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15화>
* * *
[휘유. 다들 열심히 사네.]
모두가 바쁜 가운데 토끼만 한가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유일한 임무라고는 그림자 고양이들을 쫓아내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문어 골렘 위에 모여 있으니까 그마저도 신경 쓸 일이 없어진 것이다.
너무 심심했던 토끼는 정다운과 수다라도 떨고 싶었으나, 그조차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아니, 님은 또 왜 그렇게 바쁜 척해요? 정 할 거 없으면 남들처럼 밖에 나가서 물고기들이랑 싸우든가요.]
토끼는 이해가 안 되었다.
어느새 정다운은 4번째 철갑 고릴라 골렘까지 만들어서 밖에 내보낸 참이었다.
때마침 철갑조개의 껍질도 거의 다 떨어진 상태여서, 그가 더 이상 안에서 할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사람들이 쉬러 들어오면 밥이나 챙겨 주고 이불이나 덮어 주는 정도랄까?
이쯤 되면 거의 가정주부.
아니, 사실 밥도 결국 한꺼번에 만들어서 그냥 꺼내 주기만 하는 거라서 사실상 한량이나 마찬가지였다.
토끼는 정다운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에휴, 인간아. 이럴 거면 모두에게 식량을 미리 분배해 주고 님도 같이 싸우면 좋잖아요.]
“누군 그런 생각 안 한 줄 알아? 나도 그러겠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부득부득 내가 직접 차려 주는 게 더 맛있다며 안에 있으라잖아. 손맛이 다르다나?”
[그거야 그냥 하는 말이고요. 님이 혹시라도 밖에서 죽으면 문어 골렘이고 뭐고 다 멈출 것 같으니까 그런 거겠죠.]
“아, 그런가?”
토끼의 말에 정다운은 조금 놀랐다.
알게 모르게 다른 참가자들에게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끼는 알고 있었다.
그는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약해 빠진 생산직이 아니었다.
[님도 제법 강한 축이잖아요? 공격 스킬 성장을 위해서라도 나가서 싸워도 되지 않음? 그래가지고 외뿔 멧돼지의 기운 언제 만렙 되겠음?]
“나도 제발 싸우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더 급해.”
그렇게 말하며 정다운은 다시 하던 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니까 대체 그거 뭐 하는 건데요?]
“뭐긴? 공중 계단 스킬 연습이지.”
[그걸 갑자기 왜 하는 건데요?]
아까부터 그는 문어 골렘 구석에서 계속 부유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토끼의 물음에 정다운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이것들이 필요해질 거야. 아! 잘됐다. 너 지금 한가하면 나 좀 도와줄래?”
[님이 스킬 쓰는 건데 내가 도울 일이 있음?]
“있지. 아주 중요한 일.”
[……?]
그 말에 토끼가 솔깃해져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까 그가 만들고 있는 부유석들의 크기와 형태가 다양했다.
동그란 계단, 길쭉한 계단, 세모난 계단…… 천차만별이었다.
[또 흙장난임?]
“실험해 보니까 이 공중 계단이라는 스킬이 은근 재밌더라고. 그냥 떠 있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크기나 형태가 그때그때 달라도 되더라고.”
[그야 흙이니까 당연하죠.]
“응. 그래서 이번엔 흙이 아니라 다른 재료로도 되나 궁금해졌어.”
[음? 다른 재료라면 뭐요?]
“나도 그래서 아무거나 다 해 보고 있지! 망령석만 달려 있으면 나무 계단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음?]
“게다가 그거 알아?”
[……?]
토끼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다운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마치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어린이처럼 신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실험을 해 보니까 말이야. 부유석에 생명 에너지를 조금 나중에 주입하는 것도 가능하더라고. 그럼 엘리베이터가 되는 셈이지! 물론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못하는 반쪽짜리지만 말이야.”
[……뭐, 그렇구만요. 그것 참 재밌어 보이네요. 님이 행복하다면 됐어요.]
신나게 주절거리는 그를 보며 토끼는 짜게 식은 표정이 되었다.
자신은 아무리 들어도 다 부질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도울 게 뭔데요? 그것만 딱 말하셈.]
그에 정다운은 씨익 웃었다.
* * *
[슬슬 성의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오? 벌써?”
토끼의 말에 정다운은 한껏 기지개를 펴며 문어 골렘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착한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문제가 생겼어요. 님이 잠깐 나와 봐야 할 것 같아요.]
“……?”
그 말에 정다운은 의아한 얼굴로 문어 골렘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자 토끼의 말처럼 저 멀리 뾰족한 성 꼭대기의 실루엣이 드디어 어둠 밖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하.”
그 모습을 본 정다운은 토끼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눈치챘다.
검은 여왕의 성은 단순하게 보면 비정형으로 뒤틀린 피라미드 형태라 볼 수 있었다.
일정 높이까지는 성벽이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되어 있었지만, 꼭대기부터는 뾰족하게 방향이 비틀려 있었던 것이다.
즉, 지금부턴 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 날아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위험해 보입니다. 후퇴를 추천합니다.>
[알파 님 말씀에 저도 한 표요. 심연어들의 움직임이 아까부터 심상치 않아요.]
그때 구호열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도 동감이야! 여기 너무 무섭다고! 발판도 점점 좁아지고!”
정다운도 다급히 말했다.
“나한텐 형님 근육이 더 무섭다니까요? 대체 그 생선뼈는 왜 들고 다니고 있어요?”
어느샌가 구호열은 자신의 키보다 2배는 긴 심연어의 척추 뼈를 무기로 휘두르고 다니고 있었다.
