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97화>
* * *
“아무래도 시간을 내서 정화 스킬을 중급으로 올려야겠어.”
최근 정다운은 자신의 메인 스킬인 ‘정화’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기서 ‘메인 스킬’이란, 참가자들이 던전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주어지는 최초의 스킬을 말하는데, 다른 일반 스킬들과는 다르게 등급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 정다운의 메인 스킬 ‘정화’는 초급 10레벨.
중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말에 토끼도 동의했다.
[좋죠. 언데드들에겐 정화 스킬이 천적이나 다름없어요. 기회가 있을 때 중급으로 올려 두면 나중으로 갈수록 두고두고 이득일 거임.]
그동안 정화 스킬의 쓰임새라고 해 봐야, 땅굴 속의 공기를 쾌적하게 한다든가 식량에서 독소를 빼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리치나 망령들, 해골 병사들 같은 놈들을 상대해하다 보니 ‘정화’ 스킬이 제법 공격 스킬로도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스킬의 사정거리예요.]
“맞아. 손이 직접 닿거나 들고 있는 무기까지만 적용되니까. 싸울 때 너무 가까이에서 싸워야 하는 게 너무 위험하단 말이지.”
[중급이 되면 스킬이 원거리로 진화할 수도 있어요.]
“그럴까?”
[그런데 괜찮겠음? 정화 스킬로만 사냥을 해야 하는데?]
“사냥을 왜 해?”
토끼의 우려 섞인 말에 정다운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토끼도 이제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 아주 그냥 지렁이처럼 평생 흙이나 파먹고 살아라.]
마침 틈새의 땅은 아무리 정화해도 계속 부패의 저주가 올라오는 지역이었다.
정화 스킬을 수련하기엔 이만큼 적격인 곳도 없었다.
* * *
“그래서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얼마 후, 류승우 일행은 정다운의 요청에 전투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마을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정다운의 부탁은 간단했다.
“내가 땅을 정화하는 동안, 해골들을 막아 줘.”
“쉽네.”
“언제까지요?”
“내 메인 스킬이 중급 될 때까지.”
“……쉽지만 빡세네.”
정다운의 부탁에 류승우 일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틈새의 땅은 실시간으로 해골 병사들이 샘솟는 곳이었다.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 한가운데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무작정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과 지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끄응, 어쩐지 잘 먹고 잘 쉬게 하더라니.”
“다운이 형, 레벨 업을 할 거면 그냥 사냥하는 게 빠르지 않겠어요?”
“맞아. 차라리 우리가 지켜 줄 테니까 네가 직접 정화 스킬로 해골을 잡으면…….”
“어휴,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 나는 호열 형님처럼 재생 스킬도 없다고.”
땅을 정화하는 것보다 사냥을 하는 게 당연히 효율적인 건 정다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수단 없이 정화 스킬 하나로 싸워야 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자, 이쯤에서 시작하자고.”
“……전투 준비.”
“에휴.”
고된 노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동료들의 숭고한 희생(?) 속에서 정화 스킬은 결국 중급이 될 수 있었다.
[‘정화’ 스킬이 중급 1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 * *
[던전이 리셋됩니다.]
한편, 정다운과 바하무트가 떠난 마녀의 집의 초기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쿠궁 쿠궁!
화르륵!
무너진 벽들이 원래대로 복구되고, 불바다가 된 지하 3층이 차갑게 식어 갔다.
마녀의 집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이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고 있는 제2 던전.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차가운 시선이 있었다.
[잘도 깽판을 쳐 놨네.]
스테이지-4의 도우미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공략된 던전이 망가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번엔 역대급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저 건물은 또 뭐지?]
쿠르릉…….
마녀의 집 위에서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거대한 흙 건물의 존재도 정말 생소한 모습이었다.
[설마 직접 지었을 리는 없고. 저런 스킬도 있던가? 대체 무슨 용도지?]
설마 단순히 눈보라를 맞으며 목욕을 하고 싶어서 지은 거라곤 추호도 상상하지 못하는 도우미였다.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이 혹한의 추위 속에서 굳이 저런 건물을 건설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말이다.
