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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95)화 (95/393)

<던전리셋 95화>

[최초 업적 달성!]

“불사의 주인!”

마녀의 가디언 아이스 리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기발한 창의력에 던전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 보상 : 리치의 힘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급기야 업적까지 떠 버렸다.

그리고 바하무트의 두개골이 들어간 눈사람이 천천히 움직이며 자신의 새로운 몸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이 힘은…… 무엇인가.]

마력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에너지가 라이프 베슬에서부터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어딘가 고귀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힘이었다.

“그렇지! 내가 될 줄 알았다고!”

자신의 생각이 맞아 떨어지자 정다운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반면에 토끼와 알파는 얼이 빠졌다.

[이딴 게 진짜 먹힌다고?]

<어둠의 리치를 우리 진영으로 끌어들이시다니…….>

언데드 마법을 쓰지 않고도 리치를 수작업으로 재활용해 버리다니,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마녀의 실험체인 아이스 그렘린들은 태생적으로 눈과 얼음을 자신의 몸처럼 다룰 수 있었다.

얼마 전엔 놈들 여럿이 힘을 합쳐 거대한 눈 골렘도 만들어 움직이지 않았던가.

“그런 잔챙이 그렘린들도 그런 능력이 있는데, 하물며 명색이 왕이라는 녀석이 이 정도도 못 하면 창피하지.”

정다운은 한껏 으스댔다.

한편, 바하무트는 자신의 새로운 몸에 서서히 적응되는 중이었다.

[……이게 나의 새로운 몸인가.]

손도 발도 달려 있지 않은 하얗고 동그란 몸체.

하지만 눈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그는 스르륵 옆으로 미끄러져 이동해 보고, 위로도 둥실 떠올라 봤다.

[……그래도 손은 필요하겠지.]

쑤욱.

바닥에서 작고 동그란 눈덩이 두 개가 동실 떠오르더니 벙어리장갑처럼 저절로 갈라졌다.

리치 바하무트는 눈으로 된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더니, 정다운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그 앞으로 다가가 주저 없이 납작 엎드렸다.

척.

[이 바하무트. 앞으로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오냐.”

참으로 정다운도 덩달아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엔 그냥 눈사람이 앞으로 엎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오가는 분위기만큼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지난 과거는 다 잊고 앞으로 잘 지내 보자.”

[충! 황송하옵니다. 죽음을 다해 충성하겠나이다!]

“어허허. 참으로 충직한 부하의 본보기로고.”

[……놀고 있네들.]

토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툴툴댔다.

[리치 태세 전환 보소. 방금 전까지도 계속 저주하겠다고 중얼거리더니.]

[과거는 과거일 뿐.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옹졸한 선배여.]

[누가 옹졸! 그리고, 왜 내가 네 선배야?]

눈사람은 토끼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같은 주인을 모시는 하인들끼리도 서열은 존재하는 법. 그런데 선배는 복장을 보아하니 주인님을 보필하는 집사이시가 보군요.]

[헐? 누가 누구 집사야!? 나는!]

“머슴이야.”

[머슴이야! ……아, 아니야!]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당황하는 토끼를 내버려 둔 채, 정다운은 업적 보상을 다시 확인하고 씨익 웃었다.

- 보상 : 리치의 힘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아무튼 배신당할 걱정은 없어서 좋겠네.”

<아니, 실제로는 그 이상의 효과입니다.>

알파가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리치의 마법은 대부분 광범위 마법입니다. 자기 자신은 죽지 않으니 거칠 게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저 보상을 보라.

이제 리치의 광범위 마법에 휘말려도 정다운은 절대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전투 시에 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굉장한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알파는 생각했다.

게다가…… 이 리치는 던전이 리셋될 때마다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날 터!

알파는 희망에 넘쳤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신전을 방어하는 마법사단을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리치들로 구성된.>

[맞소이다. 이 바하무트, 라이프 베슬만 무사하다면 지옥에서도 기어 나와 주인님을 지킬 것이외다.]

알파의 말에 호기롭게 자신의 가슴을 팡팡 때리며 눈을 빛내는 눈사람.

