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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106)화 (106/393)

<던전리셋 106화>

*   *   *

푹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 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개운했다.

“와, 이게 수면 독 효과였다고? 이러다 중독되겠는데?”

정다운은 감탄했다.

이 독구름을 어떻게 잘 포장해서 불면증인 사람들에게 팔면 금방 떼부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럼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레벨 업을 시작해 볼까? ……그런데 여기 어디냐?”

의욕적으로 기지개를 펴며 정화구체를 장전하던 그가 밖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하무트가 대답했다.

[밤새 하늘에서 길을 잃을까 봐 가까이 보이는 절벽을 찾아 주차시켰나이다.]

“길은 이미 잃어버린 것 같은데?”

문어 골렘 안에서는 시야가 제한된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하얀 독구름과 바위 절벽뿐.

미니맵을 열어 봤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적어도 대신전 근처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럴 땐 역시 네비게이션이 있어야 하는데……. 뭐, 당분간은 상관없으려나?”

길을 잃어도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어차피 구름 위까지 높이 올라가면 대신전 위치 정도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일단 사방을 뿌옇게 메우고 있는 독구름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부터는 진짜 달려 보자고. 정화, 정화, 정화!”

그는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마르고 닳도록 정화 스킬을 사방에 뿌려 댔다.

그러다 보니 점점 스킬 사용법에도 조금씩 요령이 붙었다.

“어라? 정화구체가 직선으로만 날아가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살짝 회전도 먹는 것 같단 말이야?”

방금 아주 조금이지만 정화구체가 날아가는 방향이 약간 옆으로 비틀린 것 같았다.

[드디어 마법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셨나이다.]

“컨트롤?”

냉속성 한정이지만 리치 마법사였던 바하무트의 조언이 정다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자신이 마법사는 아니지만, 스킬도 마법이라면 마법 아니겠는가.

[정신을 집중하면 같은 마법이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게 되나이다.]

“집중하란 말이지? 흠, 어디까지 회전이 먹으려나?”

정다운은 정신을 집중해 정화구체의 궤적을 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진짜 조금씩 각도가 변하는 게 아닌가?

“이거 재밌는데?”

정다운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루 종일 똑같은 일만 반복하느라 지루했는데 새로운 재미를 찾은 것이다.

“그래, 역시 야구의 꽃은 변화구지. 볼링도 커브볼로 후려쳐서 스트라이크하는 게 멋있고.”

이후부터는 문어 골렘의 주둥이에서 출발하는 정화 구체들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며 독구름을 녹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짜 변화구 수준의 회전력이었지만, 계속 쉬지 않고 연습하다 보니 점점 각도가 커졌다.

“아예 90도로 팍 꺾이는 건 안 되나?”

어차피 물리적으로 던지는 게 아니니까 가능할 것도 같았다.

목표를 90도로 잡고 계속 발사하다 보니, 반원을 그리는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쯤에서 두통이 왔다.

“아, 뭐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당신은 바하무트처럼 마법사가 아닙니다. 마법을 컨트롤하는 일은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시킵니다.>

[이럴 수가.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감히 주인님의 심신을 상하게 하다니.]

바하무트가 깜짝 놀라며 바닥에 넙죽 엎드리자, 정다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심신이 상할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냥 밤 꼴딱 새고 시험 공부 한 수준의 피곤함이랄까.”

쉽게 말해, 다 때려치우고 잠이나 자고 싶은 상태였다.

“그럼 자면 되지.”

그래서 자기로 했다.

정다운은 포근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는 그대로 기절하듯 곯아 떨어졌다.

*   *   *

“좋아, 다시 괜찮아졌어.”

역시 정신력 회복에는 휴식이 최고였다.

잠에서 깨어난 정다운은 다시 심기일전해서 변화구를 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차 또 각도가 커졌는데, 반원을 그리는 순간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한계인가? 안 되니까 괜히 열 받네.”

그때 바하무트가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정신력 회복에는 비명초만 한 것이 없나이다. 전 주인님도 마력의 안정화를 위해 비명초의 차를 즐겨 마시곤 하였나이다.]

