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03화>
* * *
정다운의 요즘 하루는 대충 이러했다.
오전 내내 늘어지게 자다가 눈 떠 보니 점심때.
눈을 부비며 비척비척 사우나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푸욱 담그고 나른하게 꾸벅꾸벅 졸다 나오면.
척.
[식사 대령했나이다.]
바하무트가 아침 겸 점심으로 된장찌개와 쌀밥을 그 앞에 대령하고.
그 옆에서 토끼가 밑반찬으로 간단하게 삼겹살을 굽는다.
[고기에 소금 뿌려요?]
“……김치 먹고 싶다.”
다 좋은데, 김치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런데 고춧가루가 없었다.
감자도 수박도 찾았는데, 고추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고기도 있고 찌개도 있는데 뭘 더 바라랴.
“대신 수박이라도 먹을까. 헐? 꿀맛.”
와삭.
와삭 와삭 와삭.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과 함께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뚝딱 해결하고 나면, 이미 해는 중천.
“그럼 슬슬 출근할까? 흐아암.”
그는 평화롭게 배를 벅벅 긁으며 기지개를 폈다.
던전의 흔한 전투직들의 출근이란 무엇일까?
바로 사냥이다.
그는 전투력을 불태우며 게이트 앞에 섰다.
“가자.”
[앞장서겠나이다.]
파아앗!
바하무트를 앞세우고 게이트를 통해 건너간 곳은 바로 마녀의 집.
망령들이 덤벼드는 제2 던전의 지하 유적지.
고오오오!
오늘도 원독에 찬 망령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정다운의 정신도 번쩍 깨어났다.
“정화, 정화, 정화.”
파아앗. 팟, 파앗!
스킬 한 번에 3개씩 생성되는 정화구체.
[<정화> 스킬이 중급 4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오?”
아니다. 지금부터는 한 번에 4개씩 생성되는 걸로 바뀌었다!
항상 미리 장전해 둘 수는 없으니, 한꺼번에 만들어 내는 숫자가 많아질수록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기 유리했다.
게다가 정화구체 한 발의 데미지도 올라갔는지.
파앙!
고오오오!
이제 어지간한 망령은 정화구체 한 방에도 허공에서 파스슥 가루가 되어 흩날리게 되었다.
“좋았어! 이제 원샷 원킬이네. 이거 거의 승우 형이 된 기분!”
그가 한껏 기분이 우쭐해져서 방심할까 봐, 토끼가 상냥하게 조언을 해 주었다.
[초쳐서 미안한데요. 류승우 님은 한 방에 수십 마리도 죽임. 전격 스킬이 대부분 전체 데미지라.]
“……쓸기나 해.”
쓱싹 쓱싹.
그의 말에 토끼와 바하무트가 기계적으로 빗자루질을 하고 지나가면.
순식간에 반짝반짝 빛나는 미궁 복도.
“후, 이게 뭐라고 보람차지?”
류승우는 개뿔. 그냥 던전 청소부가 된 기분이었다.
하루 일과가 빗자루질만 하다 끝나는 기분…….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고.
다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그때가 바로 퇴근 시간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놈의 망령들은 바퀴벌레도 아니고 끝도 없이 나오네.”
점점 망령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구석구석 숨어 있는 놈들을 찾아서 정화시키는 게 더 귀찮았다.
가뜩이나 이쪽은 숫자가 적어서 더 힘들었다.
“아,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오게 할 방법은 없을까?”
그 말에 토끼가 혀를 찼다.
[님, 이젠 간이 아주 배 밖으로 나오셨음?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방심으로 죽어요. 안전 불감증 걸리면 님 같은 약골은 바로 죽을 거예요.]
“적어도 여기선 절대 죽을 것 같지 않아서 그래. 애초에 여기 원래 보스가 지금 우리 편이잖아.”
[황송할 따름입니다. 주인님의 안위는 이 몸에게 맡기시지요.]
바하무트는 호탕하게 웃으며 새하얀 눈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마녀의 집에 있는 모든 함정들과 위험 요소에 대해 빠삭한 전직 보스 괴물이 옆에 있는 이상,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안전 불감증도 허용되고 있었다.
