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93화>
[모여라, 나의 망령들이여!]
리치는 마녀의 집 전역에 뿌려져 있는 망령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히이이이-!
고오오!
불길한 바람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망령들이 그를 향해 먹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광폭해졌다.
[내 그놈만큼은 반드시……! 찢어 죽이리라!]
콰우우-!
모든 망령들의 힘이 그의 손에서 극도로 압축되어 하나의 마법으로 완성되었다.
계속 흘러나오는 기름 때문에 3층 전체를 완전히 진화시킬 순 없겠지만, 이 힘이라면 능히!
[나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버러지들에게 위대한 파멸을 가져다주리니!]
퀭한 리치의 눈에서 검푸른 안광이 폭발했다.
[블리자드!]
* * *
삐이이익-!
오싹!
비명초에서 나오는 소리가 미궁 전체에 주기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녀의 집 곳곳에 퍼져 있던 참가자들은 사색이 되어 그 방향을 쳐다봤다.
“저 소리는 대체 뭐지?”
“섬뜩하네.”
“뭔지는 몰라도…….”
“설마 그건가?”
서로를 보며 신중히 눈빛을 교환하는 참가자들.
때마침 비명 소리가 또 들려왔다.
삐이이익-!
“……!”
쭈뼛쭈뼛!
“크윽!”
오싹오싹!
그들의 안색이 또 한 번 창백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긴 마녀의 집이었지.”
“역시 저쪽에 보스가 있는 게 분명해.”
“마녀라도 있는 걸까?”
의식의 흐름이 자연히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 소리와 마녀의 집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누가 봐도 저곳에 보스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는 계속 미궁의 구조를 바꾸면서 자신의 위치를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바뀐 걸까?
아무리 봐도 몹시 미심쩍은 상황이었지만…….
씨익!
참가자들 중 강하고 호승심이 넘치는 자들은 오히려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함정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초대해 주는데 안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사양하지 않겠다.”
그들은 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미로를 헤매는 것보단 싸우는 게 속 편하지.”
“가자. 뭐가 됐든 길을 헤매는 것도 이제 지겨워.”
그렇게 그들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자들이 먼저 앞장을 서면 의례히 뒤따르는 자들도 생기기 마련.
결국엔 모든 참가자들이 최후의 결전을 향해 정다운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한편.
삐익 삐익-!
“나 이거 언제까지 밟아야 되냐…….”
구호열은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초를 계속 밟고 있었다.
동료들이 길을 잃을까 봐 주기적으로 방향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형이 첫사랑의 아픔을 이길 때까지요.”
“첫사랑 아니라니까!”
[낄낄, 첫사랑 아저씨는 이런 정신 공격에 유독 약하네요. 이거 소리만 크지, 사실 데미지는 별로 없는데.]
구호열은 억울했다.
“데미지가 없기는 뭐가 없어! 아까부터 망령들도 다 무서워서 얼씬도 안 하고 있는데!”
[그런 잔챙이들한테는 좀 효과가 있나 보죠. 그런 의미에서 아저씨는 근육만 컸지 아직 잔챙이라는 의미임.]
“그런데…… 진짜 아까부터 너무 망령들이 안 보이는데?”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리 비명초 덕분이라곤 하지만 정말 개미 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
뭔가 조만간 큰일이라도 터질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그리고 얼마 후, 진짜로 폭풍이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들썩들썩!
“……어?”
바닥에서 미세한 지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다운은 재빨리 게이트 하나를 열어 두고,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했다.
[치사하게 싸울 생각은 절대 안 하는 거 봐.]
“갑자기 발밑에서 낫이 튀어나오면 위험하잖아.”
[그게 가능했으면 진즉 공격했겠죠. 바닥은 딴딴함.]
토끼의 말에도 정다운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콰앙-!
[이노옴!]
“……!”
거센 폭음과 함께 등장한 리치의 모습은 진심으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 그 자체였다.
콰우우-!
마녀의 집에 있던 모든 망령들이 그를 중심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온돌이 풀가동되고 있음에도 북풍 같은 한파가 매서웠다.
정다운을 노려보는 리치의 눈에서 검푸른 안광이 살벌하게 꿈틀댔다.
[죽이고 말겠노라!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이리라!]
“……실내 온도 유지.”
정다운의 말에 아래층에서 불길이 후끈 치솟았다.
화르륵!
그러자 리치가 몰고 온 눈보라가 난방 틀고 켜 둔 에어컨 바람처럼 산들거렸다.
‘추운 건 대충 해결했고.’
정다운은 미리 준비해 둔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바로 바닥의 구멍을 메운 흙 위에 던전 콩을 심어 둔 것!
“발사!”
두두두두!
[……!?]
퍼벅! 퍽! 퍽!
리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 초입에서나 볼 수 있는 괴물 식물들이 왜 갑자기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겨우 그 콩알에 맞고 자신의 뼈에 금이 쩍쩍 가고 있는 것이다!
[알량한 재주를 피우는구나!]
리치는 사신의 낫을 휘둘러 던전 콩을 전부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정다운을 향해 다시 덤벼드는데, 그 순간 바로 옆에서 나타난 구호열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나는 안 보이냐!”
콰직!
[……!]
한 방에 리치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기세를 몰아 구호열이 강력한 힘으로 리치의 몸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불사신!
검푸른 기운이 전신을 감싸며, 박살 난 뼈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신의 낫을 들고 있던 리치의 팔이 허공에 뜬 채로 구호열의 후미를 공격했다.
후우웅!
“큭!”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도끼의 옆면으로 공격을 막아 낸 구호열!
하지만 그 여파로 도끼가 깨져 버리자, 그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실로 놀라운 파괴력이구나! 이런 무서운 놈을 지금까지 다운이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계속해서 사신의 낫이 휘둘러지며, 무차별적인 공격들이 눈앞을 수놓고 있었다.