항상 검푸른 기운으로 번뜩이던 리치의 눈에선 이제 검은 색이 싹 빠지고, 시원한 파란색 기운이 씩씩하게 넘실대고 있었다.

새로운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블리자드를 남발할 것 같은 기세에 알파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니까 에너지 낭비가 심하겠군요. 평소 때는 눈 한 톨도 아끼겠습니다.>

[헉? 아, 아니 되오!]

갑자기 라이프 베슬에 있던 생명 에너지가 10분의 1로 팍 줄어들자 바하무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몰랐다.

고난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일단 마을로 돌아갈까?”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정다운의 게이트가 열리자 바하무트의 찬사가 이어졌다.

[아니, 이것은!? 역시 나의 주인님은 전지전능하시나이다!]

게이트 마법은 자신의 공간이동보다도 훨씬 높은 차원의 마법이었기에 바하무트는 계속해서 놀라워했다.

그런데 그 게이트를 타고 지하신전으로 넘어온 순간, 바하무트는 당황하고 말았다.

천장에 박혀 있던 태양석의 따사로운 온기가 그를 격하게 환영해 준 것이다.

[주, 주인님! 이 몸이 흐물흐물 녹고 있나이다!]

바하무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다급히 구조 요청을 했다.

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사람 표면이 녹고 있었다.

토끼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우, 약해 빠졌네! 이런 약점이 있나!]

[리, 리치에게 약점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것은 눈사람이라면 당연한 특징……! 주인님!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늘려 주신다면 내 어떻게든 자력으로 버텨 보겠나이다!]

<안 됩니다. 그늘로 가면 괜찮을 겁니다.>

[…….]

정다운이 뭐라 하기도 전에 알파의 칼 같은 거절에 바하무트는 하는 수 없이 가까운 벽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다가갔다.

그리곤 그 옆에 딱 붙어서 좁은 그늘에 기우뚱하게 몸을 기댔다.

그렇게 거기 우두커니 서 있는데, 그러는 동안 일행들이 어디서 뭐 하나 류승우에게 귓말을 보내던 정다운이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하고 말했다.

“어? 아니, 안 되지. 그러면 아무 데도 못 움직이잖아.”

[헉? 오! 역시 나의 자비로운 주인님! 에너지를 3배로 늘려 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냉기를 유지해서 태양석과 싸워 승리하겠나이다!]

“아니, 그러기엔 에너지 아깝고.”

[…….]

다시 시무룩해진 바하무트.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머리 위에 뭔가가 스윽 올라왔다.

“그냥 이거 쓰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

정다운이 바하무트 머리에 씌워 준 건 바로 챙이 넓은 밀짚모자였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코끼리 타고 다닐 때마다 소일거리 삼아 만든 것이었다.

바구니나 소쿠리 같은 지푸라기를 씨실 날실로 엮어서 만들 수 있는 건 이것저것 많았다.

바하무트는 머리 위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인님? 이건 무엇인지요?]

“내가 만든 건데, 오? 사이즈가 딱인데? 어때? 좀 어설프긴 해도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

[이, 이럴 수가! 주인님께서 직접 만드신 장비란 말인가! 너무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작은 선물이었음에도 왈칵 하고 감동의 눈물 흘리는 바하무트였다.

사실은 눈 표면이 흘러내린 것이었지만 감정 표현만큼은 풍부했다.

그 격렬한 반응에 정다운은 기분이 괜히 우쭐해졌다.

“에잇, 그래! 기분이다!”

[엇? 줬다가 다시 뺏으시는?]

바하무트에게서 밀짚모자를 다시 벗겨 온 정다운이 소지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흐음. 어디 보자…….”

얼마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강화 장비들 중에 애매한 물건이 있었다.

“아, 여기 있네!”

[화염 방패 +2]

- 내구력 : 6/100(%)

- 옵션 : 화염 내성 (2레벨)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다 찌그러져서 내구력도 얼마 안 남은 철제 방패였다.

보통 이런 방패들은 잘 닦아서 프라이팬으로 쓰거나 하는데, 하필 옵션이 ‘화염 내성’이라 물도 끓이기 힘든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알파, 이걸 제물로 바친다.”