[……음?]
마침내 던전 리셋이 완료되고, 마침내 도우미가 보스룸에 들어선 순간, 그의 표정은 바로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보스룸의 의자에 무게 잡고 앉아 있어야 할 그렘린 리치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던 것이다.
[…….]
리치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도우미는 서둘러 리치의 라이프 베슬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얼굴을 굳혔다.
[……진짜 영혼이 사라졌군. 네임드 보스가 완전히 망가졌어.]
정말 난감하게 되었다.
리치의 라이프 베슬은 단순히 마력 저장소가 아니라, 생전의 영혼을 담아 두는 그릇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그릇에 영혼이 사라졌으니, 이제 이 리치는 실 끊어진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누가 성불이라도 시킨 건가? 영혼을 직접 파괴하는 스킬? 대체 이번 놈들은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참가자들 옆을 계속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이제 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별수 없지. 보스를 바꾸는 수밖에.]
그는 바로 조치를 취했다.
보스가 리셋도 안 되게 망가졌다는 건 특수한 상황이긴 했지만, 바로 이럴 때를 대비해서 도우미가 존재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 기존의 보스를 없애 버리고 마녀의 집을 새롭게 손봤다.
그리고 흡족하게 웃었다.
[흠. 나쁘지 않군.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던전이 되겠어. 이런 것도 나름 재미있겠지.]
물론 그 재미라는 건 어디까지나 관리하는 입장일 뿐.
참가자들에게는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이 될 것이었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마녀의 집에 다시 방문한 정다운과 토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리치가 없네?”
[던전이 달라졌어요.]
제2 던전이 리셋되자마자 바하무트 같은 리치를 또 하나 챙겨 오기 위해 넘어왔더니만, 리치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 보스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많은 망령들의 군집체였다.
구오오!
휘오오오!
“이크.”
사방팔방 벌 떼처럼 돌아다니는 망령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들은 기둥 옆으로 바짝 숨어서 대화를 나눴다.
[보스를 아예 바꿨나 본데요?]
토끼는 한눈에 유적지의 상태를 알아봤다.
“그런 것도 가능해? 너는 그런 거 못했잖아.”
[상급 관리자들에겐 던전의 함정이나 가디언들을 변경할 수 있는 재량이 있어요. 님도 지금 그러고 살잖아요.]
“그렇긴 하네.”
누굴 탓할 것 없이 정작 정다운 자신도 매번 신전의 함정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마녀의 집을 공략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겠는데요?]
“어떻게 달라지는데?”
[섬멸전이에요. 마녀의 집에 있는 모든 망령들을 다 잡아야 공략이 되는 방식인 듯요.]
“저 많은 걸? 귀찮겠네.”
[귀찮기만 하겠음? 미로는 계속 바뀌는데, 망령들은 얼마든지 벽을 통과하면서 덤벼들잖아요. 망령들 숫자가 전보다 더 많아졌으니 엄청 피 말릴 거예요.]
“그래도 그게 리치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흐음?]
정다운의 말에 잠시 생각해 보던 토끼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네요. 목적은 다른데 공략 방식이나 난이도는 거의 비슷하겠다.]
생각해 보니 이 유적지는 어차피 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찾기 위해서 미로 곳곳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벽을 통과하며 다니는 망령들을 다 잡아 죽이기 위해 미로를 헤매게 생겼다.
리치가 없어졌지만 참가자들이 고생하는 방식이나 난이도는 거의 그대로였으니, 역시 상급자 도우미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지금 손해가 막심하다고.”
바하무트 같은 리치를 앞으로 더 늘릴 수 없게 됐다는 현실에 정다운은 크게 슬퍼했다.
마치 마땅히 자신의 것이 되기로 약속된 리치들을 송두리째 누군가에게 강탈당한 심정이었다.
“뭐, 그래도 도살자의 식칼은 남아 있겠지.”
[……징그러운 인간 같으니. 아무리 우리 편이지만 님은 너무 도둑놈 심보임.]
