟고 내려와!”
방방 뛰며 환호성을 지르는 토끼.
내려오랬다고 저 높은 곳에서부터 폴짝폴짝 뛰어 내려오고 있는 류승우.
“내가 엄호한다!”
류승우가 안전히 내려올 수 있게 심연어들의 등을 밟고 다니며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는 구호열.
……그래, 아주 싹 다 미친놈들뿐이었다.
[크아악! 나의 던전이-!]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세르파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