“그럼 슬슬 돌아가자고.”
파아앗!
그렇게 틈새 마을로 복귀하자, 사람들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웅성웅성.
“……뭐지? 무슨 일 있나?”
정다운은 의아했다.
마을에 있던 참가자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조바심이었다.
류승우가 굳은 얼굴로 정다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마을에 도우미가 왔다 갔었다.”
“누구? 도우미라면?”
[음? 류승우 님? 지금 이마에 그거 설마……?]
무엇을 발견했는지 토끼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류승우의 이마에는…… 아니,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이마에는 하나같이.
<29>
검은 숫자들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 * *
얼마 전.
[흐음? 여기가 왜 이렇게 번성했지?]
스테이지-4의 도우미는 하늘 위에서 틈새 마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해야 빈민가 소굴이었던 틈새 마을이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놀랍도록 발전해 있었다.
[원래 이러라고 내버려 둔 곳이 아닌데.]
틈새 지역은 원래 던전과 던전 사이를 잇는 길목에 불과했다.
어차피 먹을 것도 없고 언데드들이 자꾸 나타나서 사람이 살기엔 척박한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을 보라.
마을을 둘러싼 견고한 성벽.
그 위에서 외적을 든든하게 방어하고 있는 온갖 던전 식물들.
그뿐이랴, 던전까지 가는 길에는 해골들이 넘어오지 못하는 높이의 다리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흐음? 뭐지? 인간들이 원래 이렇게 협동을 잘했던가?]
도우미는 혼란스러웠다.
이 정도 스케일의 공사는 한두 명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과 시간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가뜩이나 던전에서 먹고 살기도 바쁜 인간들이 이렇게 소모적인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요즘 진짜 이상하군. 오랜만에 내려가 볼까?]
도우미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틈새 마을 아래로 내려섰다.
바로 오창석 촌장의 앞으로.
“헉!? 세, 세르파 님!”
갑작스런 스테이지-4의 도우미 세르파의 방문에 오창석 촌장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바로 엎드렸다.
[호오, 그사이 신수가 훤해졌군? 먹고살 만한가?]
“아, 아닙니다…….”
[아니라고?]
“…….”
사시나무 떨듯 전신을 덜덜거리는 오창석 촌장은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신수가 훤해졌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덥수룩한 머리, 깡마른 체구.
항상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던 비굴한 자.
그것이 바로 세르파가 기억하는 오창석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덥수룩한 머리는 그대로지만, 몸에 살이 제법 붙어 있는 것이 그동안 그가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를 입증하고 있었다.
[그동안 마을을 제법 번성시켰더군? 내가 네놈의 죽음을 아직까지 유보시켜 준 이유를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차, 착각은요. 저는 맡겨 주신 사명에 충실하게 살고 있습니다요.”
[흐음? 확실한가?]
“그, 그렇습…….”
대답을 할 때마다 오창석 촌장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찌나 무서운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스르륵.
덜덜 떠는 그의 앞머리가 옆으로 움직이며 숨겨져 있던 이마가 드러났다.
그러자 그곳엔…….
<0>
검은 낙인.
세르파가 직접 내린 사형 선고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잊지 마라. 나는 언제든 네놈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다.]
세르파의 냉혹한 목소리가 심장을 후벼팠다.
오창석 촌장은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을 삼켰다.
“알고…… 있습니다. 제 사명은…….”
[나를 대신하는 것.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해서 참가자들에게 던전에 대해 설명해 주라고 살려 줬더니, 아주 여기에 살림을 차렸더군.]
“…….”
오창석은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내려진 사명이자, 세르파가 자신을 아직까지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였다.
스테이지-4 도우미 세르파는 천성이 게으르며 머리가 영활한 자였다.
몸은 움직이기 싫고 머리만 굴리는 타입이다 보니, 그 성미에 무려 4곳이나 되는 던전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참가자들을 관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 마침 던전에서 도망친 참가자 한 명이 틈새 지역에 터를 잡는 것을 보고,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에게 직접 인간들을 관리하게 하면 어떨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탁월한 아이디어였다.
