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96)화 (96/393)

<던전리셋 96화>

정다운은 바하무트에게 지하 신전의 관리를 떠넘겼다.

“앞으로 너의 무기는 이것들이다.”

[오오! 충성, 충성!]

손수 만든 싸리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바하무트에게 들려 주었다.

강화 같은 건 없는 진짜 청소도구였지만, 바하무트는 그 어떤 것보다도 빗자루를 좋아했다.

청소 도구가 생기자 그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지하 곳곳을 누비며 신전을 갈고 닦았다.

쓱싹쓱싹!

돌가루 한 톨까지도 쓸어 담을 기세!

<이제 보니 마녀의 리치는 청소의 달인이었군요. 흐뭇합니다.>

알파는 흐뭇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시시각각 신전이 점점 깨끗해져 가는 광경은 무슨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렘린 리치 바하무트는 애초부터 마녀의 수발을 들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솜씨가 꼼꼼하고 깔끔 떠는 성격에 주인의 처소를 마치 자신의 안방처럼 아끼는 마음가짐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하인이 바로 리치 바하무트였다.

그런데 토끼는 대체 뭐가 불만인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계모처럼 계속 잔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아닛, 여기 물기가 있잖아? 지나다니면서 눈가루 좀 흘리지 말라고! 연약한 내가 미끄러져서 꽈당! 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선배여, 그건 내가 물걸레질하려고 일부러 뿌려 둔 것이라오. 비행 마법도 가능한 분이 아까부터 뭐가 그리 불만인 게요?]

[바로 그 말투가 문제다! 그 노친네 같은 말투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젠 별게 다 트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바하무트의 넉살이 너무 좋았다.

[허허. 그러시군? 그럼 내 한번 노력해서 고쳐 보겠노라. 이 정도면 되시겠소이까?]

[그것도 이상해!]

[말투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로시다롱.]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잖아!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껄껄, 차차 나아질 것이외다.]

토끼는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사납던 리치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하인 주제에 쓸데없이 호탕한 녀석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새 식구를 정다운도 무척이나 총애하는 눈치였다.

그가 흙 쇼파에 늘어지게 앉아서 바하무트를 불렀다.

“바하무트으-?”

[주인님, 부르셨나이까!]

척.

친애하는 주인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한달음에 달려와 부복하는 눈사람.

그 앞으로 기포가 뽈뽈 올라오는 사이다 한 잔이 불쑥 내밀어졌다.

[얼음 대령하겠나이다.]

바하무트는 눈치 빠르게 허공에서 투명한 얼음을 생성해 사이다 안에 퐁당퐁당 떨어뜨렸다.

그걸 휘휘 흔들어 차갑게 만든 뒤 벌컥 들이켜는 정다운의 목젖이 시원하게 꿀렁거렸다.

“크으, 좋구나! 역시 사이다는 시원해야지!”

천국이 별거 아니었다.

마치 햄버거 가게에서 주는 것처럼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사이다를 마시게 될 줄이야.

바하무트가 다시 빗자루를 들었다.

[그럼 계속 청소를 하러 가겠나이다.]

“아냐, 청소는 이제 됐고. 이걸로 벼나 베.”

[아닛, 이것은!?]

척, 하고 정다운이 그에게 내민 건 바로 그에게 뺏었던 사신의 낫이었다.

“벼 벨 때만 빌려줄게.”

[황송하나이다! 충성, 충성!]

원래 주인이었던 이에게 돌려주는 것도 아니고, 빌려주면서 생색은 생색대로 내는 정다운.

그런데 그게 또 뭐가 그리 황송한지 감격해하는 바하무트.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요.>

알파는 모든 게 좋아 보였다.

서걱 서걱!

사람을 베던 사신의 낫이 이제는 눈사람의 손에서 벼를 베기 시작했다.

‘검기’ 옵션을 사용하기 위해선 생명 에너지가 소모되어서 그냥 순수한 날로만 베야 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격, 아니, 풀을 베는 격이었다.

[맡기신 사명, 완벽하게 수행하고 돌아왔나이다.]

마치 혈혈단신으로 전쟁에 나가 적군의 장수라도 베고 온 듯한 기세로 정다운 앞에 다시 돌아온 바하무트.

