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92화>
몇 분 전.
실험실을 빠져나와 3층 미로를 달리던 정다운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구불구불한 미로는 고랑.
천장은 구들장.
그리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실험실은 아궁이.
마침 지상까지 뚫려 있는 개미굴이 굴뚝의 역할까지 해 주고 있었으니!
‘이 또한 온돌이 아닌가!’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무릇 온돌이란, 아궁이에서 나오는 뜨거운 연기로 돌로 된 천장을 덥히는 것!
그런데 여긴 이미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있으니, ‘온돌’ 스킬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좋았어. 어차피 밑져야 본전!’
일단 외치고 봤다.
“온돌 설치!”
[온돌을 설치합니다.]
“됐다!”
곧바로 온돌 스킬이 적용되었다!
마녀의 집 지하 2층의 온도가 급격히 따뜻해진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다운이 온돌의 온도를 조절한 것이다.
“온도는 무조건 영상으로! 얼음이 절대 얼지 않게!”
얼음만 없으면 아이스 그렘린들은 그냥 성질 더러운 곰 인형일 뿐이었다.
그리고 2층을 돌아다니고 있을 동료들이 추위 때문에 몸이 둔해질 일도 없으니 금상첨화!
<류승우 : 정다운! 지금 너 거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여기 지금 엄청 따뜻해지고 있다고!>
<윤진수 : 형! 이거 온돌 맞죠? 유적지 전체에 온돌을 심은 거예요? 그렘린들이 지금 아무 것도 못하고 있어요!>
동료들의 반응도 단톡방에서 그를 흡족하게 해 주었다.
“으하하, 성공이구나! 자, 이제 나도 2층으로 올라가 보실까?”
아무리 불사신 리치라도 동료들과 함께 싸운다면 겁나지 않았다.
[원래 온돌이라는 게 이렇게 주먹구구로 되는 거였음?]
“그럴 리가 있나. 스킬빨과 레벨빨인 거지.”
자신도 몰랐으면서 뒤늦게 거들먹거리는 정다운이었다.
온돌 (2레벨)
- 작업 시간 3배 단축
- 작업을 하면서 쉽게 지치지 않는다.
- 온도 조절 가능.
마침 위에서 아이스 그렘린을 잡으면서 2레벨이 된 온돌 스킬은 작업 시간이 좀 더 빨라진 것 외에는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게 있지!’
바로 마지막 옵션인 ‘온도 조절 가능’의 범위가 대폭 상승한 것!
온돌 스킬이 아궁이의 화력을 극도로 끌어 올린 것이다!
정다운은 불바다, 아니, 불지옥으로 변한 3층 한가운데서 자신을 잡기 위해 쫓아오는 그렘린 리치를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음하하! 콜록, 콜록. 어디 여기까지 따라와 보시지! 쿨럭, 쿨럭. 정화!”
파아앗!
다만 다른 걸 떠나서 이러다 유독가스로 죽을 판이라, 정화 스킬로 얼굴 전체를 방독면처럼 둘러쌌다.
그러자 순식간에 숨 쉬는 게 상쾌해졌다.
[자기만 치사한 거 봐!]
“그럼 옆으로 붙든가!”
[쳇.]
토끼는 냉큼 정다운의 목마를 타고 뒤통수에 바싹 달라붙었다.
[크윽! 버러지여!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말리라……!]
한편 뒤따라오던 리치는 뜨거운 불길을 피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정다운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옛다, 선물!”
타조 위에서 리치를 향해 작은 돌멩이 하나를 휙 던졌다.
이까짓 돌멩이쯤이야 하는 생각에 그냥 무시하고 몸으로 맞았는데, 그 순간 주변의 불길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며 리치를 덮쳤다.
화아악!
[크윽! 태양석!?]
리치는 불이 붙은 로브를 벗으며 해골밖에 안 남은 헐벗은 몸을 외부로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정다운이 눈을 빛냈다.
“오호? 불사신이라도 데미지를 입긴 하나 본데?”
그는 신이 나서 계속 태양석을 던져 리치를 공격했다.
던질 때는 그냥 돌멩인데, 불에 닿는 순간 화염 마법 못지않았다.
[딱 봐도 어둠 속성과 냉기 속성이잖아요. 정화 스킬과 불로 공격하면 아프긴 할 거임.]
“일찍도 말한다?”