도우미의 역할이라고 해 봐야 사실 별거 없다.
그중에서 ‘다음 던전은 이러이러한 곳이다.’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 가장 귀찮고 번거로운 일.
그 정도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일임한다면, 자신은 던전을 리셋하거나 유적지를 세팅하는 일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마침 오창석이라는 인간도 여러 가지 조건들 덕분에 던전들의 중간에 위치한 틈새 지역에서 살아남기 딱 적당한 인물이었다.
시험 삼아 죽이지 않고 임무를 맡겨 봤더니 나름 흡족하게 참가자들에게 한껏 거만을 떨며 던전에 대해 조언을 해 주는 게 아닌가.
그렇다. 거기까지는 딱 좋았다.
하지만.
‘정다운이 오면서 변했다!’
그를 떠올리자 오창석 촌장은 마음이 복잡했다.
애초에 마을이 안전해진 게 문제였다.
정다운이 만들어 준 외벽과 던전 콩들로 인해 마을이 외적의 침입에 대해 완벽하게 안전해져 버린 것.
[요즘 제3 던전으로 넘어오는 참가자들이 확연하게 줄었다. 이건 누구 탓이지?]
“그, 그건…….”
세르파의 말에 오창석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참가자들 중에 더 이상 던전 공략을 그만두고 마을에 눌러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어난 이유?
더 이상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은 이유?
‘당연한 심리잖아! 사람이라면!’
애초에 누가 고생을 사서 하고 싶어 하냐는 말이다!
오창석이 계속 아무 대꾸도 못하고 엎드려만 있자, 세르파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흠, 재미없군.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에게 재미를 더해 주마.]
세르파는 그를 내버려 두고 마을 위로 다시 날아올랐다.
마을에 있는 모두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천천히.
전신에서 검은 아우라를 풍기며.
“헉, 도우미다!”
깜짝 놀라며 경악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하찮게 내려다보며, 세르파는 오창석 촌장에게 마지막 임무를 내렸다.
[네 마지막 사명이다. 이 모두를 직접 끌고 던전으로 들어가도록. 너희들이 살아날 길은 그것뿐이다.]
“……!”
그 순간.
도우미 세르파의 몸에서 일렁이던 검은 기운이 허공에서 거대한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그는 죽음을 선고하는 심판관.
자신을 우러러 보는 모든 제물들에게 엄숙히 ‘죽음’을 선포했다.
[사형을 선고한다.]
그 순간 제물의 낙인이 발동했다.
번쩍!
“……!?”
마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마에 ‘30’이라는 검은 숫자가 일제히 찍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29’로 카운트가 줄어들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의아해하는 참가자들.
“맙소사…….”
이 안에서 유일하게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던 오창석 촌장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참가자들이여, 살고 싶다면 던전을 공략하라. 사형일이 다가오고 있으니.]
세르파는 그렇게 사라졌다.
* * *
<용의 사도를 흉내 내고 있군요. 어쭙잖은 일입니다.>
모든 전말을 들은 알파의 소감이었다.
종말의 용과 세르파, 그리고 오창석 촌장의 관계가 마치 생명의 용과 정다운, 그리고 용의 사도들을 보는 것 같았다.
정다운은 이해가 안 되었다.
“원래 도우미라는 게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다 죽일 수 있는 거였어?”
[아마 우리가 모르는 어떤 조건이 있을 듯요. 저번부터 어렴풋이 느꼈지만 정말 대단한 도우미예요.]
“도우미 주제에 별걸 다 하네.”
[던전 도우미한테 감히 ‘주제’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님밖에 없을 거임.]
정다운의 말에 토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침 오창석 촌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30일, 아니, 29일 안에 다음 던전을 공략하고 생존자 전체 회복을 받는 것.”
“…….”
그 말에 앞으로 던전 공략을 포기하고 마을에 눌러 살려던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황이 정말 암울했다.
정다운 빼고.
“정화 스킬로는 어떻게 안 되나?”
여기서 그 혼자만 유일하게 제물의 낙인에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