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89화>
* * *
고오오…….
보스룸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의자에 몸을 깊이 누이고 있던 망자들의 왕이 눈을 떴다.
화르륵!
퀭하게 파인 두 눈에는 심연의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침입자인가.]
크르륵.
쇠를 긁는 듯한 불길한 목소리.
그것은 하나의 음성이 아니었다.
듣기만 해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망자들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나의 잠을 깨우는 자는 누구인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르륵!
그 순간 몸을 감싸고 있던 낡은 로브 안으로 보이는 새하얀 뼈들.
하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에 의해 순식간에 그 색이 검게 물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가 옆에 있던 거대한 낫을 들어 올렸을 때, 검은 기운은 더욱 격렬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임에도 로브가 펄럭이며 그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한 손에는 사신의 낫.
다른 손에는 어둠의 기운이 지옥의 업화처럼 피어오르는…….
사신.
그 단어가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너라, 버러지여. 생명을 가진 자여. 나는 너를 저주한다.]
크르륵.
그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망자들의 왕.
그는 죽음의 사신이며, 마녀가 자리를 비운 주인의 처소를 지키는 영원의 가디언.
불사의 리치였다.
* * *
“……들었지?”
[네. 들어오라는데요?]
“게이트 설치.”
[그렇다고 바로 튀냐!?]
“튈 준비만!”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정다운은 바로 퇴로부터 확보했다.
그가 개미굴을 통해 들어온 지하 3층은 기괴한 분위기가 감도는 넓은 원형 실험실이었다.
어둑한 조명과 먼지가 두껍게 쌓인 책장들과 실험대들.
오랜 옛날 마녀들이 비밀스럽고 위험한 실험을 연구하던 흔적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누가 봐도 보스룸의 입구처럼 보이는 거대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꿀꺽, 꿀꺽!
<류승우 : 다운아! 절대! 절대 먼저 들어가지 마!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려!>
<윤진수 : 형! 거기서 최대한 멀어져요! 어디 숨어 있어요!>
보스룸에 도착했다는 말에 아까부터 동료들이 엄청나게 귓말들을 보내오고 있었다.
정다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내가 미쳤다고 혼자 저길 들어가?”
정다운은 보스룸에 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언제나 혼자 나대는 놈이 제일 빨리 죽는 법.
동료들이 올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는 게 현명했다.
마침 이곳에는 지나다니는 괴물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서 여유로웠다.
[그만큼 저 문 너머에 있는 존재가 위험하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조금만 떨어져도 괴물들이 있을 거임.]
토끼의 말에 정다운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저곳에 어떤 보스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이미 오창석 촌장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망자들의 왕.’
제국에 저주를 걸어 망자의 땅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바로 이곳에 유폐되어 있었다.
“유적지 이름이 마녀의 집이니까 마녀라도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마녀들은 오래 전에 모두 멸족했습니다. 이곳에 남은 건 그 잔재들뿐인 것 같습니다.>
종말의 용의 강림은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종말의 순간을 앞당긴 마녀들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었다.
알파는 씁쓸함을 느끼며 정다운에게 강력하게 경고했다.
<마녀들의 실험체들 중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리치’입니다. 그는 불사신이며, 라이프 베슬을 파괴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라이프 베슬.
리치의 생명 에너지를 담은 영혼의 그릇을 부르는 말이었다.
[리치는 그걸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곳에 숨겨 놓고 활동해요. 이 마녀의 집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임.]
“그런데 하필 여기가 미로란 말이지. 찾기 힘들게 해 놨네.”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창석 촌장에게 들은 팁은 여기까지였다.
결국 약점이 따로 있으니, 여기서 직접 보스와 싸우는 게 능사가 아니라 라이프 베슬을 찾아 다녀야 한다는 말.
그런데 하필이면 정다운은 개미굴을 통해 여기로 바로 도착해 버려서 난감한 상황이었다.
“여기서부터 역주행이라도 해야 하나? 촌장님 때는 3층 어딘가에서 찾아냈다던데.”
[그런 장소는 어차피 매번 바뀌는 법이죠. 던전이 바보도 아니고.]
그 순간, 또다시 보스룸 안에서 쇠 긁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너라, 버러지여.]
음산한 목소리.
그것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저주였다.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 전투 의지를 꺾어 평소의 절반도 힘을 내지 못하게 하는 디버프 저주.
하지만 정작 정다운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범독수리의 용맹’이 의외로 이런 데서조차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 안 들어간다니까 겁나 재촉하네. 자기가 나올 것도 아니면서.”
[님, 그러다 진짜 밖으로 나오면 어쩌려고요.]
“그럼 튈 거야. 리치는 저주도 걸고 마법도 쓴다며?”
[뭐 이런 당당한 겁쟁이가 다 있지?]
그런데 그때 알파가 정다운에게 실험실 책장들을 살펴볼 것을 권유했다.
<마녀들은 귀중한 마법 자산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 마법서가 있다면, 당신도 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역시 보스보단 잿밥이 먼저였다.
정다운은 눈을 빛내며 책장에서 먼지를 털어 내고 책들을 꺼내 펼쳐 봤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거기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겉만 그럴싸할 뿐 속은 전부 백지였던 것이다.
“뭐야? 왜 이렇게 깨끗해? 설마 오래 되서 잉크가 다 날아갔나?”
설마하고 다른 책들도 하나씩 꺼내 보니 다 마찬가지였다.
토끼가 심드렁히 대꾸했다.