그의 뒤로 벼 이삭들이 시체처럼 처참하게 썰려 있었다.

그걸 보며 정다운은 지하 공간 리모델링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참에 식량 창고를 제대로 만들어야겠다. 개미가 이동하기 쉽게 동선도 생각해서.”

그렇지 않아도 곳간이 필요했다.

정다운은 아기 개미에게 벼 이삭에서 쌀을 탈곡하는 것을 완전히 맡길 생각이었다.

기계 탈곡기가 없다 보니 벼 이삭을 훑는 일이 엄청 번거로웠던 것.

그런데 마침 마녀의 개미에게 그런 본능이 있다고 하니 반가웠다.

“개미가 한 마리밖에 없어서 쌀 모으는 속도가 좀 아쉽단 말이지. 너 혹시 여왕개미 될 생각은 없냐? 새끼라도 좀 쳐서 군단의 여왕이 되는 건 어떠…….”

더듬 더듬?

“…….”

개미와 대화를 시도해 봤으나 실패.

도리어 토끼에게 비난만 당했다.

[헐, 정말 소름 끼친다. 설마 이 어린 것한테 알을 낳게 할 생각이심? 그 전에 먼저 남자친구부터 있는지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님?]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그런데 얘 암컷은 맞아?”

[개미 성별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

[어휴, 어처구니.]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완성.”

처처척.

정다운은 곧장 논 옆에 벽을 쌓아 벼 이삭을 모을 곳간을 만들고, 그 옆에 적당한 크기의 쌀통을 마련해 두었다.

그러자 그걸 본 개미가 자동적으로 바하무트가 곳간에 쌓아 둔 벼 이삭에서 하얀 쌀만 쏙쏙 까서 쌀통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방앗간도 여기다 나란히 두면 딱이겠네.”

“꾸왁 꾸왁!”

그 바로 옆에는 골렘 방앗간도 생겨났다.

“휴, 조잡하긴 하지만 완벽한 시스템이군.”

정다운은 개운한 표정으로 이마를 훔쳤다.

벼를 추수하고 탈곡하면, 그걸로 밥을 짓거나 빻아서 떡도 만들 수 있는 구조였다.

그렇다. 떡이다! 쌀떡! 콩떡!

골렘의 우악스러운 힘을 이용한다면 쌀로 만든 가래떡 정도는 쭉쭉 뽑아낼 수 있었다.

“흠, 떡을 쪄서 떡볶이를 해 먹고 싶은데…….”

떡볶이가 먹고 싶어졌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한국인의 빨간 맛!

매콤달콤한 한국인의 대표 길거리 음식, 떡볶이!

“……는 고추장이 없어서 안 되는구나. 젠장.”

정다운은 슬퍼졌다.

떡볶이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고추’가 없었다.

“어떻게든 고추를 찾아야겠다. 그 비슷한 거라도.”

고추가 희귀한 식물도 아니고 던전 어딘가엔 분명 있을 것이다.

혹시 오창석 촌장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   *   *

“우리 돌아왔어.”

일행들이 마을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마법진을 통해 마녀의 집에서 빠져나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제3 던전의 초입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참가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바로 다음 던전을 공략할 것인가.

아니면 잠시 틈새의 땅에 머무르며 재정비를 할 것인가.

물론 틈새의 땅에 있다 보면 점점 식량이 떨어져서 결국엔 다시 던전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정다운과 틈새 마을에 대해 알고 있는 참가자들의 발길은 당연히 재정비를 선택하고 마을로 돌아온 것이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배고프지?”

“흐어엉, 다운이 혀엉.”

정다운의 따뜻한 환대에 윤진수가 가장 먼저 달려와 안겼다.

마녀의 집에서도 고생하긴 했지만, 틈새 마을까지 돌아오는 이틀 동안의 고생도 말도 못했다.

해골 병사가 득실거리는 땅을 뚫고 지나온다는 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지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꼴이 완전 상거지가 따로 없네. 어우, 냄새. 일단 좀 씻어.”

정다운은 웃으며 그들과 함께 지하 신전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옆에 이번에 새로 뚫은 공간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맙소사.”