“큭, 다운아! 내 뒤로 숨어라!”
구호열은 자신의 몸을 믿고, 정다운의 앞을 용감하게 가로막았다.
자신은 탱커! 방어력은 충분했다!
갑옷도 제법 좋은 걸 입고 있었고, 근육을 강화하면 기본 방어력도 확 올라갔다.
게다가 어디가 잘려 나가지만 않으면, 자신의 상처는 얼마든지 재생된다!
“이깟 낫질 따위! 근성으로 이겨 주마!”
구호열은 전신에 힘을 딱 주고 터프하게 리치를 향해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콰앙! 콰직! 콰아앙!
모든 스킬이 근육에 집중된 그의 공격은 진정으로 강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이 쾅쾅 터지고, 스치기만 해도 리치의 뼈가 가루가 되었다.
리치는 속수무책으로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빙판이라도 있었다면 공간 이동으로 얼마든지 상대를 교란할 수 있었을 텐데, 여기가 너무 따뜻해서 자신의 공격 수단이 대부분 봉쇄된 탓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리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마법사. 이런 힘만 있는 무식한 놈을 맨몸으로 부딪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나와 만난 네 운명을 탓하거라. 함정 발동!]
번쩍!
주변에 심어져 있던 환상 마법진이 발동했다.
그리고 그 순간, 구호열의 앞에 또다시 나타난 그리운 첫사랑!
“호열 님, 우리 같이 손잡고 걸을래요?”
“……!”
그녀가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자, 구호열은 그 자리에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이미 그녀와 손을 꼬옥 붙잡고 있고, 체력이 쭉쭉 빠져나가며 모든 스킬들이 풀려 버렸다.
“우리 이 손 놓지 말아요. 영원히.”
“…….”
어찌나 쑥스러운지 구호열은 목덜미부터 시작해 귀까지 새빨개져 김이 날 지경이었다.
[저쯤 되면 그냥 바보 아님? 환상 마법에 너무 약한데요?]
“……형님이 순수해서 그래.”
정다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비명초를 밟았다.
삐이이익-!
“으헉!?”
영혼이 깨질 듯한 비명 소리에 구호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긴 왜 이런 함정들만 있는 거야! 유치하게 미인계라니!”
억울하게 소리치는 그를 향해 리치가 비웃었다.
[바라는 소망을 이뤄 주는 함정일 터인데, 손만 잡고 끝이라니. 소박하기 그지없구나.]
“……으응?”
[남들은 보통 부귀영화를 꿈꾸거나, 가족을 만나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환상을 보았을 터인데.]
“……음?”
그 말에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구호열에게로 향했다.
토끼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동정했다.
[설마 그냥 첫사랑도 아니고, 여자 손 한 번 잡아 보는 게 소원이었음?]
“아니야! 아니라고! 손 정도는 헬스 강사하면서 여자 회원님들 운동 도와주면서도 얼마든지……!”
[그건 그냥 도우미고요. 나처럼 참가자가 아니라 업적 카운트 안 됨.]
“으아아! 리치 이노옴-!”
구호열은 절규하며 리치를 향해 미친 듯이 돌격했다.
아까보다 더 과격한 공격들이 리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일대에 함정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고, 그때마다 구호열은 손을 잡히고 힘을 빼앗겼다.
웃기지도 않은 촌극이 몇 번 반복되었을 때, 토끼가 눈을 빛냈다.
[찾았어요.]
“오? 찾았어?”
[역시 가까이에 있었음.]
정다운의 표정도 밝아졌다.
아까부터 토끼는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구호열이 함정에 체력을 조금씩 흡수당할 때마다 그 에너지가 흘러가는 길을.
그리고 그 끝에는 분명 그 에너지를 담아 두는 중심핵이 있을 터!
“그게 바로 리치의 약점인 라이프 베슬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 유적지의 제단일 테고요! 자, 저쪽임!]
“가자!”
정다운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을 구호열을 내버려 두고 토끼가 가리키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리치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려는 곳이 어딘지를 눈치챈 것이다.
리치는 구호열을 지나쳐서 정다운을 향해 자신의 모든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데 대부분의 망령을 소모했지만, 이 힘이라면 능히 눈앞의 버러지 하나쯤 얼마든지 갈아 버릴 수 있으리라!
[블리자드!]
콰오오!
“……!”
“다운아, 위험해!”
극도로 압축된 망령의 힘이 정다운을 향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뒤돌아본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고,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소지품에서 흙벽돌을 꺼내 막으려는 찰나.
콱!
“잡았다.”
커다란 손이 리치의 머리를 뒤에서 붙잡았다.
[……!?]
“반갑다, 이 자식아.”
바로 류승우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잔뜩 몰려온 수많은 참가자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다들 하나같이 살기등등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길을 많이 헤맸던 류승우.
그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주저 없이 리치의 머리를 바닥으로 콰앙! 내리찍었다.
[큭!?]
그 바람에 정다운을 향해 날아가던 망령들이 허공에서 와해되었고.
류승우는 전신의 힘을 리치의 머리에 집중시켰다.
“감전.”
콰르릉!
[크아악!?]
정수리부터 내리꽂히는 강력한 힘의 격류!
눈앞이 번쩍하며 천둥 벼락이 리치의 전신에 휘몰아쳤다.
리치의 입에서 끔찍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이때다!’
그 틈에 정다운은 재빨리 토끼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 그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벽에 쇠꼬챙이를 박아 넣었다.
“돌 깨기!”
쩌적!
원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열리는 비밀의 벽이었지만, 어쨌든 돌은 돌!
콰르르!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기분 나쁜 안개를 뿜어내고 있는 검은 구슬!
<라이프 베슬을 찾아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