끝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마녀의 실험실을 뒤지는 정다운의 집요함에 토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편이라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너무 뻔뻔했다.
“호우! 식칼 찾았다.”
다행히 바하무트의 보물이었던 도살자의 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살자의 칼 +4]
- 내구력 : 100/100(%)
- 옵션 : 도축 (3레벨)
뼈와 살을 해체하는 기술이 좋아진다.
- 특수 옵션 : 흡혈 (1레벨)
적의 체력을 빼앗아 자신의 체력을 회복한다.
이 중에 유감스럽게도 ‘특수 옵션’은 제단의 강화 시스템에 등록할 수 없는 옵션이었다.
<특수 옵션은 대장장이의 영역입니다. 오랜 옛날, 실력 있는 장인들은 무기에 특별한 권능을 각인시킬 수 있었습니다.>
알파의 기나긴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했다.
1) 일반 옵션 : 완성된 무기에 추가적으로 마법을 인첸트함. (제물로 바치면 마법 정보가 강화 시스템에 등록됨. 다른 무기에 적용 가능.)
2) 특수 옵션 : 대장장이가 무기를 만드는 중간에 마법을 각인시킴. (제물로 바치면 무기의 각인이 파괴되면서 옵션이 영영 사라짐)
즉, 도살자의 칼을 제물로 바치면, 특수 옵션인 ‘흡혈’은 공중 분해되고 일반 옵션인 ‘도축’만 제단에 등록이 된다는 뜻.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다운은 크게 실망했다.
내심 ‘흡혈’ 스킬이 있는 강화 무기를 마구 양산해 볼까 생각했었는데, 말짱 꽝이었던 것이다.
특수 옵션으로 ‘검기’가 붙어 있는 사신의 낫을 바하무트에게 다시 돌려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 이제 튀자고.”
정다운은 보스룸 안에서 들려오는 망령들의 기척을 느끼고 개미굴 안쪽에 설치해 둔 게이트를 향해 서둘러 돌아갔다.
숨겨진 보물이 밖에 공개된 순간, 저번처럼 다짜고짜 보스전이 시작된 것이다.
고오오오!
보스룸 안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망령들!
[에휴, 도굴꾼이 따로 없네.]
“이젠 진짜 주인도 없는데,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
저 공포스런 광경을 보면서도 정다운은 식칼이 하나 더 생겨서 마냥 흡족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망령들을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비명초 하나를 꺼내 마구 발로 밟았다.
삐이이익-! 삐에엑-!
비명초가 빽빽거리는 소리에 망령들이 깜짝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이것도 일시적일 뿐, 놈들에게 들어가는 데미지는 하나도 없었다.
망령들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얼른 게이트를 타고 틈새 마을로 넘어가려던 정다운이 순간 멈칫하고 뒤를 돌아봤다.
“……아니지. 이젠 나도 전투 스킬이 생겼잖아?”
어디까지나 언데드 한정이지만.
“정화, 정화, 정화.”
파앗, 파앗, 파앗!
그의 손바닥 위로 새하얀 기운으로 뭉쳐진 동그란 구체들이 퐁퐁 떠올랐다.
정화 (중급 1레벨)
- 대상을 정화한다.
- 원거리 가능 (방출형)
씨익.
방출형! 보기만 해도 흡족한 옵션이 아닌가.
악취나 정화할 줄 알던 그 정화 스킬이 이렇게 훌륭하게 변할 줄 알았다면, 틈새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올려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스킬 노가다도 주변을 든든하게 지켜 줄 동료들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
지키는 것보단 파괴에 특화된 무식한 골렘들에게 엄호를 맡기는 건 너무 불안한 일이었다.
“자아, 그럼 한번 시작해 보실까?”
다시 이쪽으로 방향을 돌려 몰려오기 시작하는 망령들을 향해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권총처럼 구부렸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모든 ‘과녁’들을 향해 정화 스킬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차하면 게이트로 튀면 되니까. 혼자서 최대 몇 마리까지 잡을 수 있나 한번 봅시다.]
토끼가 카운트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