“헐.”

“다운아, 너 대체…….”

불굴의 투지 스킬 덕분에 어지간해선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는 류승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기엔 놀랍게도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찰랑이는 투명한 물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기다리다 심심해서 사우나실을 한번 만들어 봤어. 개운하게 씻고 나와.”

“……!?”

“지, 진짜로 사우나실이라고!?”

경악 그 자체였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들은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운아, 사랑한다.”

누구보다도 구호열이 가장 좋아했지만, 정다운은 칼같이 거절했다.

“사랑이 헤프네요. 첫사랑과 이별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아 놔. 큭큭, 아무튼 고맙다.”

씨익 웃으며 정다운이 박수를 짝짝 쳤다.

“손님 받아라.”

[아, 주인님의 일행분들이시군요. 저번엔 죄송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한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을 쓸던 눈사람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극한 직업이 따로 없었다.

“목도 마르지? 밥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눈꽃 빙수나 하나씩 들고 들어가.”

“……눈꽃, 뭐?”

류승우 일행은 순간 자신들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대령하겠나이다.]

말이면 다 되는 기적!

바하무트의 손에서 새하얀 눈송이들이 솔솔 뿌려지며 그릇 위에 소복하게 눈꽃 빙수가 생겨났다.

원래라면 여기에 연유가 올라가야겠지만, 그럭저럭 물엿으로 대체하고 그 위에 고소한 콩가루가 솔솔 뿌려졌다.

[주인님이 요즘 즐겨 드시는 인절미 눈꽃 빙수입니다. 목욕하시면서 드시지요.]

“……!”

더 놀랄 기운도 없었다.

그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꽃 빙수를 한 그릇씩 받아 들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자, 몸과 정신이 아득히 녹아내렸다.

“아아…….”

“흐어어!”

“뜨, 뜨겁…….”

거기다 대고 정다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부탁이 있어.”

“말만 해. 목숨도 준다.”

“난 영혼.”

[호오?]

그 말에 지나가던 바하무트가 눈을 빛냈다.

동료 직원이라도 생기려나 싶어서 쳐다보는데, 다른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사우나실의 뜨거운 온기에 눈사람의 머리가 자꾸 녹는데, 그 안에서 순간적으로 바하무트의 두개골이 빼꼼 외부로 노출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모습을 뽀뀨가 봐 버렸다.

“뽀뀨우?”

그렇다.

뽀뀨는 보고 말았다.

저 하얀 눈사람의 안에 숨겨진 아름다운 광채를!

새까만 마력이 다 빠지고 생명 에너지에 물든 황금빛 두개골을!

저걸 물어뜯으면 대체 어떤 황홀한 맛일지 감히 상상도 안 되었다.

“뀨뀨.”

[부, 부담스럽게 왜 이러시는 지. 뒤통수가 따갑구려…….]

뽀뀨가 뭐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를 따라오자 바하무트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리치인 자신을 한낱 먹잇감으로 여기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뀨우?”

[제, 제발…….]

“뀨우우?”

[안 되나이다…….]

자신의 목도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땅다람쥐의 눈빛이 너무나 순수하고 맑아서, 오히려 바하무트는 소름이 끼쳤다.

순수악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이 작은 짐승이 그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불사신이라 두개골이 조금 닳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직접적으로 타격은 입을 테니 굉장히 아플 거라서 한 입도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토, 토끼 선배……. 이분 좀 데려가 주시겠소이까?]

[호오?]

결국 그가 간곡한 도움을 요청하자 토끼의 눈이 반짝였다.

씨익.

[뽀뀨, 이리 와.]

“뀻.”

뽀뀨가 혀를 차며 터덜터덜 토끼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 바하무트는 비로소 자신의 서열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닥의 바닥 중에서도 최말단.

아마도 지금 쓸어 담고 있는 흙먼지 바로 위가 아닐까……?

그런데 흙도 흙 나름이었다.

“크워어.”

“오옴 오옴!”

……저 흙 골렘들은 애초에 말이 안통해서 무서웠다. 흠씬 얻어맞은 기억도 있으니.

바하무트는 왠지 자신의 서열이 흙보다도 아래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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