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14화>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뭐가 나오는데요?”
“검은 여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검은 여왕이요?”
오창석 촌장의 대답에 정다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테이지-4의 도우미는 이곳을 가리켜 ‘검은 여왕의 성’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를 무한 나선의 감옥이라 불렀죠.”
오창석 촌장의 설명은 이러했다.
검은 여왕의 성.
이 소라 껍데기처럼 생긴 건물의 내부는 나선형 구조의 층계로 되어 있었다.
참가자들은 벽을 따라 빙빙 돌며 무작정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검은 여왕이 기다리고 있는 최상층을 향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끝도 없이 몰려드는 실체를 가진 환상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환상들의 모습은 매번 달랐다.
때로는 심연어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입을 벌렸고, 때로는 앞서 죽어 간 참가자들의 모습이 되어 스킬을 쓰기도 했다.
혹은, 그리운 과거의 연인이나 보고 싶은 가족들의 얼굴로 나타나 참가자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뻔히 환상인 줄 알면서도, 내 손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생생한 감촉은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더이다.”
말을 하면서도 내내 오창석 촌장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끼가 말을 이었다.
[지속적으로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둘 중 하나일 거예요. 마음이 무너져 전투 의지를 잃게 되든가, 혹은 인간성을 버리게 되든가.]
오창석 촌장의 경우는 전자라 볼 수 있었다.
[결국 이곳은 참가자들의 정신을 단단히 무장시키기 위한 훈련소인 셈이죠.]
“훈련? 개똥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게 무슨 훈련이야? 그냥 마음 고생하는 거지.”
감탄하는 토끼의 말을 끊으며 정다운이 한마디로 정리를 내렸다.
“괜한 고생하지 말고, 우린 그냥 벽 타고 올라가자.”
“……!”
[……!]
결국 올 것이 왔다.
정다운이라면 왠지 그런 말을 할 것 같아서 마음을 졸이고 있던 사람들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제 계획은 이래요.”
정다운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앞으로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계획을 설명했다.
“문어 골렘을 타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꼭대기에서 구멍을 뚫고 진입하는 거죠. 참 쉽죠?”
“……?”
“……쉽?”
쉽긴 개뿔!
개똥 같은 소리하네!
수많은 마음의 소리가 사람들 표정에 우러나왔다.
하지만 정다운은 진심으로 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늘로 둥둥 날아가는 것보단, 벽에 의지해서 기어가는 게 심연어들과 맞서 싸우기도 편할 거라 생각해요. 하늘에서 싸우다 괜히 추락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다행히 소라 껍데기처럼 생긴 건물이라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된 부위가 있었다.
그쪽을 따라서 기어오르면 될 것 같았다.
[다른 골렘들은 어떡하고요? 두고 가요?]
“그야 부유석 박고 무게 줄이면 잘 기어오르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다운은 즉석에서 망령석을 꺼내 고릴라 골렘들의 몸에 박아 넣으며 알파를 불렀다.
“알파, 생명 에너지의 양은 조금씩만 주입해. 하늘로 띄울 게 아니라 무게만 가볍게 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워낙 덩치가 커서 하나로는 당연히 무리였다.
정다운은 팔과 다리, 몸통, 각 부위와 관절들마다 망령석을 박았다.
그러자.
번쩍!
“크워?”
고릴라 골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폴짝거렸다.
자신의 몸이 가벼워진 것을 체감한 것이다.
원래라면 한 번 점프할 때마다 땅이 진동해야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우주인들이 달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몸이 방방거렸다.
“이 정도면 적당히 싸울 수 있지 않겠어? 무게로 압살하는 건 무리라도, 힘은 그대로니까 생선 같은 건 잡아 찢으면 되겠지.”
켄타우로스 골렘은 구조상 성벽을 타기 힘들 것 같아서 제외시켰다.
그러다 보니 남는 전력은 철갑 고릴라 골렘 3기와 기본 고릴라 골렘 1기.
그리고 문어 골렘이었다.
“이 정도면 골렘들 위를 밟고 다니면서 충분히 심연어들과 싸울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다 떨어지면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쯤이야 알아서들 다시 올라와야지. 어차피 나 빼고 다들 전투직들이잖아?”
[전투직도 사람인데……?]
소용없었다.
정다운은 전투직에 대한 무한한 환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열 살짜리 진수도 하늘 날아다니는데 뭐.”
[……?]
뭘까, 이 설득력은?
분명 위험한데 계속 들으니까 점점 그럴싸하게 들리고 있었다.
진정한 사기꾼은 자기 스스로도 속이는 자라고 했던가?
전혀 어려울 것 없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정다운의 말투에 참가자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구호열이 대표로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다운아, 저 위를 봐! 저 하늘에 심연어들이 얼마나 득실거리겠어?”
“형님, 나한텐 심연어보다 형 근육이 더 위험해 보여요.”
“…….”
그 말엔 토끼도 동감했다.
[하긴, 저번에 싸우는 거 보니까 심연어 척추 뼈를 무슨 맨손으로 뜯어 버리던데요? 어휴, 난 또 무슨 새로운 골렘인 줄.]
“…….”
정다운과 토끼의 합동 공격에 할 말이 없어진 구호열이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조용히 꿍얼거리는 것을 듣고 말았다.
“……척추 뽑는 게 뭐가 어렵다고.”
“……!”
“……!?”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후다닥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정다운은 류승우를 보며 말했다.
“승우 형, 형 스킬로 성벽 부술 수 있겠지?”
“한번 해 볼게.”
정다운의 말에 류승우는 군말 없이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콰르릉!
그 순간 그의 손을 중심으로 시퍼런 뇌전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성벽에 구멍이 뚫렸다.
“된다.”
“되네.”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다운과 류승우.