[뭘 기대하셈? 여긴 참가자들이 다 지나다니는 곳인데, 그런 위험한 지식들을 그대로 남겨 뒀겠어요? 마법 시약들조차 전부 없애 버린 것 같은데.]
“거참, 치사하게들 구네. 아깝다. 마법사가 될 기회였는데.”
<매우 안타깝습니다. 신전의 주인이 마법사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알파, 넌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냐?”
<…….>
“…….”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알파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오너라, 버러지여.]
……저것도 자꾸 들으니까 은근 기분이 나빴다.
[흠흠, 아까워할 거 없어요. 어차피 님이 쓰고 있는 스킬들이 다 마법이나 마찬가지예요. 마법이란 결국 의지의 발현! 번거롭고 길기만 한 주문과 술식들은 원래 격이 낮은 자들에게나 필요한 거임.]
토끼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그 격 낮은 자라고.”
[아, 맞다.]
“…….”
그 말에 토끼가 진지하게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님 같은 버러지, 아니 천박한 사람한텐 마법서가 필요해요! 뭐라도 찾아보자! 똥 같은 마법이라도 하나 배워 두면! 아얏.]
그러다 꿀밤을 몇 대 맞고 나서야 깊이 반성했다.
[…….]
“이렇게 된 거, 여기를 좀 뒤져 볼까?”
[여기를요?]
“응, 혹시라도 여기서 라이프 베슬이 나오면 진짜 대박 아냐?”
[그렇게 쉽게 나올 것 같으면 아무도 고생 안 하죠.]
“없으면 없는 대로, 이제 보니 여기 되게 노다진데?”
생각해 보니 이 실험실에 챙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뭘 챙기게요?]
“전부.”
정다운은 그 말을 끝으로 진짜 마녀의 실험실에 있는 ‘전부’를 챙기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종이가 필요할 일도 있지 않겠어? 냄비 받침으로 써도 되고.”
일단 백지뿐인 마법서 수백 권을 소지품에 싹 털어 넣었다.
<소지품>
종이책(99), 종이책(99), 종이책(99), 종이책(99)…….
갑자기 몹시 문명인으로 진화한 기분!
“이 원목 책장들도 챙기자.”
그런데 그냥 챙기는 것이 아니었다.
정다운은 쇠꼬챙이를 J자로 구부려 소위 말하는 ‘빠루’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원목 가구들을 전부 뜯어내기 시작했다.
선반이 쩍쩍 벌어지며 분해되는 책장들을 보면서 토끼가 황당해서 물었다.
[왜 멀쩡한 걸 다 뜯어요?]
“던전에서 이렇게 멀쩡한 목재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던전에 나무는 많아도, 원목을 각목이나 넓은 판자로 가공하는 일은 목공소 기계 없이는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책장들은 전부 가공된 목재로 되어 있지 않은가.
이걸 나중에 재조립하면 훨씬 엄청난 걸 만들 수 있으리라.
정다운은 외뿔 멧돼지의 기운까지 써 가면서 거의 목수처럼 본격적으로 분해 작업에 열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더 귀중한 것도 얻을 수 있었다.
“짠! 못이다!”
정다운은 책장에 박혀 있던 못을 뽑아내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무슨 전설의 검이라도 발견한 줄.]
“어떤 면에선 검보다 훨씬 좋지. 전설의 검으로 벽에 액자를 걸 순 없잖아?”
[……?]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소지품>
쇠못(99), 쇠못(99), 쇠못(99), 쇠못(99)…….
못이 쌓여가는 숫자만큼 흐뭇함도 같이 쌓였다.
그의 수집욕이 불타올랐다.
“오? 이 유리 비커는 용케 아직 안 깨졌네? 이 실험관은 조미료 담으면 딱이겠다.”
“이건 또 뭐지? 펜촉? 잉크만 구하면 낙서할 때 쓸 수 있겠는데.”
[…….]
얼마 후.
휑…….
“휴. 보람찬 쇼핑이었다.”
개운한 얼굴로 이마에 땀을 훔치는 정다운.
처음엔 분명 뭐가 많이 있었던 것 같은 마녀의 실험실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이제 이곳에는 마녀들이 이사라도 간 것처럼 모든 짐이 싹 빠지고 잡다한 쓰레기와 먼지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거의 하루 종일을 앞에서 이러고 있었는데도, 보스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혹시 몰라서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게이트도 미리 설치해 뒀건만, 망자들의 왕은 여전히 밖의 상황을 모르는 분위기였다.
토끼는 아련한 눈길로 보스룸을 쳐다봤다.
망자들의 왕이라고 했던가?
‘너 이제 그지야…….’
[오너라, 버러지여.]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지금은 구슬프게 들렸다.
“아, 찾았다. 여기구나!”
쩌적!
짐을 다 빼고 나서도 한참을 미련을 못 버리고 보스룸 근처를 서성이던 정다운이 바닥에서 벌어진 틈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비밀 공간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낡은 보물 상자!
[헐? 설마 진짜 라이프 베슬은 아니겠지?]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야.”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보물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 수북이 쌓여 있는 살벌하게 생긴 칼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식칼 하나가 있었다.
[도살자의 칼 +4]
- 내구도 : 100/100(%)
- 옵션 1 : 도축 (3레벨)
- 특수 옵션 : 흡혈 (1레벨)
“찾았다.”
특수 옵션 흡혈.
왜 그가 절대로 이것만큼은 안 내놓으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숨겨져 있던 보물이 바깥 공기에 닿은 순간.
[……내 보물을 노리는 자는 누구인가!]
쩌렁쩌렁!
망자들의 왕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