“비명초? 아아, 그러고 보니 알파도 비명초가 원래 마녀들의 마법 시약으로 쓰이는 거라고 했었지?”

<네. 그 불길한 식물을 드시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만……. 이미 많이 드셨지요.>

“맞아. 한방차 느낌이 나거든. 맛도 일품이고.”

알파는 항상 반대했지만, 비명초로 만든 차에는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몸 안의 노폐물을 배출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서 간간히 즐겨 마시고 있었다.

[심신이 안정되면 마법 효율이 올라가고, 깎여 나간 정신력도 금방 회복될 것이나이다.]

“좋았어. 그럼 물부터 끓이자.”

정다운은 비명초의 풀을 정갈하게 썰고, 흐르는 물에 잘 행군 후 정화 스킬까지 걸어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약 달이듯이 물과 함께 천천히 끓여서 진하게 우려냈다.

그러자 얼마 후 문어 골렘 안은 알싸한 향으로 가득 찼다.

“휴, 맡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냄새구나.”

<불길한 향입니다.>

알파가 옆에서 뭐라 꿍얼거리든 정다운은 그윽한 표정으로 정좌하고 앉아서 ‘비명차’를 찻잔에 쪼로록 따랐다.

모락거리며 찻잔 위로 올라오는 하얀 김이 정취 있어 보였다.

그리고 호로록.

꼴깍.

“허허, 이러고 있으니 신선이 된 기분이군. 구름 위에서 차를 마시게 될 줄이야.”

호연지기가 별거 있나.

정다운은 자신이 마치 신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껄껄거리며 웃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마시면 마실수록 두통이 점점 사라져 갔다.

역시 마녀들이 괜히 마법 시약으로 쓴 게 아닌 것이다.

평상시에 마실 땐 몰랐는데, 정신력이 소모되었을 때 마시니까 그 효과가 확실히 느껴졌다.

주루룩.

어느덧 그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또한 비명초의 효과였는데, 몸 안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킁. 그래도 예전보단 눈물이 적게 흐르네. 이젠 몸에 남은 노폐물이 별로 없나?” 

[몸의 탁기가 빠져나갈수록 마력 효율도 좋아진다 들었나이다.]

“그거 건강해졌다는 뜻이지? 틈틈이 마셔 온 보람이 있네. 훌쩍.”

정다운은 눈물을 훔치며 시험 삼아 정화구체를 다시 한번 발사해 봤다.

번쩍! 

휘오오!

이번엔 말끔히 성공!

정확히 반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정화구체를 보며 정다운은 쾌재를 불렀다.

“좋은데? 앞으로는 계속 차를 마시면서 연습해야겠다.”

이쯤에서 알파는 문득 궁금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냥 정화만 하면 될 일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각도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응? 재밌잖아?”

<…….>

알파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럴 때면 항상 뭐라도 한 소리 해 줬던 토끼가 문득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정다운은 비명차를 한 잔 더 따르며 호기롭게 말했다.

“좋았어. 더 각도를 꺾어 보자. 언젠가 정화구체가 문어 주위를 뱅글뱅글 돌 수 있을 때까지.”

또다시 스킬 노가다가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토끼는 류승우 뒤를 따르며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배고파.]

토끼는 자신이 왜 여기 온다고 했는지 내내 후회하고 있었다.

정다운이 시킨 거라도 반항이라도 해 볼 걸 그랬다며.

[심심해.]

토끼는 항상 티격태격하던 사람이 옆에 없으니 몹시 무료하고 짜증만 났다.

하지만 이 심심함을 풀고 싶어도 도저히 여긴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끄아악!”

“저쪽 방어해!”

“사, 살려 줘!”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

피와 땀 냄새.

생과 죽음의 기로에서 치열하게 발버둥치는 참가자들.

제3 던전 ‘심연의 바다’

이곳에 와서 토끼는 던전이라는 곳이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를 자신이 잊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쯧, 요즘 계속 그 인간하고만 다녔더니, 나도 감이 많이 죽었네.]

“끄아악!”

온 사방이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한 이곳.

‘심연의 바다’는 그 이름처럼 진짜 바다는 아니었다.

오히려 늪지대에 가까웠다.