[이 정도는 전투직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본 상식임.]
“후……. 나는 이렇게 또 전투직에 한발 다가갔구나.”
정다운은 꿈에 가까워진 자의 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천장을 노려봤다.
“생각해 보니 미로도 복잡한데, 그냥 뚫고 올라가서 다시 뚜껑 덮는 게 낫겠다.”
바쁘니까 생각났으면 바로바로 움직이는 걸로!
쇠꼬챙이를 던져 천장에 쑤셔 박았다.
“돌 깨기!”
쩌적!
단단한 암석으로 된 천장에 금이 갔다.
그래 봐야 돌은 돌이다.
“돌 깨기! 돌 깨기!”
쩌적! 쩌적!
결국 리치의 공격을 피해 다니면서 천장에 구멍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주변의 연기가 화악! 하고 위로 빨려 올라갔고, 그 가운데 있던 정다운의 모습이 리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리치는 보고 말았다.
그 찰나의 순간, 정다운의 입가에 맺힌 비웃음을!
씨익.
[서라! 이노옴!]
극도로 분노한 리치는 데미지 입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그의 뒤를 쫓아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2층까지 올라가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흙더미가 쏟아져 내리며 그를 덮쳤다.
[이…… 노옴……!]
콰르르!
“휴, 됐다.”
리치를 산 채로 매장시키고, 구멍까지 완벽하게 막아 버린 정다운이 후련한 얼굴로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제 쟤 빠져나올 때까지 승우 형만 찾으면 되겠…… 응?”
“어? 다운아?”
그는 마침 그 옆을 지나가고 있던 구호열과 딱 마주쳤다.
“형이 왜 여기서 나와요?”
“……내가 할 말 아닐까?”
“그렇긴 하네.”
정다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구호열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유일하게 연락이 되지 않는 동료라서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옆에 여자 분은 누구?”
“하하, 그게 말이지.”
구호열은 머쓱하게 웃으며 원숙미가 넘치는 여성 참가자와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우와, 배신감! 그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여자를 끼고 계시네! 우린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토끼가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자, 순진한 노총각 구호열은 귀까지 새빨개지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아니야! 우연히 위험에 처한 걸 내가 구해 준 거야!”
[그런데 그거 함정임.]
“맞아! 함정에서 내가 구해 드린 분…… 뭐?”
[그 여자, 인간 아니라고요.]
토끼는 정색하며 구호열의 옆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간처럼 보이는 여성 참가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네? 제, 제가 인간이 아니라니요? 저는……!”
“맞아! 지금 토끼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어서요, 이 모쏠 노총각아. 죽기 싫으면 거기서 얼른 떨어지셈. 환상이랑 손잡은 건 노카운트예요.]
정다운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여자분, 지금 발이 투명한데요? 망령 같은 건가?”
그 말에 구호열은 문득 여자의 발을 내려다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래층에서 올라온 검은 연기가 여자의 다리를 통과해 지나가고 있었다.
“…….”
“…….”
누가 봐도 사람이 아니었다.
[던전엔 이런 함정도 있는 법이죠.]
치명적이진 않지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서서히 고갈되어 죽게 만드는.
구호열은 슬픈 얼굴로 그녀의 손을 놓았다.
“……어쩐지 배가 빨리 고파지더라.”
이제 보니 체력 수치도 절반이나 떨어져 있었다.
여자가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자, 잠깐만요! 호열 님!”
“……근육 강화.”
불끈!
압도적인 근육 펌핑!
안 그래도 두꺼웠던 근육들이 근력 강화 스킬로 인해 2배로 커지며, 그의 몸이 위압감 넘치게 변신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극도로 단련된 근육이었다.
[진정한 근육 돼지가 여기 있었네요. 근육으로 하늘도 뚫을 기세네.]
“워후. 옛날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원래 헬스 트레이너라더니, 재생에 근육 강화 스킬까지 생기면 너무 사기 아닌가?”
토끼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자아. 함정 제어구는 저거임. 첫사랑의 마무리를 직접 하는 것도 좋겠지.]
“첫사랑은 아니야! 내 나이가 몇인데!”
[오올?]
구호열은 수치심에 귀까지 빨개져서 너클을 낀 주먹으로 제어구가 있는 벽을 후려갈겼다.
콰직! 콰르릉!
“아아, 아아아……!”