그가 만족스럽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거? 이건 이렇게 쓰는 거야.”
그는 때 마침 어둠 속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이쪽으로 달려드는 심연어를 발견하곤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거대한 척추 채찍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쐐애액! 콰직!
키햐악!
심연어는 처절한 단말마를 남기며 몸이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그 한 방이 어찌나 강력한지 그 뒤에 있던 흑안개까지 반으로 갈라질 정도였다.
“헐, 뭐야 저거? 무서워…….”
[히익? 생선 학살마다!]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드는 가공할 무위에 정다운과 토끼는 그를 향해 쌍엄지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역시 호열 형님이다. 형, 진짜 멋있어요. 존경스럽다.”
[심연어가 불쌍해 보이는 건 처음임.]
구호열은 이마에 땀을 훔치며 정다운을 돌아봤다.
“어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다운아, 너도 지금 봤지? 심연어들이 더 전보다 더 흉악해졌어. 아무래도 성 꼭대기를 지키려고 하는 것 같아.”
“……누가 흉악해졌다고요?”
“심연어.”
“네?”
“심연어라고.”
“알았으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흐흐.”
정다운이 정중한 표정으로 손을 싹싹 빌자 구호열은 씨익 웃으며 다시 전장으로 몸을 돌렸다.
그 우람한 뒷모습을 보고 있던 정다운에게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호열 형님. 그 척추 몇 개만 더 구해 줄 수 있어요?”
“그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뭐하게?”
“골렘한테도 들려 주려고요.”
그 말에 구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지금도 충분히 무서운데 사정거리가 늘어나면 훨씬 좋겠지. 아, 저놈이 딱이겠다.”
그때 마침 그의 눈에 지나가던 심연어 한 마리가 포착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헐크처럼 성벽을 밟고 높이 뛰어올라 놈의 등을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등줄기에 주먹을 콱 박아 넣고, 거침없이 척추 뼈를 주루룩 뽑아 버렸다.
“키햐악!?”
심연어의 처절한 단말마가 어둠 속을 뒤흔들었다.
[흑, 물고기 불쌍해…….]
애도를 표하는 토끼.
정다운은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구호열에게 외쳤다.
“좋아요! 내려오실 땐 계단 밟고 안전하게 내려오세요!”
“뭐? 오호?”
구호열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그의 발아래 공중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다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발판이 좁다면서요? 지금부턴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마음껏 싸우라고요. 공중 계단! 공중 계단!”
처처척! 처처처척!
평소에 흙벽돌을 바닥에 투척하는 느낌으로 손짓을 하자, 허공에 부유석들이 계단 형태로 척척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위치와 높이는 무작위였지만, 소라 껍데기를 중심으로 따라가다 보니 묘하게 나선 형태를 띠게 되었다.
“와, 이거 좋은데? 지하 신전에 있던 복층도 이렇게 만들었었지?”
구호열은 허공에 떠오른 계단 위로 올라서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런 식이라면 추락할 걱정 없이 마음껏 날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다운이 주의를 줬다.
“아, 물론 심연어들이 계단을 집어삼킬 수도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고요. 없어지면 내가 계속 만들어 주겠지만.”
“오케이! 엇? 요놈이 어딜!”
또 한 마리의 희생자, 아니, 생선의 등줄기가 뽑혀 나갔다.
그렇게 잠시 후.
철갑 고릴라 골렘들의 손에 하나씩 흉악하게 생긴 척추 채찍이 들려졌다.
“크워어!”
쐐애액! 콰직!
공중 계단 위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채찍으로 심연어를 공격하는 골렘들의 모습은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저거 뭐야, 무서워.”
“가까이 가면 괜히 우리도 당하겠는데.”
거대 구호열, 아니, 고릴라 골렘들의 활약을 보며 다른 참가자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최고의 탱커들이 앞에서 날뛰어 주고 있는 덕분에 그들은 뒤에서 안전하게 원거리 스킬로 견제만 충실히 하고 있었다.
꼭대기까지 이제 진짜 코앞이었다.
* * *
한편, 어둠 속 어딘가에선 스테이지-4의 도우미 또한 황당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인간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참가자들이 어디까지 왔나 잠시 와 봤더니, 들어가라고 만들어 둔 유적지의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거 설마 스테이지-1 최종 보스는 아니겠지? 좀 비슷하게 생겼는데?]
골렘인 것 같기는 한데 모습이 미묘하게 달라서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저 중심에서 느릿느릿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문어의 정체는 또 뭐냐는 말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기존에 갖고 있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대체 어떤 놈의 스킬이야?]
도우미는 날카로운 눈으로 참가자들의 모습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정다운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워낙 화려한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저 골렘처럼 생긴 거구가 골렘들을 통솔하는 건가?]
틀렸다.
그건 구호열이었다.
[아니면 저 번개를 쏘는 인간이 저 번쩍거리는 문어를 조종하는 건가?]
또 틀렸다.
그는 류승우였다.
하지만 워낙 활약이 대단하다 보니 도우미 입장에선 그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음?]
도우미의 시선이 문득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건 또 뭐야?]
맙소사…….
저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느 순간부터 뾰족한 성 꼭대기 근처에 땅이 생겨나고 있었다.
공중 계단을 만들던 정다운이 내친김에 그 옆에 넓게 천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일일이 손으로 내려놓는 게 아니라 공중에 투척하는 방식이라, 도우미의 눈으로는 대체 누가 저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 도저히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내 이것들을…….]
도우미가 눈을 번뜩이며 이를 악물었다.
무슨 수라도 내지 않으면 저 인간들이 꼭대기까지 무혈입성할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공중에 부유석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