질퍽거리는 땅과 그 위를 가득 메운 검은 안개.

그 안개에 의해 모든 빛과 시야가 차단된 곳.

그야말로 ‘심연’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어둠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괴물들과 늪에서 쩍쩍 입을 벌리는 사악한 생명체들.

무엇보다 심연의 바다에서는 빛을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곳의 검은 안개는 빛을 증오하며, 동시에 두려워했다.

이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이곳의 안개는 항상 빛을 삼키기 위해 덤벼들었다.

그리고 그 어둠에 잡아먹히면, 그 안에 숨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심연의 괴물들이 한꺼번에 참가자들을 덮쳤다.

콰르릉!

[흐아암. 오늘도 번개맨이 열일하시네.]

토끼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전투를 구경했다.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는 단연 류승우였다.

전신에 시퍼런 뇌전을 두르고 다가오는 모든 적들을 분쇄하며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광휘의 기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같이 이곳에 들어온 참가자들은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이 난관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토끼는 그가 요즘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쯧, 저렇게 스킬을 함부로 남용하다간 정신력이 금방 고갈될 텐데.]

오랜만에 옆에서 지켜보니 류승우는 확실히 난놈이었다.

단순히 스킬들 하나하나가 강한 게 아니라, 그걸 자유로이 컨트롤해서 상황에 맞춰 새로운 공격법을 창조해 냈다.

그야말로 전투의 천재.

그 말이 딱 어울리는 부류.

[태권도 기술과 정전기 스킬 하나로 시작했던 인간이 저렇게까지 성장하다니.]

류승우의 시작을, 토끼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시작은 분명 몸에 닿는 상대를 움찔 놀라게 하는 수준의 스파크였다.

콰르릉!

지금의 저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작고 보잘것없는 수준.

처음의 그는 작고 미약했고, 스킬의 도움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용기와 의지로 위기를 헤쳐 나가야 했다.

자신의 태권도 기술로 괴물들을 때려눕혔고,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무기로 삼았다.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공격하는 모든 순간에 정전기 스킬로 괴물들의 움직임을 멈칫거리게 해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 냈다.

치열하게 노력하는 천재.

그게 바로 류승우였다.

토끼가 그를 항상 높게 치하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스킬은 자주 사용하면 강해지고, 업적이 늘어날수록 스킬도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

[음? 내가 지금 누굴 생각하는 거지?]

불현듯 머릿속으로 정다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고개를 휘휘 젓는 토끼였다.

류승우를 생각하다가 그 놈팽이가 떠오르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류승우 님. 몸 좀 사려 가면서 싸워요. 스킬을 너무 심하게 컨트롤하려고 하면 정신력이 금방 바닥날 걸요?]

보다 못한 토끼가 류승우를 말렸다.

토끼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 지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아직까진 살 만해. 이러다 보면 새로운 스킬이 파생되서 생겨나기도 하더라고.”

[매번 그런 건 아니라고요. 님, 그러다 정신력이 완전히 고갈되기라도 하면…….]

“괜찮아. 불굴의 투지 스킬 덕분에 조금만 쉬면 금방 회복돼.”

[그래 봐야 풀로 충전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여튼 님은 너무 요령이 없음. 그 인간 반이라도 닮……. 아,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토끼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도 모르게 헛소리를 할 뻔한 것이다.

류승우한테 정다운을 좀 닮으라고 말하려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웃기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 류승우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맞아. 다운이에게는 항상 여유가 있지. 내가 존경하는 부분이야.”

류승우는 진심이었다.

항상 극한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자신에게는 절대 없는 무언가를 정다운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 물러설 곳이 없지.’

그는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 힘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마에 찍힌 숫자는 하루에 하나씩 착실히 깎이고 있었으니까.

이 각인을 없애지 않는 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의 바다처럼 자신들의 미래도 어두웠다.

“……음?”

그런데 문득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던 류승우가 갑자기 눈을 비볐다.

“뭐지? 내가 잘못 봤나?”

까마득한 심연의 하늘 저 멀리에서 뭔가가 언뜻 반짝거린 걸 본 것 같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피곤하긴 한가 보다.

이런 세상에 뭔 UFO(미확인 비행 물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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