거의 돌 깨기 수준으로 벽이 거창하게 박살이 났다.
그 여파로 함정 여자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라지면서도 아련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구호열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죽일 수 있었는데!]
소름.
“……잠깐이지만, 사랑했었다.”
구호열은 첫사랑에 실패한 소년 같은 표정으로 근육을 되돌렸다.
그 슬픈 사랑 이야기에 정다운과 토끼가 박수를 짝짝 쳤다.
[워낙 기본 체력이 높은 사람이라 이 정도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아마 지금쯤 미라 상태가 되었을 거예요.]
“와. 이 정도면 그냥 바닥 뚫고 내려오시지. 왜 여기서 이러고 계셨데?”
“누군 시도 안 해 봤는 줄 알아? 벽 정도는 부수겠는데, 바닥은 너무 단단해서 힘들더라고.”
투덜대던 구호열은 문득 정다운이 그 단단한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얼굴을 굳혔다.
“다운이 너, 그동안 엄청나게 강해졌구나. 대체 얼마나 고된 역경을 뚫고 왔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로가 생각하는 역경의 장르가 좀 다르긴 했지만.
토끼가 박수를 짝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자. 그래도 첫사랑 아저씨 덕분에 좋은 팁을 얻었어요.]
“첫사랑 아니라고 했지!”
[아무튼요. 이렇게 체력을 직접 흡수하는 함정들이 있다는 건 이 근처에 라이브 베슬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진짜?”
[에헴. 전직 도우미로서의 내 감이에요.]
그 말에 정다운이 눈을 빛냈다.
“그럼 모두를 이쪽으로 모이게 해야겠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서 또 움직였다간 서로 길이 꼬일 텐데?”
“이러면 되죠.”
정다운은 모두에게 귓말을 보냈다.
<정다운 : 나 2층 올라왔는데, 다들 지금 2층이지? 호열이 형은 지금 나랑 만났어.>
<류승우 : 다운아! 너 무사한 거지? 지금 어디야?>
<윤진수 : 호열 아저씨 찾았어요? 거기 어디에요?>
<정다운 :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근처 어딘가에 보스의 약점이 숨겨져 있는 것 같거든?>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다운 : 그러니까 다들 귓구멍 열고 잘 들어야 된다?>
그리고 그가 소지품에서 꺼낸 건 바로 사람처럼 생긴 두꺼운 무였다.
토끼가 눈을 반짝였다.
[호우. 비명초네요?]
“비명초? 그게 뭔데?”
“마녀의 시약으로 쓰이는 거라는데, 밟으면 비명을 질러요.”
정다운은 구호열의 발 앞에 비명초를 툭 던지며 자신의 귀를 막았다.
“자, 밟아요. 귀는 막고. 실연의 아픔 따위는 한 방에 날아갈 거야.”
“……?”
뭔지는 몰라도 구호열은 멍하니 시키는 대로 비명초를 발로 밟았다.
콱.
그러자 그 순간.
삐이이익-!
“#@%&!?”
비명초에서 터져 나온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마녀의 집을 뒤흔들었다.
“크헉!?”
“큭, 이, 이게 뭔!”
마녀의 집 곳곳에 퍼져 있던 모든 이들이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명초는 특별한 소리를 질러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소리는 엄청 크다.
<정다운 : 자, 모두 들었지? 소리 들린 방향으로 와. 시간 없으니까, 벽을 부수고라도 와.>
<류승우 : 너의 신호, 확실히 들렸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겁도 없는지 류승우의 답장이 가장 먼저 돌아왔다.
그런데, 그 신호를 들은 건 아래층에 있던 리치도 마찬가지였다.
[주, 죽인다. 이노옴!]
흙더미에서 빠져나오느라 흙먼지 가득한 리치의 모습은 거의 무덤에서 막 기어 나온 시체처럼 볼품없었다.
그만큼 리치의 눈빛은 정다운을 죽이고자 하는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것을 알아도, 사신의 낫이라도 천장을 뚫고 올라갈 재주는 없었다.
정다운이 막아 둔 흙을 파서 올라가는 것도 낫으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미궁의 모든 길을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계단으로 올라가면 그만인데…….
화르륵!
[…….]
거기까지 가는 길이 온통 불바다였다.
[……죽인다. 그놈만큼은 반드시 죽인다.]
리치는 부들부들 떨며 정다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