<잘 먹겠, 아니, 감사합니다.>

꿀꺽!

제단 위에서 화염 방패가 사라지며, 새로운 옵션이 강화 시스템에 등록되었다.

그리고 정다운이 한 일은 당연히…….

“강화!”

<아닛!?>

[장비를 강화합니다.]

 

[밀짚모자 +2]

- 내구력 : 100/100(%)

- 옵션 : 화염 내성 (2레벨)

“좋았어. 물이 안 끓는 정도니까 이 정도면 햇볕 정도는 충분히 막겠지?”

엄청난 비효율!

터무니없는 물건이 탄생해 버렸다.

토끼와 알파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화염 마법도 막을 수 있는 밀짚모자라니. 진짜 쓸고퀄이네요.]

<에, 에너지 낭비가…….>

반면에 그 밀짚모자를 다시 머리에 쓰게 된 바하무트는 격한 감동을 느꼈다.

밀짚모자를 쓰는 순간, 그에겐 더 이상 태양석의 온기가 두렵지 않았다.

[크흐흑! 나의 안위를 걱정하여 이런 황송한 선물을 주시다니! 이런 분을 죽이려 했던 과거의 이 몸을 저주하노라!]

차가운 눈물을 펑펑 흘리는 바하무트의 반응에 정다운은 크게 흡족했다.

역시 선물을 주면 이 정도 반응은 해 줘야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에잇, 목도리도 주마!”

내친김에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받은 빨간 털옷을 꺼내 소맷단을 잘라 길게 접었다.

그리고 강화!

[장비를 강화합니다.]

 

[털목도리 +2]

- 내구력 : 76/100(%)

- 옵션 : 화염 내성 (2레벨)

[오오! 이런 귀한 보물이라니! 충성을 다 하겠나이다! 충성충성!]

눈 두께가 가장 얇아서 녹기 쉬운 접합 부위인 바하무트의 목에 빨간 털목도리까지 둘러졌다.

그 덕에 더욱 눈사람다워진 바하무트는 신이 나서 지하 신전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아, 이곳이 바로 주인님의 처소란 말인가! 앞으로 이곳의 관리는 이 몸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뭐,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알파도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전의 관리를 항상 등한시하는 정다운에게는 이렇게 열성적인 하인이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녀석에게 소모되는 생명 에너지를 개미 눈곱만큼이라도 조금 올려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빗자루! 빗자루는 어디 있나이까! 이곳에 곡식이 쏟아져 있나이다! 이 몸이 청소를 하겠나이다!]

“곡식이? ……아차! 개미!”

정다운도 그제야 잠깐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잠깐만! 그거 치우지 마! 그거 내가 개미 먹으라고 준 쌀……인데……. 이거 왜 양이 더 많아진 기분이지?”

아니, 절대로 기분 탓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며 바하무트를 말리려던 정다운의 앞에 쌀이 수북하게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양이 거의 한 가마니…….

“왜 이렇게 불어났지?”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던전을 공략하느라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개미 알에서 태어난 아기 개미에게 주고 온 쌀 한 줌이…… 어째서인지 양이 폭등해 있었던 것이다.

[호오, 이놈은 키메라 엔트가 아닌가!]

바하무트가 마침 옆으로 쌀을 한 아름 안고 다가오는 엄지손가락만 한 개미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녀석은 무심하게 그것을 쌀 무더기 옆에 와르르 쏟아붓고는, 다시 벼가 있는 논으로 돌아갔다.

그걸 보며 바하무트는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이것 참. 아직 작지만 본능에 충실한 노예 개미를 키우시나이다.]

“……무슨 본능?”

[키메라 엔트는 전 주인님의 곳간에 식량을 모아 오기 위해 창조된 실험체이나이다.]

“아하…….”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가서 유심히 보니, 개미는 벼 이삭을 기어 올라가 쌀을 한 톨 한 톨 까서 모아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같이 본 토끼는…… 왠지 자기도 뭐라도 찾아서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째 혼자만 놀고먹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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