그 태평한 모습에 다른 참가자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다운만 이상한 놈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류승우도 정다운과 쿵짝이 잘 맞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꿈틀!
“헉? 저기!”
갑자기 성벽에 구멍이 뚫리자 그 안에 있던 검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기겁하며 그 앞에 서 있던 둘을 향해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안에서 괴물들이 나오려고 합니다!”
“어이쿠? 다시 막아야겠다.”
꽉.
“……?”
정다운은 류승우가 뚫은 구멍에 흙벽돌 하나를 쑤셔 넣고 단단히 밀봉했다.
그 전에 앞서 튀어나온 그림자들은 구체적인 형태가 잡히기 전에 류승우가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자, 올라가시죠?”
“…….”
태평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돌아보는 정다운의 말에 사람들은 군말 없이 장비를 챙겨야 했다.
* * *
키햐악!
캬아아악!
“크워어!”
치열한 전투.
성벽 위로 올라갈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졌고, 심연어들은 점점 더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어둠을 물리치는 거대한 문어 골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문어 골렘은 8개의 다리로 성벽에 돋아난 소라뿔을 휘감으며 앞으로 꾸준히 나아갔다.
참가자들은 그 위에 똘똘 뭉쳐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무차별로 스킬을 남발해야 했다.
절반쯤 올라갔더니 진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물려도 죽고, 떨어져도 죽었다.
그러다 지치면?
문어 골렘 안으로 피신해서 정다운이 주는 따끈한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워 쉬었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뭐지? 이 침대 엄청 푹신한데요!?”
허리가 녹아 버릴 것 같은 푹신함에 참가자들은 경악했다.
이것은 절대 던전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아니었다.
“충격 흡수 옵션이 2레벨이니까요. 쉴 땐 편하게 쉬라고요.”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흡족해서 정다운은 침대를 2개로 늘리고, 3개로 늘리다가 5개까지 늘렸다.
종국엔 참가자들은 3교대로 돌아가며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밖에서 심연어들과 싸웠다.
그러다 보니 일일이 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심연어 고기가 점점 넘쳐 흘렀다.
그러자 정다운이 점점 다른 요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간장 조림을 해 봤어요.”
“……!”
“이번엔 찜이에요.”
“……!?”
“초밥이랑 같이 드세요.”
“마, 맛있어!”
맛있는 밥과 고된 전투, 그리고 꿀 같은 휴식.
완벽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그림자 고양이가 배출해 내는 악몽의 영향으로 우울해지는 사람들이 생기면, 정다운이 차를 내놓았다.
“이거 비명초의 차인데, 마시면 모든 노폐물들이 제거될 거예요.”
“……!?”
의외로 비명초의 차는 그림자 고양이들을 상대하기에 딱 좋은 대처법이었다.
그것을 정다운은 직접 실험을 해 보고 알게 되었다.
니야앙-!
[……주인님, 언제까지 이 녀석을 제 그림자에 두고 있어야 하나이까.]
“왜? 악몽이라도 꿔? 너도 차 줄까?”
[저는 잠을 안 자니까 악몽 따위 꾸지 않습니다만, 이러다 제 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아서 그렇나이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바하무트의 그림자 속에는 그림자 고양이 한 마리가 꾸물거리며 갇혀 있었다.
길들이고 싶어서 일단 잡아 두긴 했지만,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서 눈치만 살살 보는 녀석이라, 정다운이 바하무트를 중심으로 태양석을 빙 둘러 놓아 그림자를 최대한 작게 만들어 둔 것이었다.
그 태양석에서 흘러나오는 열기 때문에 바하무트는 야금야금 녹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고양이니까 계속 같이 살다 보면 정이 들지 않겠어?”
[그러기 전에 제가 녹을까 봐.]
“나중에 네 고향에 가서 눈 좀 더 채워 줄게. 그런데 밥은 잘 주고 있지?”
[네…….]
그사이 바하무트의 임무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만지기도 싫은 태양석 부스러기를 조금씩 그림자 고양이에게 던져 주는 것.
그럴 때면 눈치만 살살 보던 그림자 고양이는 몸을 쭈뼛거리다가, 어미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입을 날름 벌려 태양석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그림자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리곤 했다.
“귀, 귀여워…….”
정다운은 그 모습을 구경하며 다짐했다.
“언젠가 길들이고 말겠어.”
그에 알파가 주의를 주었다.
<그림자 고양이는 불길한 짐승입니다.>
“또 불길해? 네가 불길하다고 하면 이젠 다 좋아 보인다고.”
<악몽을 배출하는 존재인데, 이번엔 진짜 불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하무트에게 맡으라고 한 거잖아.”
바하무트는 언데드 리치였다.
악몽 따위 전혀 문제 될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바하무트의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되려나?”
[그렇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시도해 보고 있지만, 쉽지 않나이다.]
사실 바하무트도 점점 욕심이 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수천의 악령들을 몸에 품고 다니며 조종하던 리치 마법사 아니던가.
소속이 바뀐 후로 더 이상 악령들을 부릴 수 없게 되었더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마치 팔다리가 잘린 느낌.
악령은 아니지만 이 그림자 고양이도 실체 없는 불길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
이런 놈들이라도 대신 부릴 수 있게 된다면, 과거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제 눈사람이 되었다.
눈사람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눈을 녹이는 빛과 열.
그런데 마침 빛을 잡아먹는 그림자 고양이를 부릴 수만 있게 된다면 자신은 약점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바하무트는 눈을 빛냈다.
[계속 노력해 보겠나이다.]
그런데 노력이라는 건 별거 없었다.
꾸준히 먹이를 던져 주는 것.
야금야금 친해지는 것.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는 녀석의 눈앞에 나뭇가지를 흔들거리며 관심을 끄는 것.
냐앙-?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